어떤 기술로 대체할 수 없는, 80세 거장의 아낌없는 한 소절
10여 년 전 DJ DOC의 리더 이하늘이 한 페스티벌 무대에 올라 멤버들과 첫 곡을 부른 뒤 털썩 주저앉고선 "힘들다"고 숨을 헐떡거렸다. 겨우 첫 곡이었을 뿐인데도, 관객들은 이 장면을 이해와 동정, 그리고 해학의 눈길로 바라봤다. 지천명(知天命·50세)에 이르면 '댄스'라는 사슬로부터 해방돼야 할지 모른다. 머리가 시키고 심장은 뛰어도, 몸이 말처럼 쉽게 듣지 않는다.
여기 우리나라 나이로 올해 80세인 'CM송(광고방송용 노래)의 대부' 김도향이 데뷔 55주년 기념 콘서트에서 엘비스 프레슬리의 명곡 '하운드 독'(Hound Dog)을 부르고 나서 "아, 힘들다"고 말할 땐 더 이상 이하늘의 '그때 그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객석 한켠에서 "저게 가능하다고?" 같은 얕은 충격의 말이 옆 관객의 숨소리를 타고 흐르는가 하면, 노래하면서 빠른 리듬에 맞춰 춘 다리털기 춤을 칭찬하듯 "20대로 회춘"이라는 극찬도 쏟아졌다. 지난 6월29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엠팟홀에서 열린 그의 무대는 우습게 봤다가 큰코다칠 뻔한 '반전'과 '감동'의 드라마였다.
푸른 와이셔츠에 흰 재킷으로 한껏 멋을 낸 노신사가 포문을 연 '렛 잇 비 미'(Let it be me)에선 수십 년의 경험과 관록이 아니면 드러낼 수 없는 독보적 표현이 아주 느린 4박자에 실려 은은하게 가슴 한 켠을 때렸다. 어느 마디에서는 순간 눈물샘을 자극했다. 알싸한 그리움과 애틋함이 뒤섞인, 설명하기 어려운 이 감정을 어떻게 말로, 글로 담아낼 수 있을까.
느린 박자 곡으로 한 시간을 채울 것이라는 관객의 섣부른 기대도 이 생생한 뮤지션은 거부했다. 첫 곡에 이어 터진 빠른 리듬의 곡 '하운드 독'(Hound Dog)을 시작으로 진 빈센트의 '비 바파 룰라'(Be-Bop-A-Lula), 톰 존슨의 '킵 온 러닝'(Keep on running)까지 연달아 3곡을 부를 때까지 그는 단 한 차례도 음정이나 박자를 놓치는 법이 없었다.
3곡을 끝내 다 부르고 나서 그는 "80세가 되니까, 이제 다리가 안 움직인다"며 농을 던진 뒤 "에어콘 때문에 춥고 (저녁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배부르고 감기에 걸려서 좀 힘들 뿐, 평소 내가 쏟는 에너지의 10% 정도 밖에 안 된다"고 자신감을 내보였다.
김도향은 KBS 탤런트로 데뷔해 CM송 작곡가에 이어 가수로 전향한 멀티 플레이어의 산증인이다. 수많은 경험에서 나온 스토리들은 그의 가창만큼 재미있고 감동적이고 또 즉각적으로 귀에 꽂혔다.
"원래 그럴(가수가 될) 생각이 없었는데, 친구의 방송 출연을 위해 '벽오동'이라는 곡을 지었어요. 음악을 제대로 공부해 본 적은 없지만, 민요 베이스로 만든 이 곡에 대중이 좋아하다 보니, 어느새 제가 공짜로 스타가 돼 있더라고요."
'벽오동'을 현장에서 다시 들어보니, 가창에 처음 놀라다가 결국 작곡 능력에 깊은 감동이 밀려왔다. 시작부터 천부적 감각으로 가요계에 발을 디뎠다는 생각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고 해야 할까. 이를 전적으로 증명하는 사례들이 바로 CM송이다.
"이상하게 생겼네~~"(스크류바)하고 시작된 CM송이 메들리로 나오자, 객석 곳곳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중장년은 물론, 10·20대 젊은 층도 한 번씩 들어본 듯한 표정으로 따라 부르며 신기해했다. '뽀삐' '맛동산' '사랑해요 LG' 등까지 이어질 땐 무대 분위기도 최고로 달아올랐다.
그의 작곡은 다원적(多元的)이고 다층적(多層的)이었다. 1분 안팎의 CM송만 잘 만들 줄 알았던 '동요 수준'의 작곡 능력이 '벽오동'의 깊은 한의 노래나, '언덕에 올라' 같은 국민가요의 보편적 정서를 아우르는 다원의 세계로 향했고 '바보처럼 살았군요' 같은 초절정 히트곡을 통해 보여준 정통 대중가요로의 또 다른 세계와의 접점이나 드라마 OST('불량주부'에서 '시간')로의 확장력은 다층의 밀도 있는 음악 세계로 이어졌다.
CM송 메들리가 끝난 뒤 그는 "나는 마음으로 음악을 했지, 눈이나 귀로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90분간 이어진 무대에서 노구(老軀)라는 선입견으로 안쓰럽게 바라보려 했던 마음 자체가 기우였다. 80세에 이르러 팬의 중요성을 알고 이제 컴퓨터 음악에 영감받아 내년엔 새로운 음악을 선보이겠다는 노년의 열정 앞에 걱정과 우려는 사족일 뿐이었다. 그의 말대로 90세까지 아무 걱정 없이 무대를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가 '바보처럼 살았군요'를 부를 때 들려준 인생철학은 요즘 10, 20대에게 긍정적 해석으로 유행하는 '원영적 사고'에 버금가는 중장년을 위한 '도향적 사고'로 인용할 만하다.
"제가 공연하면서 쥐가 난다고 하고 아프다고 말하는 것도 결국 '아프니까 살아있다'는 걸 드러내는 것이겠죠. 누구에게 돈 떼이면 전생에 (내가) 돈 떼먹어서 그렇다고 생각하세요. 인생이 달라집니다. 하하."
'바보처럼 살아왔을지' 모를 우리 인생이 거장이 건넨 한마디에 새로 태어난 기분이었다. 이런 무대를, 이런 공감을 어디서 쉽게 느낄 수 있을까.
김고금평 에디터 danny@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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