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슬 하나 파편 하나에도 다정함 담아… 여성의 힘과 치유능력 형상화[세계로 가는 K-조각의 미래Ⅱ]
(2) 여성 서사로 초월적 세계 이룬 작가 이수경
버려진 사물·파편들 모아
새로운 생명체 탄생시켜
부풀어 오른 작품 중심부
여성의 풍요로움을 상징
깨진 사물들 서로 기대며
배척 아닌 공존을 투영해
여성을 소녀로 묘사하는건
세속의 더러움 淨化 이미지
둥글게 부풀려진 넓은 치마를 입고 도열한 여인들이 군무를 춘다. 장신구로 한껏 치장된 머리는 사원의 첨탑이나 불꽃의 형상처럼 솟구쳐 오르고, 그 아래로 청초하고 앳된 소녀들의 얼굴이 기도하듯 자리한다. 그녀들은 바리공주요, 구슬할망이며, 타라(티베트의 여성 보살)이고, 동시에 성모마리아이다. 작가 이수경은 지난 2021년 전시 ‘달빛왕관’에서 동서양의 종교적, 신화적 이야기 속의 여성들을 일종의 신상으로 묘사하며, 이들이 군락을 이루어 연대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한 해 뒤 작가의 스물아홉 번째 개인전을 통해 이들에게는 ‘다정한 자매들’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다정함’으로 여성적 태도를, ‘자매들’을 통해 여성 간의 연대를 드러낸 것이다.
‘번역된 도자기’(2002∼)가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지만, 오래전부터 이수경 작가의 작업세계를 관통해온 주제는 여성의 삶과 정체성에 관한 것이었다. 작가는 1992년 첫 번째 개인전 ‘나와의 결혼’에서 자신이 동시에 신랑과 신부가 되어 찍은 웨딩 사진, 끈이 떨어져 신을 수 없는 화려한 하이힐 등을 선보이며 여성의 현실적 욕망과 좌절을 냉소적으로 다룬 바 있다.
이수경 작가는 1988년 이후 본격적으로 유입된 서구 페미니즘의 영향을 받은 세대에 속한다. 1980년대 민중미술 속에서 태동한 1세대 여성주의 작가들과 비교하면 보다 이론적이고 다양한 주제의식 속에서 페미니스트 미술을 수용했다. 1990년대에 20대와 30대를 보내며 결혼과 출산, 양육을 경험한 작가에게 여성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과 미술가로서의 정체성의 간극을 메워 나가는 과정에서 녹아든 것이 여성 서사이다.
작가에 따르면 ‘달빛왕관’ 연작은 “너무 크고 무거워서 절대로 머리에 쓸 수 없는, 왕관 자체가 몸이 되어버린 작업”이다. 권력의 상징인 왕관을 머리 위가 아닌 받침대로 두고, 이곳으로부터 여인의 신체이자 신상이 되는 사물의 파편들이 식물처럼 자라난다. 그 표면은 철, 청동, 유리, 자개, 진주, 원석, 거울이 뒤덮고 있으며, 천사, 기도하는 손, 십자가, 용, 호랑이, 바로크풍의 식물 문양 등이 곳곳에 드러난다. 이들 파편은 주로 장신구에 쓰이는 금속 장식 조각들로, 오래된 믿음의 흔적이 담겨 있으나 지금은 버려지고 세속화되어 본래의 위치를 상실한 것들이다. 이들은 완벽하지 않다는 이유로 장인에 의해 깨져버린 ‘번역된 도자기’의 파편들과 유사한 의미를 갖는다. 작가는 이들 버려진 사물과 파편들을 모아 새로운 형태,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킨다. 작품 대부분은 중심부가 원형으로 부풀어 올라 사물들로 빈틈없이 채워진 형국인데, 이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나 루벤스의 삼미신에 비견될 만한 여성의 생식력과 풍요로움의 상징으로도 읽힌다.
제목에서 언급한 달은 원형적으로 모든 것을 비추고 드러내는 남성적인 태양과 대비되는, 어둠 속에서 고고하게 빛나는 여성적 공간이다. 태고로부터 무한한 상상력을 품고 그림자 뒤로 어둠을 안은 신비로운 존재이기도 하다. 이수경 작가의 작품에서 달빛은 사물들이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 신성을 회복하여 다시 빛나게 하는 에너지로 작동한다. 깨어진 도자기가 다시 하나의 완전한 도자기로 부활하고, 버려진 천사상이 왕관의 권력을 딛고 올라 영성을 되찾게 하는 동력이 된다.
작가 이수경의 작업은 대부분 다양한 재료를 완벽하게 통제하고 섬세하게 조형화하는 수공의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전통적인 조각에 앞서 수공예를 강조하는 태도나 동서양의 귀한 원석과 깨어지고 버려진 사물을 구분하지 않고 촘촘히 하나로 엮어 나가는 방식은, 예술의 위계뿐 아니라 일상의 편견에서도 벗어나 만물을 구제하고 아름답게 소생시키려는 의지를 드러낸다.
이 모든 것을 관장하듯 자리하는 것은 바리공주의 얼굴이다. 작가는 여성을 대부분 어린 소녀의 얼굴로 묘사하는데, 이는 모두 바리로 해석될 수 있다. 바리로 분한 소녀들은 세속의 더러움과 고난의 응어리로부터 벗어난 정화(淨化)의 이미지이며, 궁극적으로 정화의 과정을 통해 영성을 품게 된 존재라 할 수 있다.
이수경 작가는 2003년 무렵 몸의 감각을 끌어올리기 위해 경면주사를 이용한 불화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종교적이고 신화적인 주제에 빠져들었다. 그중 ‘바리 설화’는 2005년 ‘번식 드로잉’을 시작으로 2015년 3D 프린팅 작업인 ‘모두 잠든’에서도 직접적으로 다룬 바 있는 작가의 오래된 주제 중 하나이다. 딸이라는 이유로 부모에게 버림받지만 그들을 살리기 위해 생명수를 구하러 저승으로 떠난 바리는 갖은 고행을 거쳐 결국 부모를 살리고 이후 이승과 저승, 인간과 신을 잇는 ‘무당’의 운명을 선택하며 한국 모든 무당의 조상이 된다. 바리 설화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핍박받은 바리의 삶을 통해 남존여비 사상과 가부장적 사회구조를 비판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달빛왕관:구슬할망’(2021)에 등장하는 ‘구슬할망’ 역시 한국의 여성 설화를 대표한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어린 소녀가 한 사공을 만나 제주도로 흘러들어가 ‘해녀’가 된다. 그녀는 뛰어난 능력으로 전복과 진주를 수확해 이를 임금에게 진상하고 오색 구슬을 하사받는다. 이때부터 구슬할망으로 불리며 이후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제주도의 토착 수호신이자 후손들에게 복을 내려주는 조상신이 되었다. 바리 설화와 비슷한 구조지만 구슬할망은 운명과는 별개로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개척해 나가는 인물이다. 물질을 하며 고달픈 삶을 살아가던 제주 해녀들의 꿈이 깃든 설화로, 작가는 오래된 유리 부표와 3D 프린팅한 바리의 두상을 사용해 구슬할망을 재현했다.
이수경 작가의 작업에 자주 등장하는 손의 이미지는 티베트의 여성 보살인 ‘타라(Tara)’의 것이다. 깨달음으로 인도하고 중생의 수명을 관장하는 타라의 손바닥에는 눈이 있어 중생들의 모든 고통을 들여다본다. ‘북극성’(2012)에서 소녀들의 가녀린 손은 인간과 동물을 보듬거나 기도하는 자세로 표현된다. ‘달빛왕관:다정한 자매들’(2021)에 나타나는 호랑이 가죽을 머리에 쓴 여인들은 단군신화 속 호랑이 부족에서 기원한다. 단군에게 선택받지 못한 호랑이 부족의 여인들은 자신들만의 왕국을 꾸려가며 여성들의 연대와 협력, 보살핌을 통해 무한히 증식해 나간다. 강력한 모성신의 이미지로 분한 수십 개의 가슴과 서로의 어깨에 의지해 일어서는 소녀들의 군상은 그 자체로 여성 연대의 저력을 상징한다.
바리공주와 구슬할망, 타라와 호랑이 부족의 여인들과 같은 종교적, 신화적 여성 주인공들이 이수경 작가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이들이 현대 사회에도 온존하는 여성이기에 겪어야 하는 차별과 고난을 드러낼 뿐 아니라, 이를 극복하는 여성의 힘과 저력, 치유 능력을 형상화하기 때문이다. 작가 이수경은 깨진 도자기의 금(crack)을 금(gold)으로 메우는 방식을 통해 치유의 의미를 전달하는 것으로 자주 언급돼 왔다. 최근에는 ‘달빛왕관’을 통해 치유를 넘어 영성의 단계로, 초월적 지점으로 나아간 듯하다.
작가는 ‘달빛왕관’을 진행하며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영성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한다. 모든 존재는 연결돼 있고 따라서 이미 완전한 존재라는 것이다. ‘달빛왕관’은 우리들에게 현실의 두려움과 불안에서 벗어나 “나 자신이 이미 완전한 존재이고, 나의 몸은 곧 성스러운 신전이요 나의 기운은 휘황찬란한 왕관 자체”라는 믿음을 전한다.
깨진 사물들이 서로 엉기고 기대어 온전한 하나의 형태를 이루는 과정에는 갈등보다는 화해를, 배척이 아닌 공존을 바라는 다정함이 깃들어 있다.
남녀를 조화롭게 하고, 동서양 문화를 횡단하며, 미술과 공예를 가로지르는 작가 이수경의 작품세계에는 전 인간과 만물의 가치를 소중히 하는 진정한 의미의 여성주의 세계관이 담겨 있다.
강은주 미술평론가
■ 이수경 작가는
1963년 서울 출생으로, 서울대 서양학과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1992년 서울과 도쿄(東京)에서 개최한 첫 개인전 ‘나와의 결혼’을 통해 주목받았으며, ‘여성-비어있는 풍경’(1992)전과 ‘여성미술제-팥쥐들의 행진’(1999) 등다수의 여성주의 미술 그룹전에 참여했다. 2001년 처음 선보인 ‘번역된 도자기’ 작업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2017년 이후 ‘달빛왕관’ 시리즈로 조각 작업의 주제를 확대했다. 몸과 마음을 단련하기 위해 시작한 경면주사로 그리는 ‘매일 드로잉’과 자가 증식하듯 피어오르는 ‘장미회화’ 시리즈로 독창적인 회화 세계를 선보였다.
제6회 광주비엔날레(2006), 제57회 베니스비엔날레(2017) 등 주요 국제전시에 초대받았으며, 대만 타이베이현대미술관(2015), 이탈리아 나폴리 카포디몬테미술관(2019), 프랑스 파리 세르누치 파리시립아시아박물관(2023)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국내 개인전은 ‘내가 너였을 때’(2015, 대구미술관)와 ‘달빛왕관’(2021, 아트선재센터) 등이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 미국의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보스턴 미술관, 일본의 후쿠오카(福岡) 아시아 미술관, 런던의 영국박물관, 홍콩의 M+ 미술관등이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올가을 대만 주밍미술관에서 개최되는 아시아현대조각전과 2025년 상반기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열리는 도자 그룹전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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