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창 마시는 술 정 떨어지는 술 [한주를 여는 시]

이승하 시인 2024. 7. 15.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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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쿠프 한주를 여는 시
이승하의 ‘내가 읽은 이 시를’
이승하의 ‘아버지한테 면회 가다’
인간 관계마저 삼키는 술
그런데도 끊지 못하는 것

아버지한테 면회 가다

이곳에는 술이 없습니다 아버지
숙취의 아침에 다시 마시는
해장술도, 외상 술값도
고래고래 고함지르며
욕할 대상도, 발길질할 식구도

명정(酩酊)의 상태에서 기억이 끊겨
때때로 저를 보고
니 누고……?라고 물어보셨죠
아버지…… 저예요……
면회 오지 마라…… 고만 와……

지금은 손을 떨고 계시지 않네요
온갖 것을 보는 환각 증세와
온갖 소리에 시달리는 환청 현상
무조건 술 냄새라고 우기는 환취 현상
그 모든 금단 현상에서 벗어난 것입니까

이제는 정말 술 없이
살아가실 수 있는 겁니까
주기적인 자살 협박과 살해 충동
아버지 손에 부엌칼을 들게 한
좌절감과 열등감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고……
아버지는 사회라는 거대한 톱니바퀴에 낀
한 마리 바퀴벌레였어요
눈치를 보다 술로 달아나던
술로써만 해방감을 만끽하던
손을 떨다가도 당당하게, 호탕하게

아버지
이 병원 문을 도대체
몇 번이나 다시 들어와야
그 술, 술의 쇠사슬에서
풀려나시는 겁니까
술의 유혹 술의 협박
아아, 술의 압제에서.

「뼈아픈 별을 찾아서」, 달아실, 2020.

알코올 중독을 다룬 언론 보도를 보니 아주 심각하다. 보건복지부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중독자 수가 통계에 잡힌 이들만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반면 중독자 중 진료를 받은 이의 수는 감소하고 있단다. 어쨌거나 알코올 중독자가 150만명을 넘어섰다고 하니 심각한 수준이다.

술이 없는 인생은? 재미가 없다는 것이 애주가들의 답일 것이다. 회식 중의 두세 잔이나 반주 정도면 문제 될 턱이 없다. 약간의 흥분을 가져오고 즐거운 분위기를 고조하는 데 술만 한 게 없다. 술맛을 아는 사람들은 목을 타고 찌르르 넘어가는 술의 그 오묘한 맛을 모른다면 인생의 낙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한다.

[사진=달아실 제공]

이 시에서는 알코올 중독증이 너무 심해 병원에 입원해 있는 아버지를 면회 간 아들이 화자로 나온다. '필름'이 끊기면 아들도 못 알아보고 '니 누고?' 하고 묻기도 하고, 이성을 상실한 상태에서 칼부림 장면을 연출하기도 한다. 믿기 어렵겠지만 알코올 중독자들의 세계를 취재하면서 확인한 팩트들이다.

희한한 일은 손을 떨다가도 술이 들어가면 손을 떨지 않고 정신이 반짝 들어오는 경우가 있더라는 것. 화자는 아버지의 알코올 중독을 최대한 이해하는 점에서 효자에 가까운데, 가족 간의 정도 떼게 하는 것이 사실은 왕창 마시는 술, 이성을 마비케 하는 술이다.

술 권하는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일까. 전에는 대한민국의 회식문화에서 억지로 술을 마셔야 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문제는 술이 술을 부른다는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코로나 사태 이후 취객들이 우르르 3차, 4차로 가서 대취하는 일이 줄었다는 것. 그러나 음주운전 보도는 줄어들지 않고 있으니 딱한 노릇이다.

이승하 시인
shpoem@naver.com

이민우 기자
lmw@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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