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이에게 케렌시아를 허하라 [신영전 칼럼]
신영전 | 한양대 의대 교수
모든 이에게 케렌시아를 허하라. 시인 류시화는 “투우장 한쪽에는 소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구역이 있다. 싸우다 지친 소는 자신이 정한 그 장소로 가서 숨을 고르며 힘을 모은다. 기운을 되찾아 계속 싸우기 위해서다”라고 썼다. 그는 그곳을 피난처, 안식처라는 뜻을 가진 스페인어 ‘케렌시아’(Querencia)라 불렀다. 또 뱀, 개구리 등 동물도 그곳을 가지고 있으며, 휴식이 없으면 생명 활동의 원천이 바닥나니, 그곳은 ‘회복의 장소’ ‘인간 내면의 성소’를 넘어 ‘존재계가 생명을 지속하기 위한 본능적 부름’이라고 썼다. 케렌시아는 단지 공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방해받지 않고 몸과 마음이 안전하고 편하게 쉴 수 있는 조건, 시간, 공간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어릴 적 내 케렌시아는 다락방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상상의 나래를 폈고,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몇번 울기도 했던 것 같다. 거기서 깊이 잠들어 가족이 실종신고를 할 뻔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나는 내 생애 가장 단꿈을 꾸며 꿀잠을 잤다. 대학 재수 시절, 내 케렌시아는 석양 무렵, 학원 건너편에 있던 약현성당 마당의 벤치였다. 가톨릭 신자도 아니지만, 두번째 도시락을 까먹은 뒤 30분쯤을 보낸 그곳, 그 시간은 나를 버티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꿈꾸게 해주었다.
휴가의 계절이다. 휴가는 자신의 케렌시아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휴가의 효과에 대한 13개 논문을 분석한 프란시스카 스페스는 휴가가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부정적인 감정, 탈진, 스트레스 등을 유의하게 감소시킨다고 했다. 미국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최근 연구에서는 유급 휴가가 10일 더 연장될 때마다 여성의 우울증 발병 확률이 29% 줄고, 특히 2명 이상의 자녀를 가진 여성은 38%나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 연간 노동시간은 2023년 1872시간으로 여전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1742시간에 비해 130시간(월 10.8시간)이 많고, 독일의 1343시간에 비하면 529시간(월 44시간)이나 길다.근로자 휴가조사에 따르면, 2022년에 상용 근로자는 연차 휴가 12.7일, 특별 휴가 0.8일을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연차를 다 쓰지 못한 경우도 23.8%에 달했고, 종사자 규모가 작을수록 휴가 사용 일수가 적었다. 휴가 중 업무 관련 연락을 받은 적이 있다고 응답한 비율도 26.8%였다.
더 나은 휴식을 위해선, 연장 노동시간의 총량 관리와 노동일 간 11시간 연속 휴식의 제도화가 필요하고 연장, 야간, 휴일 노동시간 적립제의 실효화도 필요하다. 오래전부터 대부분의 선진국이 해오고 있는 상병수당 법제화로 아플 때 편히 쉴 수 있어야 한다. 원격근무가 확산되는 상황에서 ‘연결되지 않을 권리’를 보장하는 일도 과제다. 무엇보다 법의 사각지대에 있는 소규모 사업장과 이주노동자를 제도 내로 포함하는 것은 여전히 시급한 시대적 과제다.
우리의 휴가는 늘 미안하다. 휴가를 떠나지 못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2016명, 작년 한해 산업재해 사망자 수다. 지난 5월28일 배달노동자 정슬기(41)씨는 새벽까지 주 63시간 일하다 쓰러져 숨졌고, 9일 폭우 속 택배기사 ㄱ씨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배송을 못 할 것 같다”는 말을 끝으로 실종 뒤 이틀 만에 숨진 채 발견됐다. 동료 ㄴ씨는 아침 7시까지 배송을 마감하지 못하면 다음에 일을 아예 배정해주지 않아 폭우 속에도 배송에 나설 수밖에 없다고 했다. 지난달 24일 경기 화성시 아리셀 리튬전지 공장 화재로 사망한 23명은 물로도 꺼지지 않는 1천도 넘는 화마 속에서 죽었다. 기업주는 자기 회사를 위해 일하는 이들의 얼굴과 이름도 알지 못했다. 우리는 케렌시아는커녕, 몸 하나 피할 수 있는 작은 통로와 공간마저 허락하지 않는 야만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래도 우리는 케렌시아로 떠나야 한다. 이는 살아남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신학자 헨리 나우웬의 말처럼, 한적한 곳을 모르는 삶, 고요가 자리하지 않는 삶은 쉽게 파괴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곳에서 우리는 존재가 소유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노력한 결과보다 우리 자신이 훨씬 더 가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발견해야 한다. 더 나아가 그곳이야말로 이 탐욕 가득한 세상을 전복시킬 새로운 생각, 마음, 결의를 만들어낼 수 있는 유일한 시간과 장소이기 때문이다.
모든 이에게 케렌시아를 허하라. 하지만 케렌시아를 찾은 이의 몫도 있다. 그곳에선 잠시 휴대전화를 꺼두어도 좋다. 거기서만큼은 온전히 자신의 본전과 만나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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