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의 방북 푸틴, 2000년엔 ’북미중재’ 올해엔 ’반미연대’ [정욱식 칼럼]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 정부 수립 이후 현재까지 평양을 가장 많이 방문한 외국 정상은 누구일까? 러시아의 대통령인 블라디미르 푸틴이다. 그는 2000년 7월에는 구소련을 포함한 러시아 역사상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했고, 올해 6월에도 평양을 찾았다. 24년을 사이에 두고 이뤄진 푸틴의 평양행을 비교해보면 한반도를 포함한 국제 정세가 얼마나 변했는지 실감하게 된다.
우선 미국과 러시아가 전면적인 대결을 벌이고 있는 오늘날만큼은 아니지만, 2000년에도 두 나라 사이에는 전략적 갈등이 있었다. 당시 미국의 빌 클린턴 행정부는 공화당 및 군산복합체의 강한 압박을 받아 미사일방어체제(MD)를 추진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서는 1972년 미국과 소련이 체결한 탄도미사일방어(ABM) 조약의 개정이 필요했다. ABM 조약은 사실상 MD를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클린턴은 푸틴의 동의를 구하려고 했다. 하지만 MD가 미·러간의 전략적 균형을 와해하고 이미 동진을 거듭하고 있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확대를 가져올 것이라고 간주한 푸틴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MD 문제는 2000년대 초반 국제 정세의 가장 ‘뜨거운 감자’로 부상했다.
나토의 주요 회원국들의 태도도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1990년대 후반 이래 지속되어온 나토의 동진과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이후 갈림길에 서 있던 나토와 러시아의 관계는 2022년 러시아의 불법적인 우크라이나 침공을 거치면서 당분간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러시아를 ‘공동의 적’으로 규정한 미국 및 유럽의 나토 회원국들은 강력한 결속력을 과시하면서 러시아의 약소국화를 추구하고 있고, 러시아는 반미·반서방의 기수를 자처하고 있다.
하지만 2000년의 풍경은 크게 달랐다. 유럽연합 외무장관인 자비어 솔라나는 “만약 미국이 MD 배치를 끝까지 고집한다면, 국제사회는 미국의 건방진 일방주의에 실망하게 될 것”이라며 직격탄을 날렸다. 요슈카 피셔 독일 외무장관 역시 “이 문제는 미국과 러시아에 충돌을 가져올 수 있는 핵심적인 사안”이고, “미국 한 나라의 결정에 국제사회는 엄청난 영향을 받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프랑스 정부도 “MD의 필요성에 회의감을 느끼고 있고, 유럽연합의 다수 국가들도 마찬가지”라는 입장을 밝혔다. 북미 대륙에 있는 캐나다도 이러한 입장에 동조했었다.
한국과 조선의 행보도 크게 다르다. 오늘날 우크라이나 전쟁은 윤석열 정부에겐 ‘가치 연대’를 표방한 ‘친미주의’를, 김정은 정권에겐 ‘국제질서의 다극화’를 앞세운 ‘반미주의’를 소비하는 무대로 활용되고 있다. 유라시아 동쪽 끝에 있는 남과 북이 유라시아 반대편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 주요 무기 공급처들로 평가받을 정도다. 그러나 2000년에는 크게 달랐다. 김대중 정부는 ‘한반도 냉전 구조 해체’를 목표로 북미관계 중재와 촉진에 적극 나서는 한편, 사상 최초의 남북정상회담도 성사시켰다. 김정일 정권 역시 남북대화와 북미대화가 선순환을 그리면서 50여 년간 지속된 적대적인 북미관계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복병이 있었다. MD가 바로 그것이다. 당시 미국은 한편으로는 김대중 정부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지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을 MD의 포섭 대상으로, 조선을 그 구실로 삼으려 했다. 미국은 북·중·러와 가장 가까운 한국을 MD의 최적의 동맹국으로 간주했고, 미국이 MD 명분으로 중국이나 러시아를 거명할 수 없었기에 ‘북한위협론’의 활용가치는 매우 컸다. 하지만 이건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김대중 정부가 미국의 MD 참여 요구를 거절하면서 평화프로세스에 박차를 가한 것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바로 이때 푸틴이 평양을 찾았다. 타이밍부터 절묘했다. 그는 2000년 6월 상순에 모스크바를 방문한 클린턴의 ABM 조약 개정 요구를 거부했다. 6월 중순에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면서 미국에서 맹위를 떨쳤던 ‘북한위협론’의 위세도 크게 꺾였다. 그러자 러시아 정부는 푸틴의 아시아 순방 일정을 공표했다. 푸틴은 7월 17〜19일에 중국 베이징을 방문해 장쩌민 주석과 정상회담을 갖고 ‘미국의 MD에 반대한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7월 21〜23일에는 일본 오키나와에서 G8 정상회담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푸틴도 참석하는 이 회의의 최대 의제가 바로 ABM 조약 및 MD 문제였다. 그리고 그는 오키나와에 앞서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을 만났다.
정상회담을 마친 푸틴은 기자회견을 통해 “다른 나라가 위성 발사를 지원하면 장거리 미사일 개발을 포기할 의사가 있다”는 김정일의 발언을 공개했다. 이를 두고 외신들은 “미국의 MD에 제동을 걸려고 하는 푸틴이 이 기회를 즉각 잡았다”고 평했다. 미국은 조선의 미사일 위협을 구실로 삼아 MD를 구축하려고 했는데, 김정일-푸틴이 그 김을 확 빼버린 것이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푸틴은 G8을 ABM 조약 사수 및 MD 반대의 무대로 활용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미국의 여러 동맹국들도 러시아와 뜻을 같이 했다. 그 결과 미국도 동의한 G8 공동성명에는 “전략적 안정의 초석이자 전략 공격무기 감축의 기초인 ABM 조약을 보존하고 강화한다”는 조항이 담겼다.
난처해진 클린턴 행정부는 한 달여 후에 MD를 유보하겠다고 발표하고는 북미 고위급 회담에 본격적인 시동을 걸었다. 이에 힘입어 북미 양측 정권의 2인자들이 워싱턴과 평양을 교차 방문했고 클린턴은 방북도 약속했다.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북미정상회담도 가시권에 들면서 ‘냉전의 외로운 섬’으로 불렸던 한반도에도 탈냉전이 찾아오는 듯했다. 하지만 11월 미국 대선에서 MD에 사활을 건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후보가 당선되면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부시 당선자 진영은 MD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며 클린턴의 방북을 반대했고, 취임 직후엔 북미 회담의 ‘유망한 요소’를 걷어차고 조선의 미사일 위협을 이유로 MD 구축을 선언했다. 이에 대한 국제적 비판 여론이 비등해질 때 발생한 9·11 테러를 ABM 조약 탈퇴의 빌미로 삼았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오늘날, 한반도를 포함한 국제 정세는 너무나도 달라졌다. 24년 만에 이뤄진 푸틴의 방북은 이를 상징한다. 24년 전 그의 방북은 미사일 문제로 난항을 겪던 북미관계를 중재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북미를 상대로 러시아가 조선의 위성을 대리 발사해줄 수 있다는 절충안도 내놓았다. 하지만 최근 그의 방북은 북미 적대관계를 십분 활용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졌다. 이를 위해 러시아가 전통적으로 중시했던 핵비확산을 뒷전으로 미루면서 조선의 핵보유를 사실상 인정하고 유엔의 대북 제재도 무력화하는 선택도 마다하지 않는다. 특히 북·러 간에 동맹 관계가 회복되고 반미·반서방을 향해 포괄적이고 전략적인 협력에 나서겠다는 행보가 눈에 띤다.
이로 인해 신냉전을 바라보는 시선도 크게 달라졌다. 2000년대엔 신냉전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소수였다. 미국의 ABM 조약 파기와 MD 추진이 전략적 균형을 흔들고 핵군비경쟁을 촉발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신냉전은 다수의 목소리가 되고 있다. 소수의 우려는 부지불식간에 현실이 되고 말았고, 미중 전략경쟁과 우크라이나를 전장으로 삼은 나토와 러시아의 대결이 첨예해지고 있다. 냉전 시대에도 없었던 한미일의 군사적 결속이 사실상의 동맹으로 치닫고 있고 이에 대응한 북·중·러의 연대도 꿈틀거리고 있다. 나토 강화와 인도-태평양 전략이 연결되어 유라시아 국가들인 북·중·러를 에워싸는 거대한 군사 네트워크가 고개를 들자, 러시아는 “유라시아에서 평등하고 불가분리적인 안보 구조를 건설해 나가겠다”며 맞불을 놓고 있다.
신냉전은 한반도의 냉전 구조가 해소되지 못한 결과의 반영이기도 하다. 1990년을 전후한 미·소 냉전 종식은 미국에 ‘승리의 축배’와 주적을 상실한 ‘허전함’으로 이어졌다. 축배를 든 미국은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처럼 달라졌다. 나토를 확대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동진에 동진을 거듭한 것이다.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서는 ‘북한위협론’에 매달렸다. MD는 그 중심에 있어왔다. 부시 행정부가 ABM 조약에서 탈퇴할 때에도, 오바마 행정부가 ‘아시아 재균형’ 전략을 추구할 때에도, 트럼프 행정부가 대대적인 핵전략 변화에 착수할 때에도, 한미일이 MD를 고리로 삼아 군사적 결속에 박차를 가할 때에도 ‘북한위협론’은 단골 메뉴처럼 소비되어왔다.
기실 조선은 미·소 냉전 종식 이후에도 이어진 ‘구냉전의 피해자’였다. 국제적 고립을 탈피하기 위해 미국과 일본에 내민 손은 번번이 외면당했다. 제국의 지위에 올라선 미국의 관심을 끌어 담판을 짓고자 꺼내든 핵과 미사일 카드는 경제제재 강화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냉전 시대 동맹이었던 중국과 러시아도 대북 제재에 동참했었다. 이 와중에 남북의 국력 격차가 더더욱 벌어지면서 흡수통일을 걱정해야 할 처지에 몰리기도 했었다.
그런데 ‘가난하고 고립된 핵개발국’이었던 조선은 어느덧 ‘가난과 고립에서 탈피하는 핵보유국’이 되고 있다. 핵과 미사일 능력이 미국 본토에 다다를 정도로 고도화되고 있다. 특히 조선은 ‘신냉전의 수혜자’가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냉전 시기에는 중국과 러시아도 조선의 핵무장을 반대했었고 대북 제재에도 동참했었다. 하지만 신냉전의 기운이 확연해지면서 이들 나라는 핵비확산보다는 세력 균형과 국제질서의 다극화를 더 중시한다. 이로 인해 조선의 핵과 미사일 고도화 못지않게 대북 제재의 와해와 중·러의 북핵 용인도 빨라지고 있다. 이미 자력갱생과 자급자족, 그리고 병진노선을 통해 경제발전의 토대를 닦았다고 믿는 김정은 정권의 자신감이 커지고 있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떤가? 한반도 구냉전 시기에 한소·한중 수교에 힘입어 경제적·외교적 지평을 넓힐 수 있었고 한미동맹도 굳건히 다졌었다. 하지만 신냉전은 다르다. 한러 관계는 수교 이래 최악이고, 한중 무역관계도 최대 흑자에서 최대 적자로 바뀌었다. 미국은 한국을 회유·압박해 반도체·전기차·배터리 등 첨단 분야를 흡수하기에 바쁘고, 일본도 이들 분야에서 강력한 경쟁자로 재부상하고 있다. 한때 한국 경제의 ‘블루오션’으로 일컬어졌던 한반도 경제공동체와 북방으로의 진출도 신기루처럼 살아졌다. 한국의 군사력이 세계 5위로 올라서고 한미동맹 및 한미일 군사협력도 역대 최강이라고 하는데 안보 불안감은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 지피지기가 필요하다. 조선이 일어나고 한국이 주저앉고 있더라도 국력의 차이는 여전히 크다. 북러·북중 조약은 아직은 ‘문서상’에 가깝지만, 한미동맹과 한미일 삼각동맹은 미군 주둔과 연합훈련으로 대표는 ‘물리력’을 실체로 한다. 하지만 이를 윤석열 정부처럼 ‘승리주의’의 근거로 삼으면, 한국은 구냉전의 모순과 신냉전의 위험을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다. ‘힘만에 의한 평화’에서 탈피해 우위에 있는 힘의 과시를 자제하면서 평화 공존의 지혜를 찾아야할 때이다.
정욱식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 wooksi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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