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혔기에 반복되는 전쟁의 역사… 지워진 얼굴은 당신이 될 수도 있다

허윤희 기자 2024. 7. 15.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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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미디어 작가 호추니엔 한국 첫 전시
전시장에 재현된 다다미방에 두 개의 스크린이 겹쳐져 있다. 오즈 야스지로의 1949년작 ‘만춘’ 뒤로 요코야마 류이치의 선전만화 영화 ‘잠수함의 후쿠짱’(1944)이 보인다. /아트선재센터

칠흑같이 어두운 전시장에 다다미방 4개가 재현됐다. 일본 아이치현에 있는 전통 료칸(여관) 기라쿠테이(喜樂亭)를 미술관으로 옮겨 왔다. 기라쿠테이는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일본 가미카제 특공대 중 하나인 구사나기 부대가 출격 전 마지막 연회를 벌인 장소. 전시장에 거대한 팬이 돌아가면서 바람과 소음을 동시에 일으킨다.

서울 종로구 아트선재센터에서 싱가포르 미디어 작가 호추니엔(48) 개인전 ‘시간과 클라우드’가 열리고 있다. 20년에 걸쳐 아시아의 근대성을 탐구해 온 작가의 첫 한국 개인전이다. 관람객들은 특히 2층 전시장에 설치된 ‘호텔 아포리아’에 주목한다. 신발을 벗고 다다미방 안으로 들어가면, 2차 세계대전 당시 기록 영화 등 작가가 편집한 흑백 영상을 볼 수 있다. 등장인물의 얼굴은 지워진 채 윤곽만 남았고, 26개 채널 사운드가 동시에 울려 유령처럼 공간을 배회한다.

서울 종로구 아트선재센터에서 한국 첫 개인전을 열고 있는 싱가포르 미디어 작가 호추니엔. /아트선재센터

‘호텔 아포리아’는 2019년 일본 아이치 트리엔날레에서 처음 공개된 작품이다. 당시 일본 큐레이터는 호추니엔에게 전통 료칸 기라쿠테이에서 작품을 전시해 달라고 제안했다. 기라쿠테이가 단순한 료칸이 아니라 2차 세계대전과 관련 있는 장소라는 것을 알게 된 작가는 이곳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다루는 작품을 보여주기로 했다. 호추니엔은 큐레이터, 번역가 등과 공간을 연구하고 토론하면서 작업을 완성했다.

'호텔 아포리아'가 설치 상영 중인 2층 전시장 전경. /아트선재센터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역사 문제를 다루는 이유에 대해 “과거가 우리의 지금, 현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라며 “과거에 해소되지 않은 트라우마, 역사의 유령과 같은 것들을 직면하지 않으면 다양한 형태로 돌아와 우리를 억누르게 된다”고 했다. 거대한 팬에서 나오는 바람은 “보이지도 않고 형체도 없지만 느낄 수 있는 존재”이면서 “과거의 영향이 현재의 투명한 시간 속에 존재하며 언제든지 다시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칠흑같이 어두운 전시장에 일본 다다미방을 재현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 영상을 관람할 수 있다./아트선재센터

다다미방 네 곳 중 한 곳에선 스크린 두 대가 앞뒤로 놓여 영상이 겹쳐져 흘러나온다. 하나는 일본 유명 감독 오즈 야스지로(1903~1963)의 1949년 작 ‘만춘’, 하나는 만화가 요코야마 류이치(1909~2001) 선전만화 영화 ‘잠수함의 후쿠짱’(1944)이다. 작가는 “둘 다 2차 대전 때 선전 영화 제작을 위해 징집됐으나 오즈 야스지로는 당시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고, 전쟁이 끝난 후에 ‘만춘’을 제작했다. 반면 요코야마 류이치는 자신의 유명 캐릭터였던 후쿠짱 캐릭터를 활용해 선전 만화를 제작했다. 둘의 영상을 겹쳐지게 배치해 두 사람이 내렸던 선택을 함께 놓고 바라보게 만든 것”이라고 했다.

“영상 속 지워진 얼굴은 아무도 아니면서, 동시에 모두가 될 수 있다. 어쩌면 우리 자신을 거기에 투사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그 존재들을 과거에서 데리고 와 현재에 있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호추니엔의 신작 '타임피스'_중 '정물화’ 스틸 이미지. /아트선재센터
3층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 비디오 설치 작품 '타임피스' 일부. /아트선재센터

3층에서는 ‘시간’을 주제로 한 영상 설치 신작 ‘시간의 티(T for Time)’와 ‘타임피스’가 상영된다. 지하 아트홀에서는 작가가 2011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싱가포르관에서 선보였던 ‘미지의 구름’과 함께 ‘뉴턴’ ‘굴드’ ‘지구’ 등 영상 세 편이 순차적으로 상영된다. 8월 4일까지. 입장료 19~24세, 65세 이상 7000원, 25~64세 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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