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딩방 피해’ 신고해도… 사기꾼 유유히 돈 빼간다
40대 직장인 A씨는 최근 코인 거래소라고 하는 한 업체에서 ‘당신의 거래소 계정에 가상 자산 72만원 정도가 남아있는데, 이를 7월 6일까지 출금하지 않으면 소각할 예정’이라는 문자를 받았다. 이 업체는 A씨에게 사이트 주소, 아이디, 비밀번호를 발송했고, A씨가 사이트에 접속해 출금을 신청하자 ‘출금 규모가 현재 보유 자산의 3배 이상일 때 출금이 가능하다’고 통보했다. A씨는 계좌에 150만원을 추가 입금한 뒤 다시 수차례 출금을 신청했지만 시스템 오류를 이유로 출금이 거절됐다. 이후 해당 업체와 연락이 끊겼다. 수상하게 생각한 A씨는 입금 계좌를 취급하는 은행에 해당 계좌의 출금 정지 여부를 문의했다. 하지만 “보이스피싱이나 대출 사기 등 법상 전기통신금융사기에 해당하지 않아 계좌 동결이 어렵다”는 답변을 받았다.
코인 출금 사기·주식 리딩방 사기 등 온라인에서 벌어지는 사기 수법이 다양해지면서 사기에 이용된 계좌를 즉시 출금 정지해야 한다는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하지만 은행들은 전기통신금융사기방지법에는 보이스피싱 관련 계좌만 즉시 출금 정지할 수 있다고 돼 있다며 다른 온라인 사기는 은행 결정으로 즉시 출금 정지를 할 수 없다고 하고 있다.
◇법은 보이스피싱만 규제
14일 금융권에 따르면, ‘전기통신금융사기 피해 방지 및 피해금 환급에 관한 특별법(전기통신금융사기방지법)’은 개인 정보를 빼돌리거나 피해자를 속여 금전적 이득을 얻는 보이스피싱에 한해 은행들이 사기 계좌를 즉시 출금 정지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최근 코인 거래소를 빙자한 사기나 ‘가짜 고급 정보’를 내세운 주식 리딩방 사기 등 사기 수법이 다양해지고 있지만 이 같은 온라인 사기 유형은 법상 전기통신금융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전기통신금융사기방지법은 제2조에서 ‘전기통신을 이용해 타인을 기망함으로써 자금 또는 재산상의 이익을 취하거나 제3자가 재산상 이익을 취하게 하는 행위’를 전기통신금융사기로 규정했지만, ‘재화의 공급 또는 용역의 제공 등을 가장한 행위는 제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잔여 가상 자산의 출금’을 내세워 추가 입금을 유도한 사례, 가짜 고급 정보 제공 등 투자 자문 명목으로 돈을 가로챈 사례 등은 ‘재화의 공급 또는 용역의 제공 등을 가장한 행위’에 해당돼 전기통신금융사기에서 제외된다는 것이다. 수년째 기승을 부리고 있는 중고 거래 사기도 마찬가지다.
경찰청에 따르면, 이 같은 온라인 사기 발생 건수는 지난 2017년 9만2000건에서 지난해 16만8000건으로 6년 새 2배 가까이로 늘었다. 연도별로 보면 2019년 13만6000건, 2021년 14만1000건으로 꾸준히 늘고 있다.
금융 당국 관계자는 “보이스피싱 외에 기타 온라인 사기 피해자에 대해서도 신속한 구제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는 점엔 공감한다”면서도 “출금 정지는 민사의 영역이라, 법으로 대상 유형을 확대할 경우 법체계에 혼란이 올 수 있다”고 말했다.
◇경찰 신고하면 된다지만, 실효성은 ‘글쎄’
온라인 사기 계좌에 대한 출금 정지가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지난 1993년부터 금융결제원과 은행권, 경찰이 맺고 있는 ‘은행계좌부정사용범 검거 체제 업무 규약’에는 은행들이 경찰 요청에 따라 사기 계좌를 즉시 지급 정지할 수 있는 근거가 포함됐다.
이 규약에 따라 경찰이 사기 계좌 출금 정지에 관한 공문을 은행으로 발송하면 은행들은 조치에 나설 수 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사기 피해자들이 이 규약에 대해 모르는 경우가 많다”며 “경찰로부터 공문이 접수되면 출금 정지는 하루 만에도 이뤄질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일부 시중은행과 인터넷 은행은 이를 근거로 보이스피싱에 해당되지 않는 사기에 대해서도 계좌 출금 정지 조치를 하고 있다.
다만 은행권에서는 이 같은 조치의 실효성이 그리 높지 않다고 보고 있다. 사기 피해 발생 이후 경찰의 공문이 은행에 접수되는 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통상 사기꾼들은 입금되는 돈을 바로 인출하거나, 다른 계좌로 옮겨놓기 때문에 경찰 공문에 따른 출금 정지는 효과가 크지 않은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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