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배넌·김어준이 불지피는 극단 정치
대선 승리 기대감에 부푼 미 공화당 인사들이 요즘 자주 꺼내는 이야기다. “선거 이후 당 모습을 예측하려면 스티브 배넌을 다시 주목하라.” 한때 트럼프의 오른팔, 책사(策士)로 불렸던 인물이다. 미 주류 언론들은 그를 트럼프 1기 이후 ‘끈 떨어진’ 인물로 여긴다. 그러나 당 지지자들 사이에선 선거가 다가올수록 그의 존재감이 더욱 커지고 있다고 했다. 그 뒤로 그가 진행하는 팟캐스트 ‘워룸(war room)’을 자주 듣고 있다.
“정말 한심합니다.” 최근 방송에서 배넌이 게스트로 나온 공화당 한 의원에게 이렇게 꾸짖었다. 당장 바이든을 탄핵하고 아들은 감옥에 보내야 하는데 왜 손놓고 있느냐는 훈계가 한참 이어졌다. 누가 의원인지 방송 진행자인지 헷갈린다. ‘매운맛’ 진행에도 그의 방송에 출연하려는 공화당 실력자들이 줄을 섰다. 배넌이 이끄는 극성 팬덤의 지지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시청자들로부터 후원금도 두둑하게 챙길 수 있다. 부통령 유력 후보인 JD 밴스 상원의원, 짐 조던 하원 법사위원장 등 수십 명의 유력 정치인이 그의 교시(敎示)를 품고 돌아갔다.
방송엔 백신이 자폐를 유발하고, 지하 조직이 전 세계를 전복하려고 한다는 괴담과 음모론이 수시로 튀어나온다. 작년 브루킹스연구소가 3만 개가 넘는 정치 방송을 전수 조사했다. 그중 ‘가짜 뉴스’를 가장 많이 살포한 방송이 워룸이었다. 그런데 배넌은 조사 결과가 “명예로운 훈장”이라고 했다. 애초에 사실(事實)이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반대 진영의 손가락질을 ‘내 편’의 결집으로 이용하는 법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1·6 의회 난입, 하원의장 축출 사태 모두 배후에서 유도한 인물이 배넌이다. 공격적인 지지자들, 강경파 의원들에게 “당장 행동하라”고 재촉해 이들을 움직였다. 그랬던 배넌이 최근엔 바이든 행정부 인사들에 대한 ‘보복 수사’를 1순위로 언급하고 있다. 대선 결과가 어떻게 되든 ‘혼돈’을 부추기는 그의 발언 수위는 더욱 독해질 것이다. 그 결과가 무엇으로 돌아올지 두렵다.
배넌을 생각하면서 김어준씨가 여러 번 겹쳐 보였다. 최근 한국 정치판에서 벌어지는 민주당의 ‘탄핵 쇼’도 김씨 방송에서 논의되고 결정됐다. ‘검사 탄핵안’ 발의 수개월 전부터 그는 여러 번 “이 사람(검사)들 탄핵해야 한다”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 청문회 추진 계획을 민주당이 공식화한 것도 그의 방송에서였다. 이념의 양 끝에 있지만 증오와 대립을 자양분 삼는 ‘극단 정치’에 기대 먹고 산다는 점에서 둘은 처지가 같았다.
배넌은 이달 초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나는 ‘저널리스트’가 아니다”라고 했다. 이념을 앞세워 극렬 지지층을 움직이는 ‘선동가’임을 숨기지 않았다. 김씨가 하는 일이라고 다를 게 없다. 그런데 김씨는 자신을 ‘언론인’이라고 한다. 사실을 좇고 진실을 따지는 언론인을 자처하면서 근거 없는 풍문, 교묘하게 조작된 허위 사실을 방류한다. 어느 쪽이 더 위험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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