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광암 칼럼]‘원한과 저주’의 여당 전대
‘너 죽고 나 죽자’식 물어뜯기
‘댓글팀’ ‘위험해지는 부분’ 의혹
전당대회 이후 뒷감당 어쩌려고
‘저주는 병아리와 같아서 항상 제 보금자리로 돌아온다.’
‘사람에게 원한을 품으면 무덤이 두 개(하나는 상대방, 하나는 자기 것).’
앞은 영국 시인 로버트 사우디의 장편 서사시에서 유래한 말이고, 뒤는 오래된 일본 속담이다. 사람을 향한 원한과 저주는 그 화(禍)가 상대방은 물론이고 반드시 자신에게도 미친다는 뜻을 공통적으로 담고 있다.
총선 참패로 인한 혼란과 무기력을 수습하고 윤석열 대통령 집권 후반기 당정 관계의 틀을 짜야 할 집권 여당의 전당대회라고는 도저히 생각하기 어려운 ‘집단 자해극’을 보면서 떠오르는 말들이다.
공식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나경원 원희룡 윤상현 한동훈(가나다순) 후보 간의 경선극은 ‘김건희 여사 문자 무시’ 논란에 밀려나 전혀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고 있다. 갈수록 ‘김건희 대 한동훈’의 구도만 선명하게 부각되고 있다.
작년 3·8 전당대회에서도 윤심(尹心) 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반 국민 상대 여론조사에서 5등을 할 정도로 약체였던 김기현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당심 70%, 민심 30%’ 룰을 ‘당심 100%’로 바꿨고, ‘친윤’ 초선 의원들에게 연판장을 돌리게 해 선두 나경원 후보를 주저앉혔으며, 대통령실이 나서 안철수 후보를 ‘저격’하는 등의 반칙과 무리수들이 총동원됐다. 하지만 ‘너 죽고 나 죽자’ 식 ‘살기(殺氣)’가 감지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 전당대회는 양상이 전혀 다르다. 당내 경선이라고 해도 총선 패배를 둘러싼 책임론 공방, 자질이나 도덕성 검증, 네거티브 공세가 어느 정도까지는 오갈 수 있지만, 이번 전당대회는 그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다. 상대방을 망쳐놓을 수만 있다면 내 한 몸 망가져도 괜찮다는 원한과 저주의 기운이 느껴진다.
‘여사 문자’의 최초 유포자가 누구인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다만 직접적이고 일차적인 ‘타격 효과’가 누구를 향했는지를 생각하면 친윤 진영이라고 보는 것이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추론일 것이다. 이를 간접적으로 뒷받침할 만한 정황이나 보도도 적지 않다.
당장 문자가 공개되자마자 한 후보는 “정치적 판단 미숙”, “수십 년간 모셔 왔던 형님이고 형수님이고 넥타이 받고, 반찬 받고 했는데 정치 이전에 인간의 감수성 문제”, “혹시 총선을 고의로 패배로 이끌려고 한 게 아닌지…” 등의 집중 공세를 다른 후보들로부터 받았다. 이번 전당대회 승부가 어떻게 결론 나건 ‘배신자’ ‘정무 감각 미숙’과 같은 프레임이 두고두고 한 후보를 따라다니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해서 김 여사와 친윤 진영이 반사이익만 챙긴 것은 아니다. ‘여사 문자 무시’ 공방 이후 한 후보의 지지율이 되레 올라간 결과는 둘째 치고, ‘당무·국정 개입 논란’이라는 더 무거운 짐을 안게 됐다. “남편이 대통령이 돼도 아내 역할에만 충실하겠다”고 국민 앞에 다짐했던 영부인이 여당의 비상대책위원장에게 내밀하게 보낸 텔레그램 문자를, 누군가 전당대회 한복판에 이슈로 내던지거나 내던져지게 했을 때는 이 정도 후폭풍쯤은 스스로 예상하거나 각오했을 터다. 정치적 공세와 같은 평범한 언어가 아니라 저주, 원한, 악의와 같은 극단의 언어가 아니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여사 문자’의 최초 유포자가 누구인지와는 무관하게, 한 후보가 ‘이판사판식의 악의’를 드러내는 장면도 있었다. TV 토론에서 “제가 이걸 다 공개했었을 경우에 위험해지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라고 말한 것이 대표적이다. 방송 카메라 앞에서 공개적으로 이런 말을 꺼낸 이상, 한 점 의문이 남지 않도록 구체적인 내용을 상세하게 공개하는 것이 상대방에 대해서도 당당하고 공정한 태도다. 살짝 냄새만 피우고 중간에 말을 끊는 것은 오직 상대방에게 ‘의혹의 오물’을 뿌리는 데만 목적이 있었다는 비판을 받아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어디를 봐도 여당 안에서는 이번 진흙탕 싸움의 승자가 보이지 않는다. 쾌재를 부르는 것은 오직 야당뿐이다. 윤 대통령 탄핵 청원 청문회를 밀어붙이면서 역풍을 걱정했던 더불어민주당에서는 “여당 아니면 어쩔 뻔했냐”는 말까지 나온다.
당 대표가 정해지기까지는 아직 1주일 이상 남았지만 여당은 벌써부터 전당대회 이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김건희 댓글팀’이나 ‘한동훈 여론조성팀’은 양측의 공방 과정에서 심각한 국민적 의혹으로 떠오른 상황이어서 진실을 규명하지 않고 그냥 묻어두기는 힘들 것이다. 한 후보가 말한 “위험해지는 부분”도 마찬가지다.
제 보금자리로 돌아가는 ‘저주 병아리들’의 발걸음이 더없이 총총해 보인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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