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려원 "'졸업'은 제 인생작" [인터뷰]
안판석 감독과 운명적 작업
10세 연하 위하준과의 로맨스 호흡은?
"우리 작품은 행간을 읽는 사람들의 고백." 배우 정려원이 '졸업'을 인생작으로 꼽았다. 그토록 염원하던 안판석 감독과의 작업은 정려원에게 기대 이상의 여운을 남겼다.
최근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한 카페에서 정려원은 본지와 만나 tvN '졸업' 관련 이야기를 나눴다. '졸업'은 대치동 학원가의 설레고도 달콤한 미드나잇 로맨스를 그린 작품으로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봄밤' 등을 연출한 안판석 감독의 5년 만 신작이다. 극중 정려원은 스타 강사 서혜진으로 분했다.
아직까지 서혜진과 '졸업'을 떠나보내지 못했다는 정려원은 "주말을 허전한 마음으로 보내고 있다. 톡방에서 항상 방송 후기를 이야기하곤 했는데 잠잠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아쉽더라. 헛헛한 주말을 보내고 있다"라고 돌아봤다. 특히 정려원은 이번 작품으로 화제성 1위 부문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뤘다. 정려원은 "제가 뭣도 모르고 1위를 했다. 다음에도 하고 싶었다. 1위를 하니까 욕심이 났다. 마지막까지 지키진 못했지만 너무 좋았다"라고 뿌듯함을 드러냈다.
앞선 제작발표회부터 인터뷰까지 정려원은 안판석 감독에 대한 각별한 팬심을 드러냈다. 정려원은 지난해 초 함께 하고 싶은 감독들의 이름을 일기에 적어두었는데 2개월 후 '졸업' 대본이 그에게 들어온 것이다. 이를 두고 운명이라고 생각했다는 정려원은 "내가 간절히 바라고 준비가 돼 있다면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라고 돌아봤다. 하지만 대본의 첫 인상은 쉽지 않았다. 멜로 장르라는 설명에도 오피스 드라마로 느껴질 만큼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직접적으로 조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4부까지 읽고 나서야 멜로의 공식이 아닌 '안판석 감독' 만의 멜로라는 것을 깨달았단다. 말, 템포, 리듬 모두 멜로의 일환이었고 그렇게 '졸업'에 매료됐다.
주변 연기자 동료들로부터 안판석 감독에 대한 호평을 많이 들으면서 정려원은 안판석 감독과의 호흡을 고대했다. 안판석 감독 특유의 세밀한 감정을 담기보단 여운과 공백을 남기는 장면들이 정려원의 기대감을 더욱 고조시켰다. 이번 작품으로 직접 만난 안 감독은 어땠냐는 질문에 "저는 질문을 많이 하고 감독님은 우문현답을 하신다. 제 질문의 답은 하지 않고 배우의 자세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하신다. 문화를 가까이하고 배우는 것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고. 제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지만 방송이 끝나고 나서야 이해가 됐다. 감독님이 제게 해주신 말씀을 이제 다 이해한다. 다시 작품 하자고 했다"라고 말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안 감독은 다른 멜로나 로맨스 장르의 드라마들과 달리 인물의 행동에 더욱 포커싱하면서 시청자들에게 상상할 여지를 만든다. 서혜진과 이준호(위하준)이 사귀기로 약속한 후 엘레베이터에서 만나는 장면에서 배우의 표정보다 뒷모습을 앵글에 담으면서 '틈'을 열어놓는 것이 대표적인 예시다. 정려원은 인터뷰 내내 '귀한 현장'이었다면서 만족감을 내비쳤다. 그는 "모든 합이 잘 맞아서 돌아가는 것이 쉽지 않은데도 이 작품은 그랬다. 저희도 너무 감사했다. 복에 겨워서 다음 현장이 힘들면 어떡하지 싶을 정도"라고 회상했다.
지난 2003년 '똑바로 살아라'로 연기를 시작한 정려원은 '내 이름은 김산순' '김씨표류기' '마녀의 법정' '기름진 멜로' '검사내전' 등 여러 작품으로 배우의 길을 걷고 있다. 과거 치열했던 드라마 현장과 지금의 현장을 비교하던 정려원은 "일하기 좋아졌다. 배우들, 스태프들에게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 이상을 해낼 수 있다. 피곤함에 쪄들어서 연기할 수밖에 없었던 현장이 있었다. 더 나은 현장에서 일하게 됐다. 우리 현장에서는 누구 하나 게으른 사람이 없었다. 많은 이들이 오케스트라 연주 같았다"라고 묘사했다.
정려원은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초등학생 때 호주로 이민을 갔고 거기서 자랐다. 그렇기 때문에 극중 역할이 영어 강사가 아닌 국어 강사라는 점이 배우 본인에게도 의아했던 지점이었다. 한국에서 학창시절을 보내지 못했기 때문에 국어 교육 자체가 생소했고 더욱 연구에 집중해야 했다. 정려원은 실제 학원 강의를 들으면서 한국 사교육에 스며들었고 인물의 완성도를 높였다.
유독 지적인 이미지의 캐릭터를 많이 맡은 이유를 묻자 "말을 화려하게 하는 사람들을 보면 동경하게 된다. 그런 연기를 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안하무인 캐릭터 연기를 할 땐 처음에는 엄청 헤맸는데도 쾌감이 있었다. 그래서 전문직 여성을 연기하는 것을 좋아했다"라고 설명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간 전문직 여성 역할을 소화했던 것이 이번 작품에서 큰 도움이 됐다. 강사 캐릭터 특성상 대사가 많았는데 전작들에서 다량의 대사를 소화했던 이력이 톡톡히 발휘된 것이다. 그는 외우는 노하우를 두고선 "음악 대신 대사를 녹음한 것을 듣기도 했다"라고 덧붙였다.
또 이번 작품에서 정려원은 10세 연하의 위하준과 사제 로맨스를 펼쳤다. 위하준의 캐스팅 소식에 걱정부터 했다는 정려원은 "실제로 보니까 그 친구도 그렇게 어려보이지 않았다. 감사했다. 그래도 위하준이 해서 다행이다. 제 생각에는 연하여도 어른스러운 매력이 있어야 한다"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이어 "위하준이 멜로를 안 해봤다는 것에서 놀랐다. '최악의 악'을 봤다. 임세미와 연기하는데 눈이 너무 좋다. 남자와 여자 앞에서 눈이 다르다. 왜 이전까지 멜로를 안 했냐고 했다. 그러면서 친해졌다"라고 우애를 전했다.
익숙한 장소에서 익숙하지 않는 분위기를 선사하는 '졸업'. 유독 마니아층이 많았던 이유다. 익숙한 장소에서 감정의 변화를 보여줘야 했고 불 꺼진 학원 풍경 속 빨간 난로 앞에 나란히 앉은 두 남녀가 꽤 낭만적인 아우라를 자아냈다. 정려원은 "방송을 보니 안 감독님은 '역시는 역시'였다"라고 다시 감탄했다.
이처럼 정려원에게 많은 여운을 남긴 '졸업'은 연기자로서도 큰 기점이 됐단다. "불확실함으로부터 '졸업'하게 됐어요.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지막 촬영날 보통은 후회가 항상 있었지만 눈녹듯 사라지더라고. '충분하다, 최선을 다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호기롭게 인생작이라고 하는 이유죠."
우다빈 기자 ekqls064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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