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시설수용 피해자’ 주목한 유엔…정부는 형식적 답변
생존자 구제·시설 규제 등 질의에
“법·원칙대로” “현장 조사로 충분”
“배고프지 않냐?” 1971년, 아홉 살이었던 손석주씨(62)는 부산역에서 신문을 팔다가 누군가가 건넨 밥과 음료를 먹고 잠이 들었다. 눈을 뜬 곳은 집단수용 시설로 향하는 트럭 안. 이후 그는 아무리 시설에서 도망을 쳐도 “행색이 남루하다”는 이유만으로 줄곧 시설로 보내졌다. 아침마다 죽어 있는 옆 친구를 보는 게 일쑤였고, 친구들은 쓰레기장 옆에 아무렇게나 묻혔다고 했다. 몇몇은 시설 운영진의 학대와 성폭행으로 스무 살이 넘어서도 기저귀를 착용해야 했다.
손씨는 부산의 ‘영화숙·재생원’에 강제 수용됐던 피해자다. 영화숙·재생원은 1960년대 부산시가 부랑아·노숙인에 대한 정화작업을 하면서 위탁계약을 맺은 집단수용 시설이었다. 당시 부산의 유일한 공식 부랑아 시설로, 이후 형제복지원의 모델이 된 곳이기도 하다.
지난 10~11일(현지시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 고문방지위원회의 ‘제6차 한국 국가보고서 심의’에 앞서 손씨는 지난 8일 영화숙·재생원 피해생존자모임 대표로서 직접 현지로 갔다. 그는 심의가 열리기 전 위원회의 한국 담당 국가보고관들을 만났다.
위원회는 고문 등 비인도적인 대우나 처벌을 방지하기 위한 협약인 ‘유엔 고문방지협약’이 원활하게 이행되는지 점검·평가하는 기구다. 1995년 고문방지협약에 가입한 한국은 위원회에 4년마다 관련 분야의 정책 성과를 국가보고서 형태로 유엔에 제출해오고 있다. 올해는 2017년 3·4·5차 심의에 이어 7년 만에 심의가 진행됐다.
손씨는 보고관들에게 “시설에 있었다는 차별 때문에 가족·이웃·사회에 돌아가도 갈 곳이 없었다”며 “지금도 피해 생존자들이 동료 피해자들을 스스로 찾아내고, 직접 시설을 찾아다니며 서류를 찾아 피해를 증명해야 하고, 손해배상을 받으려면 직접 소송해야 한다. 이런 피해가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경인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 공동대표도 각종 학대가 일어나는 장애인 시설 문제에 대해 설명했다.
이후 열린 심의에서는 한국의 시설수용 피해자들에 대한 구제가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국제인권조약기구 심의에서 국내 시설수용 문제가 조명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 수용시설 최소 면적, 국제 기준 절반도 안 돼
위원회의 피터 베델 케싱 위원은 “생존자들 상당수가 아동기부터 수년간 구금됐고, 아주 극심한 가혹행위를 당했다”며 “당사국(한국)은 과거사 시설수용 생존자들에게 필요한 재활과 구제를 받을 수 있게 하고 있나”라고 질문했다. 한국 정부 측은 “법과 원칙에 따라 죄에 상응하는 처벌이 이뤄지도록 하겠다”는 형식적인 답변을 내놨다. 이어 진실화해위원회에서 2022년 내린 형제복지원 관련 결정문을 낭독하는 정도로 답을 갈음했다.
위원회가 시설에서 발생하는 고문과 학대를 어떻게 모니터링하는지를 묻자 한국 정부 측은 “시설 감독은 국가인권위원회의 현장 조사로 충분하다”는 취지로 답했다. 인권위에 진정이 제기되면 시설에서 자료를 제출하고 인권위가 현장 조사를 나간다며 “수용자 인권보장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위원회는 한국 수용시설에 과밀 문제가 심각하다는 우려도 제기했다. 법무부의 ‘법무시설 기준규칙’에 따르면 현재 국내 수용시설의 1인당 최소 수용면적은 2.58㎡로, 국제기준(1인당 5.4㎡)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등 26개 인권시민단체가 모인 ‘제6차 유엔 고문방지협약 심의 대응을 위한 한국시민사회모임’은 “정부가 협약 위반을 자인하거나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를 들며 변명했다””고 비판했다. 손씨도 “정부가 시설강제수용 생존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나 배·보상에 대해 아무 관심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김나연 기자 nyc@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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