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극단주의의 유령
7월 초 영국과 프랑스의 총선에서 각각 노동당과 좌파 연합이 승리함으로써 유럽 정치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영국에선 노동당이 63.4%의 의석을 차지해 집권했고, 프랑스에선 좌파 연합인 신인민전선이 32.6%의 의석을 차지해 제1당으로 올라섰다. 하지만 득표율과 정당 구도를 보면 승리자는 따로 있다.
영국에서 극우 정당인 영국개혁당이 처음 의회에 진출하면서 14.3%의 득표율을 얻어 자유민주당을 제치고 득표율상 제3당으로 약진했다. 노동당 압승에 가려진 암울한 그림자로 평가된다. 프랑스에서도 극우 정당인 국민연합이 의석률로는 제3당에 머물렀지만 득표율에서는 29.3%를 얻어 제1당이 되었다. 게다가 이것은 양대 진영과 달리 국민연합이 단독으로 참가해 얻은 득표율이다. 프랑스의 극단주의는 암울한 그림자 정도가 아니라 코앞에 닥친 위협이 되었다.
영국개혁당과 국민연합이 위험한 것은 이들이 극단주의를 표방할 뿐 아니라 부정적 포퓰리즘과 결합했기 때문이다. 극단주의(extremism)는 급진주의(radicalism)와 다르다. 급진주의가 민주주의 질서 내에서 급속한 변화를 추구한다면, 극단주의는 민주주의 질서를 파괴하면서까지 과격한 변화를 추구한다. 포퓰리즘도 엘리트주의를 반대하며 인민 주권을 실현하려는 본래의 성격을 벗어나 대중추수주의로 전락하면, 선거 승리만을 위해 대중을 혐오 정치로 선동하는 이른바 ‘표퓰리즘’으로 변질된다.
이번 영국과 프랑스의 총선은 극우 포퓰리즘이 사라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실상 더 큰 종양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준 선거였다. 역설적이게도 극우 포퓰리즘의 집권과 주요 원내 세력화를 막은 것은 의석률의 득표율 반영을 왜곡한 다수 대표제 효과였다. 그러나 이러한 추세가 계속된다면 선거 제도의 방지 효과도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왜곡을 통해 유지되는 제도와 정치는 그 자체로도 타파 대상이므로 극우 포퓰리즘의 빌미가 될 뿐이다.
극우 포퓰리즘의 공통적 특징은 적대적 양극화와 혐오 정치를 조장하고 동원함으로써 각인의 자유와 평등에 기반한 민주 질서를 파괴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노동력이 상품으로 교환되는 질서이며, 그 교환의 장소가 노동 시장이다. 그리고 노동 시장의 갈등은 종종 집단 간 갈등으로 나타나며, 특히 세계화 시기엔 인종과 국적에 따른 갈등으로 현상한다. 극우 포퓰리스트는 이 갈등을 인종주의적 혐오 정치로 동원한다. 외국인 노동자는 투표권이 없으므로 ‘적’으로 설정하기 가장 쉬운 집단이기 때문이다. 외국인 노동자를 적으로 규정해 자국민 이익을 옹호하면서 표를 얻으려는 것이다. 이것이 더욱 극단화되면 나치즘에서 나타났듯 대량학살로도 치달을 수 있다.
먼 나라 얘기가 아니다. 국민의힘 당대표 선거에서 나경원 후보가 외국인 노동자에 대해 최저임금 구분 적용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외국인 노동자를 최저시급 이하로 지급할 수 있도록 차별화한다는 것이다. 이 구분 적용은 2030년 인구 절벽 시대의 노동력 부족 현상을 해결하고 저임금의 외국인 가사도우미나 간병인을 통해 저출생·고령화 문제에도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현 정부의 저임금 외국인 가사도우미 합법화 정책을 노동시장 전체로 확대하겠다는 얘기다. 한국의 인구 문제와 노동력 문제를 외국인의 노동력 덤핑과 인종 차별을 통해 해결하려는 것이다. 극우 세력의 인종주의적 발상과 맥을 같이한다.
백번 양보해 우리나라 최저임금이 월등히 높아 그 미만으로도 문화적 생활이 가능하다면 이러한 주장도 가능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최저임금은 선진국 중에서 턱없이 낮을 뿐 아니라 내년도 인상폭도 물가 상승률을 반영하지 못해 논란이 일고 있는 상황이다. 나 후보의 주장이 더욱 우려를 자아낼 수밖에 없다. 자유 시장 경제의 민주주의 질서에서도 인종이나 종교 등 노동 시장 외적 요인에 따른 차별은 금지된다. 명백히 자유 민주주의 질서를 위협하는 극단주의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더 심각한 문제는 영국과 프랑스에서 보았듯이 이러한 주장이 대중에게 호소력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국민의힘 지지자에게 호소력이 더 크기 때문에 국민의힘 당대표 선거에서 이러한 주장이 제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종주의는 진보와 보수의 문제나 좌파와 우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민주주의 질서를 지키려는 합리주의와 이를 파괴하려는 극단주의의 문제다. 극단주의는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가 모두 경계해야 할 민주주의의 적이다. 혐오가 대중의 지지를 얻을 때 극단주의의 유령이 육체를 획득하게 된다. 그때 민주주의는 이미 우리 곁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정병기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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