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권의 손길]격노하는 대통령, 분개한 국민
정의의 집행자인 정치지도자의
약자를 위한 분노는 지지 대상
자주 격노하는 윤석열 대통령
채 상병의 죽음에는 분개했나?
‘격노’(激怒), ‘몹시 분하고 노여운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라는 뜻이다. ‘격노’가 2024년 올해를 지배한 단어라도 될 기세다. 이 격분의 감정이 대한민국 대통령의 정서적인 상태를 상징하는 표현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난 4월에 열린 국민의힘 총선 패배에 관한 토론에서도 ‘뻑하면 대통령이 격노한다’는 말이 나왔다.
대통령의 격노는 다양한 수준에서 드러난다. 국민의힘에 한동훈 비대위가 들어설 당시 김기현 전 대표가 사퇴를 거부하자 대통령이 격노했다는 보도, 한동훈 비대위가 들어선 이후엔 김건희 여사에 대한 특검을 총선 이후 조건부로 검토한다는 말이 나오자 이에 대해 격노했다는 보도, 심지어 방미 기간 중 블랙핑크 공연이 무산되자 대통령이 격노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몹시 화가 나는 감정은 그 자체로 나쁘진 않다. 오히려 인간 본성에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다. 특히 부당한 모욕과 무시를 당하면서 화를 내지 못한다면 그것이 더 문제다. 더하여 타인의 심히 무례하고, 비열하며, 야만적인 언사와 행동에 대한 분노는 타당한 도덕 감정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때로 정의의 수호자로서, 정의의 공정한 집행자로서 정치지도자의 분노는 유용성이 있다. 특히 힘이 없는 약자를 위해 최고 정치지도자가 가끔 내는 분노는 평범한 사람들이 열렬히 지지하는 대상일 수 있다. 이처럼 타인에게 가해진 부당한 행동을 보고 분노하는 일을 도덕 감정에서는 ‘분개’(indignation)라고 한다.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정치지도자들의 ‘정당한 분개’는 아름답고 찬탄할 일이라 말한다. 그 정당함은 중립적 방관자가 공감할 수 있을 만큼 절제되고 조절된 말과 태도에서 나온다. 분기탱천하거나 시끄럽게 아우성치는 분노의 격정은 오히려 혐오감과 불쾌감을 불러일으킨다.
이처럼 타자를 위한 ‘분개’의 감정마저 절제되어야 하는 이유는 정치지도자의 격정, 특히 최고지도자의 분노는 명확히 억압적 권력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마다 화를 낼 수 있다는 건 명백히 타자와의 권력관계에서 우위에 있다는 의미다.
부당한 일을 당한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은 대체로 그 일을 인내하고 감내해야 한다. 절제된 분노의 발산조차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억압의 강도를 더 세게 만들 수 있다. 반면 권력이 더 많은 이들일수록 (블랙핑크 공연 무산과 같은) 별달리 부당하지 않은 일에도 몹시 화를 낼 수 있다.
스미스는 이처럼 분노를 마음껏 표출하는 일을 두고 ‘허영심의 발로’라고 말한다. “허영심에 찬 연약한 사람들은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 혹은 자신에게 감히 반대하지 못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흔히 격앙된 감정을 과시하여 드러내 보이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기백을 보이는 것으로 상상한다.”
스미스가 이런 허영심에 찬 사람들을 연약하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이들이 ‘자기제어’를 제대로 못하기 때문이다. 분노의 제어가 언제나 위대하고 고상한 역량인 이유는, 분노에서 벗어나야 곤경 속에서도 신중하고, 교묘한 불의가 만드는 이익의 유혹에 저항할 수 있고, 적절한 자혜의 덕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스미스는 인자함, 호의, 꾸밈없는 애정, 우의, 존경은 한 사회에 속한 사람들을 결속시킨다고, 이런 경향이 과하다고 비난받을 수는 있어도 결코 이에 대해 분노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반면, 노기, 증오, 질투, 악의, 복수심 같은 감정들은 유대를 깨뜨리는 경향이 있으며, 이런 감정이 과다하면 공포의 대상 혹은 증오의 대상이 된다.
현재 채 상병 특검법을 둘러싼 논란의 중심에도 대통령의 ‘격노’가 있다. 최고권력자의 분노는 주변인을 때로 두려움으로 몰아넣는다. 두려움에 싸인 주변인은 부당한 명령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상황에 부닥치게 된다.
이의 제기가 없는 곳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 편견에 찬, 잘못된 의사결정이다. 채 상병 사건의 경우 대통령의 격노가 부당한 수사 개입으로 이어졌다는 보도가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여당 의원들이 내놓는 변명이 ‘대통령은 격노하면 안 되냐?’는 것이다.
서글픈 점은 이렇게 자주 격노하는 대통령이 채 상병의 죽음을 두고 분개했다는 보도를 본 적은 없다는 데 있다. 대통령이 분개하지 않으니 국민이 힘을 모아 대신 분개하고 있다. 그 분개가 이제 특검법을 거부하는 대통령을 향할지도 모를 일이다.
김만권 정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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