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산책]안개비나 이슬비보다 굵은 가랑비

기자 2024. 7. 14.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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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그것이 거듭되면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크게 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표현이다.

어린아이를 제외하고 누구나 그 의미를 알 법한 말이다. 그러나 국어사전의 의미만 놓고 보면 이 표현은 조금 이상하다. 가랑비는 가늘게 내리기는 하지만 빗줄기가 제법 굵기 때문이다. 비를 맞는 순간 대번에 ‘옷이 젖겠다’는 걱정이 들 정도다. <표준국어대사전>도 가랑비가 이슬비보다 굵다고 뜻풀이를 해놓았다. 이슬비는 빗줄기가 가늘어서 안개처럼 부옇게 보이는 비다. 이런 이슬비보다 더 가는 것이 안개비이고, 안개비보다는 조금 굵고 이슬비보다는 가는 ‘는개’도 있다. 또 보슬비는 빗줄기가 가늘면서 성기게 내린다. 줄줄 내리지 않고 뚝뚝 끊기듯이 오는 비다. 따라서 아주 적은 양의 비라서 언제 옷이 젖는 줄 모른다는 의미를 제대로 나타내려면 가랑비보다는 이슬비, 는개, 안개비, 보슬비 등을 쓰는 게 더 어울린다.

그렇다면 우리 조상들은 왜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했을까. 옛날에는 가랑비가 안개비를 뜻했기 때문이다. 15세기 문헌에 가랑비의 옛 표기가 나오는데, 문맥으로 보면 그 말은 안개비를 뜻한다. 그러던 것이 언젠가부터 의미가 비뀌어 지금은 안개비나 이슬비보다 굵은 비를 뜻하는 말이 됐다. 하지만 속담은 표기 준칙이 바뀌더라도 그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오는 대로 쓰는 것이 원칙이므로 옛날의 가랑비를 지금의 안개비로 고쳐 쓸 필요는 없다.

안개비와 달리 빗줄기가 아주 굵은 비는 장대비다. 나무를 다듬어 만든 긴 막대기처럼 쏟아지는 비다. 요즘 자주 내리는 소나기는 굵기보다 ‘갑자기’와 ‘심하게’에 초점이 맞춰진 이름이다. 소나기의 옛 표기는 ‘쇠나기’이고, 이때의 쇠는 “몹시” “심하게” 등을 뜻한다. “채소 줄기나 잎이 뻣뻣하고 억세게 되다”나 “한도를 지나쳐 좋지 않은 쪽으로 점점 더 심해지다” 따위의 뜻으로 쓰이는 동사 ‘쇠다’와 그 의미가 통한다. 한편 소나기를 된소리로 적은 ‘쏘나기’는 비표준어다.

엄민용 <당신은 우리말을 모른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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