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현의 끼니] 가마보코에 매료된 조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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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조선이 독립되면 일본말뿐만 아니라 옷이든 음식이든 일본 것은 모조리 못쓰게 된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럴 리가 있을라고?" 하면 "아니 정말이여. 신문에까지 났다는데, 저 가마보코(어묵)는 일본 음식이 아니겠지? 조선 사람들도 잘만 먹으닝께" 하면, "그렇지 않을 것이여! 아니, 우리는 가마보코가 없으면 밥을 먹는 같잖는듸. 한 숟가락을 떠먹더라도 가마보코를 쪼끔 입에 넣어봐야 입이 깨끔하고 먹은 것 같지. 그게 그럴 리가 없을 것이랑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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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조선이 독립되면 일본말뿐만 아니라 옷이든 음식이든 일본 것은 모조리 못쓰게 된다는 소문이 있었다.
“아니, 앞으로는 일본 음식을 못 먹게 한다는데 그게 정말인지 알아봤으면 쓰겠어.” 오 여사는 아는 사람을 보면 다짜고짜로 이런 것을 물었다.
“그럴 리가 있을라고?” 하면 “아니 정말이여. 신문에까지 났다는데, 저 가마보코(어묵)는 일본 음식이 아니겠지? 조선 사람들도 잘만 먹으닝께” 하면, “그렇지 않을 것이여! 아니, 우리는 가마보코가 없으면 밥을 먹는 같잖는듸. 한 숟가락을 떠먹더라도 가마보코를 쪼끔 입에 넣어봐야 입이 깨끔하고 먹은 것 같지. 그게 그럴 리가 없을 것이랑께….”
김동리의 장편소설 ‘해방’의 한 대목이다. 조국이 식민지로 전락한 것이 백성의 의지가 아니었듯 광복 또한 백성의 의지와 상관없이 느닷없이 찾아왔다. 꿈에도 그리던 광복이지만 식민지 백성은 이미 익숙해진 생활방식이 갑작스레 바뀌는 걸 두려워했다. 가마보코의 맛에 익숙해진 ‘오 여사’는 갑자기 찾아온 광복으로 가마보코를 더 이상 먹지 못하게 될까봐 걱정이다. 그리고 이 걱정 어린 대화 속에서 식민지 백성이 가마보코를 왜 그토록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는지에 대한 단서가 드러난다. 지금의 어묵처럼 가마보코는 밥 반찬으로 더할 나위 없었기 때문이다. 가마보코는 이미 조선인의 밥상에 빠져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 있었다.
가마보코처럼 생선 살을 갈아서 가공한 어육가공품은 조선인에게도 낯선 음식이 아니었다. 생선 완자를 빚어 국물에 넣어서 끓인 완자탕은 이미 조선시대부터 굉장히 익숙한 음식이었다. 가마보코는 한자로는 부들 ‘포’자에 칼끝 ‘모’자를 쓴다. 이는 저수지 하천 연못 등 물가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부들의 꽃이삭이다. 생선 살을 갈아 대나무 꼬챙이에 뭉쳐서 구우니 영락없이 부들의 꽃이삭을 닮아서 붙은 명칭이다.
밥을 주식으로 하는 일본과 한국은 외래음식을 수용할 때 묘한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것이 밥과 어울리는지, 혹은 밥 반찬이 되는지를 우선 살핀다. 그리고 밥과 어울리면 기꺼이,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밥이 주식인 나라에서 밥과 어울리는 것은 무조건 옳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식민지의 것이 건, 수탈자의 것이 건 상관하지 않았다. 조선의 명란젓을 일본이 기꺼이 받아들였듯, 조선 역시 일본의 가마보코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밥과 어울리는데, 이제는 그게 있어야 밥을 먹은 것 같다는데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가마보코는 그렇게 한국인의 생활 속에 자리 잡았다.
대중은 외래음식을 선택적으로 수용한다. 일단 선택된 음식에 대해서는 국적과 이념을 따지지 않는다. 소설 속 ‘오 여사’의 걱정과 달리 조선이 독립된 후에도 가마보코는 사라지지 않았다. 일본인은 떠나도 공장은 남았기 때문이다. 전국에 있던 가마보코 공장 대부분이 일본인 소유였지만 생산 인력은 조선인이었다. 적산으로 분류된 공장과 설비는 고스란히 조선인의 소유가 되었고 조선인 기능공들에 의해 가마보코는 전과 다름없이, 아니 오히려 전보다 더 활발하게 생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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