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바다 [서울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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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바다를 떠올리면, 커다란 아이스박스를 맨 젊은 아빠의 뒷모습이 생각난다.
여름 방학마다 우리 가족은 아빠를 따라 부산 송정 해수욕장에 갔다.
아빠는 항상 송정 바다가 부산에서 가장 깨끗하고 시원한 바다라고 말했다.
직장을 따라 경기도로 거처를 옮긴 동생은 여름에 부산을 찾을 때면 그토록 우리가 폄하했던 광안리 바다에서 수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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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운 | 부산 엠비시 피디
여름 바다를 떠올리면, 커다란 아이스박스를 맨 젊은 아빠의 뒷모습이 생각난다. 여름 방학마다 우리 가족은 아빠를 따라 부산 송정 해수욕장에 갔다. 해수욕장 근처에 아빠의 회사에서 운영하는 하계 휴양소가 있었다. 휴양소 내부로 들어서면, 분명 작년 여름에도 만났을 테지만 도통 얼굴이 익숙해지지 않는 아빠의 동료가 손을 흔들며 우리를 반겼다. 수줍음 많은 어린이였던 나는 나처럼 아빠의 등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는 또래 아이들과 어색한 인사를 나누곤 했다.
아빠는 항상 송정 바다가 부산에서 가장 깨끗하고 시원한 바다라고 말했다. 뭘 모르는 타지 사람들만 해운대로 가는 거라고. 아빠의 말은 정말 맞는 말 같았다. 시원한 송정 바다 위를 헤엄치다 보면, 여기가 부산에서 가장 좋은, 아니 한국에서 가장 으뜸인 바다인 게 틀림없어 보였다. 저 멀리 모래사장은 반짝이고, 몸에 닿는 바닷물은 시원하고 청량했다. 겁이 많아 물을 무서워하면서도, 거대한 튜브에 기대어 유영하는 시간 동안은 바다가 좋았다.
한낮의 해수욕을 마치고 해가 질 무렵이면, 휴양소 근처에서 음식 냄새가 스멀스멀 나기 시작했다. 여기선 수박을 썰고, 저기선 고기를 구웠다. 어른들이 바삐 움직일 동안, 해수욕을 하느라 지친 우리는 젖은 머리를 하고 뭔가를 계속 받아먹었다. 이해할 수 없는 농담을 나누며 어른들은 웃었고, 낮보다 친해진 애들과는 어느덧 유치한 장난을 주고받았다.
바닷가의 여름밤엔 왠지 모르게 들뜨는 분위기가 녹아 있었다. 장판이 깔린 평상에 배를 깔고 누워서, 몹시 배도 부르고 노곤한 채로 남은 방학이 얼마나 되는지를 셈하다 보면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부모님의 손을 잡고 송정 바다로 향하던 시절은 짧았다. 중학교에 입학한 뒤로는 어쩐지 가족끼리 해수욕을 하러 가는 게 시시해 보였으니까. 그다음부터는 바닷물에 발 한 번 담그지 않고 지나가는 여름이 대부분이었다. 우연히 버스를 타고 해수욕장 근처를 지나갈 때면, 학교나 구청을 지나치듯이 바다를 지나쳤다. 바다는 이 도시에서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래도 여름철엔 북적이는 인파 때문에라도 고개를 들어 바다를 보게 됐다. 쨍한 여름 햇살 아래 반짝이는 바다는 다른 계절의 바다와는 사뭇 달라 보였다.
도시에도 제철이라는 게 있다면, 부산의 제철은 여름일 것 같았다. 어쩌면 해운대나 광안리로 몰려드는 인파들은 모두 이곳의 제철을 맞이하기 위해 온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짜 제철 바다는 송정에 있는데.’ 아빠가 했던 말을 닮은 혼잣말을 속으로 삼키곤 했다. 여름 방학이면 어린이 둘을 데리고 해수욕을 하던 아빠는 지난달을 마지막으로 정년퇴직을 했다. 송정 바다가 한국에서 가장 좋은 바다인 줄 알았던 나는, 어른이 되고 나서 송정 바다만큼 아름다운 바다를 꽤 많이 발견했다. 직장을 따라 경기도로 거처를 옮긴 동생은 여름에 부산을 찾을 때면 그토록 우리가 폄하했던 광안리 바다에서 수영을 한다.
긴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나의 여름 바다는 정확히 언제였는지 기억나지도 않는 그해 여름에 있다. 찌는 더위 속에서도 전해지던 바닷물의 시원함, 파도 소리와 뒤섞인 우리들의 웃음소리, 바닷바람을 타고 번지던 모기향 냄새와 노곤하게 밀려들던 졸음 같은 것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거무죽죽한 하늘이 계속돼 몸과 마음이 가라앉는 요즘엔,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제철 바다의 풍경을 자주 꺼내어 본다.
기나긴 장마가 끝나면 오랜만에 송정으로 가자고 다짐한다. 자두, 복숭아, 옥수수와 수박 같은 제철 음식을 부지런히 챙겨 먹는 요즘, 내가 사는 도시의 제철은 그곳에 있으니까. 바지를 걷어붙이고, 차가운 바닷물에 발을 담그면 비로소 여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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