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히글라스 재판이 보여주는 것들 [세상읽기]

한겨레 2024. 7. 14.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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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헌호 금속노조 구미지부 아사히글라스지회 지회장이 지난 11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근로자지위 확인 소송에서 승소 판결을 받은 뒤 조합원들로부터 헹가래를 받고 있다. 연합뉴스

류영재 | 의정부지방법원 남양주지원 판사

노동관계법을 살펴보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투쟁이다. 법조문 하나하나 절로 만들어진 것이 없다. 회사관계법과 비교하면 그 느낌이 더 강렬해지는데, 주로 회사라는 법인격을 놓고 회사의 지배구조, 운영, 소유관계(주식)를 규정하는 내용에 비해 노동관계법은 주로 근로조건의 확보를 둘러싼 내용들을 규정하고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건조한 법조문들이건만, 읽다 보면 구체적인 현장에서 노동자들이 어떤 요구를 하게 됐는지, 왜 그런 요구들이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 상상하게 된다. 결국 상상하는 것은 노동자들의 삶 그 자체다. 한편으론 이러한 요구들이 관철됐을 경우 사업을 경영하는 입장에서 어떠한 부담을 안게 되는지도 보이기 때문에 결국 노동관계법은 투쟁의 결과다.

노동관계법의 전반적 특징이 이러하다면, 파견법(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은 위와 전혀 다른 특징을 갖는다. 파견법은 그 전에 허용되지 않던 ‘파견근로자’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법이다. 도급(사내하청)을 주는 것 외에는 직접고용을 피하기 어려웠던 기존 법체계에서는 노동시장이 지나치게 경직되므로 이를 완화하도록 간접고용을 일정 부분 허용하되, 파견 기간을 최장 2년으로 제한하고 2년을 초과할 경우 직접고용하게 하여 노동안정성을 보완하자는 내용이기에 고용유연성을 요청하던 사용자들의 입장이 수용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입법 당시 전례 없는 대규모 총파업이 일어났을 정도로 노동자들의 반발을 샀지만, 아이엠에프(IMF)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일반적 고용 형태로 자리잡았다.

최근 대법원에서 확정된 에이지씨화인테크노한국 주식회사(아사히글라스의 자회사, 이하 아사히글라스)의 하청업체에서 근무하던 노동자들의 근로에 관한 소송도 파견법과 관련이 있다. 아사히글라스는 디스플레이용 글라스 기판을 제조하는 공정 중 일부 공정에 대해 사내도급을 주었고, 그 사내도급은 2009년부터 2015년까지 계속되다가 아사히글라스그룹의 다른 자회사들의 사업 축소와 그 자회사 소속 노동자들의 고용 이전을 이유로 해지됐다. 하청업체는 아사히글라스와의 도급계약이 해지되자 소속 노동자들 전원을 퇴직시키거나 해고한 뒤 폐업했다. 결국 아사히글라스에서 일하던 하청업체 소속 노동자들은 도급계약 해지와 함께 일자리를 잃은 것이다. 해고된 노동자들은 아사히글라스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면서, 자신들은 파견근로자이니 아사히글라스는 직접고용 의무를 이행하라고 요청했다. 애초에 아사히글라스가 사내도급을 준 글라스 기판 제조 공정은 파견법상 파견이 금지된 영역이었다. 아사히글라스로서는 위 공정 중 일부를 도급 주거나 공정 과정 전부를 직접 수행했어야 하는데, 사법은 아사히글라스가 인력공급업체와 도급계약을 체결하여 외관상 사내하청의 형태를 갖춘 뒤 노동자들을 제공받았음을 인정한 것이다. 이번 판결로 인해 아사히글라스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일터로 복귀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소송 제기 당시부터 판결 확정까지 걸린 기간만 9년이다. 자신의 고용 형태의 실질을 인정받고 파견법에 따른 고용안정을 보장받기 위해 9년간 생계가 불안정한 상태로 재판을 받아야 했던 개별 노동자들의 삶이 어땠을지 상상하면 아득하다.

아사히글라스가 오랜 갈등을 겪고 복귀한 노동자들에게 부당한 차별 없는 노동환경을 안정적으로 제공할 것인지도 미지수다. 파견법 제정 당시에는 직접제조라인을 제외한 일정 영역에서의 간접고용을 법적으로 인정해 노동안정성을 저하시키고 고용의 이중 구조를 정착시킨다는 우려가 팽배했는데, 이제는 파견법이 보장한 노동안정성(2년 초과 직접고용 의무, 일정 영역 파견 금지)마저도 지난한 사법적 판단을 거치지 않으면 보장받지 못하는 단계에 이른 셈이다.

무엇보다도 이런 일이 다른 사업장에서도 빈번하게 발생한다는 점이 문제다. 이번 아사히글라스 판결에서 새로운 법리가 세워진 것은 하나도 없다. 기존 법리에 따라도 도급과 파견의 구분이 쉽지 않거나 파견법이 오히려 문제를 새롭게 만들어낸다는 의미일 수 있다. 결국 문제의 본질은 사용자들의 노동시장 경직성 완화 요청과 노동자들의 노동안정성 보장 요청의 대립이다. 노동안정성 보장의 다른 말은 인간다운 삶의 보장임을 염두에 두면서 대립 구조를 바꾸어 해법을 찾지 못한다면, 소모적인 재판은 계속될 것이다. 재판 기간 무너지는 것은 노동자의 삶 자체임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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