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산호초’보다 눈에 띈 것 [한겨레 프리즘]
이정국 | 문화팀장
“내 사랑은 남쪽 바람을 타고 달릴 거예요/ 푸른 바람을 가르고 달려줘요/ 그 섬으로”
지난 몇주간 대중문화계는 ‘푸른 산호초’로 파랗게 물들었다. 일본의 국민 아이돌 가수 마쓰다 세이코가 1980년 7월에 발표한 노래로, 한국의 걸그룹 뉴진스의 멤버 하니가 최근 일본 도쿄돔 팬미팅에서 불러 화제가 됐다.
최대 5만8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도쿄돔 공연은 일본에서도 웬만한 인기 가수가 아니면 엄두를 내지 못한다. 더군다나 일본인 멤버가 없는 한국 그룹이 평일 이틀 동안 공연을 매진시킨 것은 이례적이다. 이곳을 가득 메운 관객 앞에서 베트남계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케이팝 그룹 멤버가 일본어 노래를 부르는 것 자체가 사건이었다. 케이팝으로 구현된 코즈모폴리턴이라고 해야 할까. 도쿄돔은 흥분한 관중의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팝아트 거장 무라카미 다카시가 공연장에서 흥에 못 이겨 허공에 주먹을 내지르는 영상이 에스엔에스(SNS)에 퍼지기도 했다.
현장의 열기를 느끼고 싶어 ‘직캠’ 영상을 찾아보던 중 노래 못지않게 인상 깊은 장면을 발견할 수 있었다. 팬과 가깝게 만나기 위해 관중석으로 내려온 멤버들 동선 옆으로 펜스를 붙잡고 앉아 있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군중이 몰려 펜스가 넘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안전요원이었다. 팔을 뻗으면 닿을 수 있을 정도로 촘촘하게 배치해 ‘이렇게까지?’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자칫 이태원 참사 같은 대형 인명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철저하게 위험을 사전 차단하는 모습이었다. 안전강국 일본다웠다.
물론 한국도 공연장의 안전의무는 공연법 등 법령으로 강제한다. 인파가 몰리는 대형 공연일수록 규제가 더욱 세다. 체육관 같은 대규모 시설 등에서 관객이 1천명 이상 예상되는 공연을 열 경우 공연 비용의 1.15% 이상을, 관객이 3천명 이상인 경우 1.21% 이상을 안전관리비로 사용해야 한다. 10억원 예산의 공연은 최소 1150만원 이상을 안전관리 비용으로 써야 한다는 얘기다. 이 비용에는 안전요원 등의 급여도 포함된다. 이뿐만 아니라 안전관리조직 운영, 관계자 안전교육도 의무화했다. 공연업계는 부담이라는 입장이지만 만일의 사고를 대비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처이기 때문에 이를 거부할 명분은 없다.
하지만 법이 늘 그렇듯,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는 것이 문제다. 대표적인 예가 최근 난립이라는 비판을 받는 ‘시상식’이다. 시상식은 현행 공연법에서 정의하는 ‘공연’이 아니기 때문에 규제가 쉽지 않다. 여기에 시상식이 스포츠·연예를 다루는 일부 언론사의 수익 사업이 되면서 점점 규모도 커지고, 국외 개최가 눈에 띄게 늘고 있다. 국외 개최는 비싼 가격에 티켓을 팔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국내의 안전 관련 규제도 피할 수 있다. 지난 4일 한국음악콘텐츠협회가 무분별한 시상식 개선을 위해 발표한 ‘케이팝 시상식 가이드라인’을 보면 한해 동안 15개 이상의 케이팝 시상식이 열리는데, 이 가운데 절반 정도만 국내에서 진행된다.
가이드라인은 최근 열린 케이팝 시상식에서 발생한 팬들 간 몸싸움, 관중의 객석 분뇨, 아티스트 추락 사고를 거론하며 “행사 준비 단계에서부터 안전 관리 부족으로 인해 발생한 사고로 케이팝 산업 전체의 이미지가 훼손되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어 “시상식마다 안전관리 기준이 각각이라 안전사고 위험이 높다”고 경고하면서 “정부에서 케이팝 시상식 안전관리 기준을 권고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제는 정부가 응답할 차례다. 케이팝의 세계적 인기를 ‘국위 선양’ 수단으로만 활용할 게 아니라 케이팝 종주국으로서 품격 있고 안전한 시상식이 운영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이번에 나온 가이드라인에서 여러 문제점을 지적했지만 그 가운데 정부가 실효성 있게 개입할 수 있는 분야가 바로 ‘안전’이다. 사실상 수익성 공연임에도 시상식으로 위장하는 ‘꼼수 시상식’부터 서둘러 규제에 나서야 한다.
jg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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