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 겪은 왜적 ‘조선수군 공포증’…인간 이순신은 후유증
- 승전했지만 막내아들 면 잃어
- 당시 몸과 마음 고통스러움 담겨
- 작전상 서해 안편도로 옮겼다가
- 고하도 다시 와 수군 재건 박차
*정유년 9월 4일부터 10월 8일까지는 일기가 두 개로 중복되는바, 뒤에 적은 일기를 앞의 것과 대조해 보기 편하도록 지면 기사에서는 밑줄을 그어 표시하고, 인터넷 홈페이지에서는 첫머리에 # 표시를 별도로 한다.
9월19일[10월29일] 맑음.
일찍 출발하여 칠산도(七山島)를 건너는데, 바람은 약하고 하늘은 맑아서 배를 몰기에 매우 좋았다. 법성포 선창에 이르니, 적들은 벌써 침범하여 간혹 인가에 불을 지르기도 했었다. 해 질 무렵 홍룡곶(영광군 홍농읍의 바닷가)으로 돌아가 바다 가운데서 잤다.
#날이 맑았다. 일찍이 떠나서 바람이 곱고 물결이 순하기 때문에 순조롭게 칠산(七山) 바다를 건넜다. 저녁나절 법성포(法聖浦)에 이른즉 흉악한 적이 육지로 해서 들어와서 인가의 곳곳에 불을 질렀다. 해 질 무렵에 홍농(弘農) 앞에다가 배를 대고 잤다.
9월20일[10월30일]
맑고 바람도 순조로왔다. 배를 몰아 고참도(古參島, 부안 위도)에 가니 피란민들이 무수히 배를 정박하고 있었다. 이광보도 와서 만나고 이지화 부자도 왔다.
#날이 맑았다. 새벽에 배를 띄워 바로 위도(猬島)에 이르니 피란 배가 많이 닿고 있었다. 황득중(黃得中)과 종 금이(金伊)를 보내서 종 윤금을 찾아보라 하였더니 과연 위도 밖에 있었기에 결박을 지워 배 가운데 실었다. 이광축, 광보가 보러 오고 이지화의 부자도 왔다. 날이 저물었기에 머물러 잤다.
9월21일[10월31일] 맑음.
새벽에 출발하여 고군산도(古群山島)에 가니 호남 순찰사는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서 배를 타고 옥구(沃溝)로 갔다고 하였다.
#날이 맑았다. 일찍이 떠나서 고군산도(古群山島)에 이르렀다. 전라도 순찰사는 내가 왔다는 말을 듣더니 배를 타고 급히 옥구(沃溝)로 갔다고 한다. 늦게 광풍이 크게 불었다.
9월22일[11월1일] 맑음.
#날이 맑으나 북풍이 크게 불었다. 그대로 거기에 머물렀다. 나주목사 배응경(裵應褧)과 무장 원 이람(李覽)이 보러 왔다.
9월23일[11월2일] 맑음.
#날이 맑았다. 승전에 대한 장계 초안을 잡았다. 정희열이 보러 왔다.
9월24일[11월3일] 맑음.
#날이 맑았다. 몸이 불편해 신음하였다. 김홍원이 보러 왔다.
9월25일[11월4일] 맑음.
#날이 맑았다. 이날 밤 몸이 몹시 좋지 못했다. 식은땀이 전신을 적셨다.
9월26일[11월5일] 맑음.
이날 밤에는 식은땀이 온몸을 적셨다.
#날이 맑았다. 몸이 좋지 않아서 종일 나가지 않았다.
9월27일[11월6일] 맑음.
송한(宋漢)이 승첩장계를 가지고 배를 타고 올라갔다. 정제(鄭霽)도 충청수사(권준)에게 전령(傳令)을 가지고 갔다. 몸이 매우 불편해서 밤새도록 고통스러웠다.
#날이 맑았다. 송한(宋漢), 김국(金國), 배세춘(裵世春) 등이 승전에 대한 장계를 가지고 뱃길로 올라갔다. 정제(鄭霽)도 부찰사(副察使)에게 보내는 공문을 가지고 충청수사 처소로 떠났다.
9월28일[11월7일] 맑음.
송한과 정제가 바람에 막혀 되돌아왔다.
#날이 맑았다. 송한(宋漢)과 정제(鄭霽)가 바람에 막히어 돌아왔다.
9월29일[11월8일] 맑음
송한 등이 바람이 순해지자 다시 떠나갔다.
#날이 맑았다. 장계와 정판관(정제)이 다시 떠나갔다.
▶정유년(1597년) 10월
인간 이순신에게 다가온 명량대첩의 후유증은 컸다. 미래를 맡길 만하다고 여겨 온 막내아들 면을 잃은 것이다. 이 일을 기록하는 그의 일기는 피로 쓰여진 듯하다. 서해를 통해 내려와 우수영 쪽 안편도로 진을 옮겨간다. 거기서 사태를 수습한 뒤 다시 고하도로 옮겨 수군 재건에 박차를 가한다. 해로가 뚫려 당황한 명은 그제서야 황급히 수군을 편성해 진린으로 하여금 조선의 바다로 가게 한다.
10월1일[11월9일] 맑음.
#날이 맑았다. 아들 회(薈)를 보내서 저의 모친도 보고 각 집안 여러 사람의 생사도 알아 오게 하였다. 심회가 극히 산란하여 편지를 쓸 수가 없었다. 병조(兵曹)의 역자(驛子)가 서류를 가지고 와서 아산에 있는 집이 적에게 분탕질을 당해 잿더미가 되어 남은 것이 없다고 전하였다.
10월2일[11월10일] 맑음.
아들 회가 가정 식구들의 생사를 알아볼 일로 올라갔다. 홀로 배 위에 앉았으니 온갖 생각이 다 떠올랐다.
#날이 맑았다. 아들 회가 배를 타고 올라갔는데 잘 갔는지 모르겠다. 심회를 어찌 다 말하랴.
10월3일[11월11일] 맑음.
새벽에 배를 출발하여 도로 변산(邊山)을 거쳐 곧장 법성포로 내려가니, 바람이 매우 부드럽고 따뜻하기가 봄날과 같았다. 저물어서 법성창(法聖倉) 앞으로 갔다.
#날이 맑았다. 새벽에 배를 띄워서 법성포(法聖浦)로 돌아왔다.
10월4일[11월12일] 맑음.
#날이 맑았다. 그대로 머물렀다. 임선, 임박이 포로 되었다가 적에게 빌고 임치로 돌아와서 편지를 보냈다.
10월5일[11월13일] 맑음.
#날이 맑았다. 그대로 머물면서 마을 집으로 내려가서 잤다.
10월6일[11월14일]
흐리다가 간혹 눈비가 내리기도 했다.
#날이 흐리고 간간이 눈과 비가 내렸다.
10월7일[11월15일]
구름이 걷히지 않고 비가 오다 개다 했다.
#바람이 순치 못 하고 날도 혹 개였다 혹 비오다 하였다. 전라도에는 어디나 적의 자취가 없다는 것을 들었다.
10월8일[11월16일] 맑음.
바람이 순해지는 것 같았다. 새벽에…
(이하 글자 빠졌음)
#날이 맑고 바람도 순하였다. 배를 띄워서 어외도(於外島)로 와서 잤다.
10월9일[11월17일] 맑음.
일찍이 떠나서 우수영(右水營)에 이른즉 성 안팎에 인가라고는 하나도 없고 또 사람의 자취도 없어 보기에 참혹하였다. 저녁에 들으니 해남에는 흉악한 적이 아직도 진을 치고 있다고 한다. 날이 막 어두워지려고 할 때 김종려(金宗麗), 정조(鄭詔), 백진남(白振南) 등이 보러 왔다.
10월10일[11월18일]
새벽 2시경 비가 뿌리고 북풍이 크게 불어서 배를 띄우지 못하고 그대로 머물렀다. 밤 10시께 중군장 김응함이 와서 보고하기를 “해남에 있는 적들이 곧 퇴각하려는 것 같다”고 하였다. 이희급(李希伋)의 부친이 적에게 포로 되었다가 빌고서 풀려나왔다고 한다. 몸이 불편해서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밤을 새웠다. 우우후 이정충(李廷忠)이 배로 왔으나 바깥섬으로 도망가 있었기 때문에 만나지 않았다.
10월11일[11월19일] 맑음.
새벽 2시경에는 바람도 자는 것 같았다. 첫 나팔에 닻을 올려서 바다 가운데로 나왔다. 정찰병 이순(李順), 박담동(朴淡同), 박수환(朴守還), 태귀생(太貴生) 등을 해남으로 보냈다. 해남에는 연기가 하늘을 덮었다 하니 필시 적의 무리가 달아나면서 불을 지른 것이리라. 낮에 발음(發音) 안편도(安便島, 신안군의 안좌도로 추정)에 이르렀는데 바람도 좋고 날도 화창하였다. 배를 내려서 제일 높은 산봉우리 위에 올라가서 배를 감추어 둘 만한 곳을 살펴보았다.
동쪽으로는 앞에 섬이 있어서 멀리 바라보이지 않으나 북쪽으로는 나주(羅州)와 영암(靈岩)의 월출산(月出山)까지 터졌고 서쪽으로는 비금도(飛禽島)까지 통하여 안계(眼界)가 광활하였다. 조금 있자니까 중군장과 우치적이 올라오고 조효남(趙孝南), 안위(安衛), 우수(禹壽)가 계속해서 왔다. 날이 저문 후 산에서 내려와 언덕에 앉았으니 조계종(趙繼宗)이 와서 왜적의 정세를 보고하고 또 “왜적들이 우리 수군을 몹시 겁낸다”고 말하였다. 이희급의 부친이 와서 포로가 된 경과를 이야기하였다. 마음이 매우 아팠다.
저녁 날씨가 따듯하기 마치 봄과 같다. 아지랑이가 하늘에서 아른거리고 비가 오려는 조짐도 보였다. 초저녁에 달빛은 흰 비단폭 같은데 혼자 봉창에 앉았으니 생각이 천갈래만갈래였다. 밤이 들자 식은땀이 온몸을 적셨다. 자정께에는 비가 내렸다. 이날 우수사(김억추)가 군량선(軍糧船)에 있는 사람을 붙들어다가 무릎을 몹시 때렸다고 한다. 해괴하다.
10월12일[11월20일]
비가 죽죽 내리다가 오후 2시쯤 말끔히 개었다. 우수사가 와서 절하고 군량선 사람의 무릎을 때린 죄를 사과하였다. 가리포, 장흥 등의 여러 장수가 와서 절하고 종일 이야기하였다. 정찰선이 나흘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아서 우려가 되지마는 생각컨데 흉악한 적이 멀리 도망을 쳐서 그 뒤를 쫓아간 것이리라. 그대로 발음도(發音島)에서 머물렀다.
※ ㈔부산여해재단·국제신문 공동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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