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찾아서

이유진 기자 2024. 7. 14.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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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한국 여성문학 선집’ 출간… 김 소사·이 소사의 1898년 ‘여학교설시통문’을 여성 글쓰기 시초로

“지금까지 한국 문학사에서 여성문학가의 작품은 주변화되거나 문학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다. 100년 동안 여성이 가진 글쓰기 전통, 지식생산 실천의 전통은 계보화하지 못했다. 이제 여성문학의 독자적인 선집이 새롭게 쓰일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여성문학사연구모임)

마침내 근현대를 아우른 한국 여성문학 선집이 최초로 선보였다. <한국 여성문학 선집>(전 7권, 여성문학사연구모임 엮음, 민음사 펴냄, 이하 <선집>)은 근현대 100년간 여성 작가들이 쓴 소설, 시뿐만 아니라 희곡, 선언문, 수기, 일기 등 다양한 문학적 성취를 포괄했다. “왜 우리에게는 <다락방의 미친 여자> 같은 전복적인 여성문학사, <노턴 여성문학 앤솔러지> 같은 여성문학 선집이 없는가?”라는 오랜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2024년 7월9일 서울 종로구 노무현시민센터에서 연 <선집>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엮은이들은 ‘순(수)문학’에 포함되지 못하고 ‘비주류’에 머물러 인정받지 못했던 여성문학에 대한 안타까움과 성과를 벅찬 목소리로 증언했다. 책은 <선집> 발간을 위해 2012년 연구모임이 만들어진 뒤 12년 만에 나왔다. 김양선(한림대 일송자유교양대학), 김은하(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이선옥(숙명여대 기초교양대학), 이명호(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1990년대 한국여성연구소에서 페미니즘 문학을 함께 공부한 인연이 있다. 이희원 서울과학기술대 명예교수는 한국영미문학페미니즘학회와 협업해 작업에 참여했다. 이경수 중앙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도 객원에디터로 참여해 시인 발굴과 작품 선정에 힘을 보탰다.

‘여학교설시통문’이 게재된 <황성신문>.

저자들은 1898년 ‘여학교설시통문’을 한국 근대 여성 글쓰기의 시초로 보고 “페미니스트 집합 의식을 발표한 최초의 글”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름조차 없는 ‘김 소사’ ‘이 소사’가 <황성신문> <독립신문>에 기고한 이 선언문은 여성 교육과 시민권을 처음으로 강조했다. 그간 문학사에서 나혜석의 단편소설 ‘경희’가 <여자계>에 발표된 1918년을 한국 근대 여성문학의 시작으로 본 것보다 20년 앞선다. 김양선 교수는 “‘여학교설시통문’과 ‘애국가’(부인회 애국가)가 1898년 동시에 나왔다. 여성이 공론장인 신문에 자기 목소리, 자기 언어로 글을 쓴다는 것이 상당히 중요했다”고 말했다. 여성 인권을 주장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여성의 권리옹호>(1792)가 영미 문화권에서 근대 최초 페미니즘 저작으로 꼽히는 점을 예로 들었다.

<한국 여성문학 선집>의 주역인 여성문학사연구모임. 왼쪽부터 김양선, 이경수, 이희원, 이명호, 이선옥, 김은하 교수. 민음사 제공

<선집>은 여성 주체의 저항과 발화를 중요하게 여겼다. 2권의 첫 장을 연 1925년은 박화성(1903~1988)이 ‘추석전야’를 발표한 해다. 김은하 교수는 “노동 수탈과 성적 수탈을 교차시켜 계급의식을 지닌 여직공의 성장을 그려낸 문제적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일제강점기 노동소설의 대표작인 강경애의 <인간문제>(1934) 또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젠더적으로 전유한 탁월한 사례로 꼽혔다.

김자림(1926~1994)은 당대 여성 문제를 무대에 올린 한국 최초의 본격 여성 희곡 작가로 제자리를 찾았다. 엄인희(1955~2001)의 희곡은 가부장제의 폐습과 여성들의 연대를 그렸다. 1980년대 버스 안내원으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여성노동자의 노동소외와 감정노동을 시로 쓴 최명자(1957~ ), 1978년 ‘동일방직 노조 똥물 투척 사건’을 재현한 정명자(1958~ ) 시인, 월남작가 이정호(1930~2016)와 박순녀(1928~ )도 이번에 새롭게 조명된 작가들이다. 김은하 교수는 “이정호, 박순녀를 문학사 안에 넣는 것이 굉장히 중요했다. 이정호는 전쟁을 남성적 카니발리즘과 여성의 교환과 희생으로 그린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또 ‘1960년대 최인훈뿐 아니라 박순녀도 있었다’고 할 정도로 작품성과 젠더 통치를 비판하는 박순녀의 시각은 높이 살 만하다”고 말했다.

왼쪽부터 고정희(1948~1991), 허수경(1964~2018), 한강(1970~ ) 작가. <한겨레> 자료사진, 한강 작가 공식 누리집

이경수 교수는 “1980년대 박노해, 백무산 등 노동시인의 전통에서 여성노동자 시인들이 묻혀 있었다. 최명자, 정명자 시인이 묘사한 여성노동자의 현실은 기존 문학사 선집에서 다뤄지지 않았다. 시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이 사그라들었지만 고정희, 허수경 등 여성시인에 대한 반응은 뜨겁다. 이번 작업이 학구적인 관심 영역이 넓어지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총 3256쪽 분량 가운데 1980년대를 다룬 제6권은 756쪽, 1990년대를 다룬 7권은 712쪽에 이른다. 공지영·신경숙·최윤·김인숙·은희경·전경린·한강·배수아·하성란 등의 소설과 엄인희의 희곡, 천양희·허수경·나희덕·최승자·김언희 등의 시가 등장한 1990년대에 대해 이 시기를 책임 편집한 이명호 교수는 “1990년대 한국 여성문학은 더 이상 주변이 아니고, (문학의) 중심부로 진입했다”고 말했다.

“한국 문학사 100년의 끝 무렵 더 이상 마이너리티(비주류)가 아닌, 문학적 성취를 이룬 엄청난 분량의 여성문학이 등장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글을 써서 먹고살 수 있게 된 여성작가의 등장이 장미전쟁이나 100년전쟁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글 쓰는 여성 주체는 제도적 글뿐만 아니라 편지, 회고록, 일기 등으로 자기 서사를 남겼다. 문학성이 미달되는 것으로 여겼던 이런 장르를 문학사 안에 편입시키는 시도는 자기 글쓰기가 폭발하는 지금 시대에도 큰 변화의 계기로 작용할 것이다. 앞으로도 여성의 자기 서사가 다양한 형식으로 발화하리라 기대한다.”

독자로서 가장 큰 즐거움은 김일엽(1896~1971), 나혜석(1896~1948), 전혜린(1934~1965)의 작품처럼 찾아보기 힘든 ‘원작’을 전문가들의 검토를 거친 ‘정본’으로 만나볼 수 있게 된 점이다. 문학평론가로도 활약 중인 박혜진 민음사 한국문학팀장은 “작가와 출판사의 작품 재수록 허가를 받는 지난한 과정과 막대한 제작비를 무릅써야 하는 결정이라 쉽지 않았다. 하지만 <82년생 김지영>이 세계적으로 200만 부 이상 팔려 나가는 등 여성문학 독자의 응원에 힘입어 책이 나올 수 있었다. 알라딘에서 2주 동안 295세트, 2800만원 정도 펀딩이 될 정도로 폭발적인 반응이 있었다”고 말했다. 세트 10만4천원.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21이 찜한 새 책 

유럽 책방 문화 탐구

한미화 지음, 혜화1117 펴냄, 2만3천원

“아름다운 책방이 아름다운 도시를 만든다.” 출판계 입문 30여 년. 내로라하는 출판평론가 한미화가 독창적이고 고전적인 유럽 책방 문화를 소개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독립서점, 노점상, 대학도시 책방 풍경까지. 유럽의 지식 창고인 서점이라는 공간의 감수성, 아름다운 도시의 일부가 된 독자의 응원과 출판계의 고군분투를 두루 살폈다.

나다운 집 찾기

전명희 지음, 파이퍼프레스 펴냄, 1만9천원

‘집에 대한 거주자의 감각’을 최우선으로 하는 온라인 기반 공인중개사사무소 ‘별집’의 전명희 대표가 독특한 주택과 빌라, 오래된 아파트를 소개한다. 투자 가치보다 공간의 매력을 소개하며 분위기, 특색을 전달하는 것이 별집의 핵심. “삶의 모양에 따라 집을 고르는 기준이 달라져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면 그와 함께 ‘임장’에 나서자.

학교를 바꾼 인권 선언

공현, 진냥(이희진) 지음, 교육공동체벗 펴냄, 1만4천원

학생인권조례가 만들어진 배경, 역사, 그리고 교육과 사회에 미친 영향을 검토했다. 경기, 광주, 서울, 전북, 충남, 제주까지 6개 지역에서 시행 중인 학생인권조례는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 과정에 탄생하고 무르익었다. 학생인권조례가 학생과 교사를 맞서게 하며 교사의 권리를 소홀히 여기거나 위협한다고 보는 시각 등 쟁점을 함께 다뤘다.

못해 그리고 안 할 거야

리디아 데이비스 지음, 이주혜 옮김, 에트르 펴냄, 2만1천원

<불안의 변이>로 국내에 소개된 리디아 데이비스의 이야기 모음집. 시인지 에세이인지 소설인지 모호하고 단편적인 부분으로 이뤄진 그의 까다로운 글쓰기는 독자에게 매혹과 미스터리를 선사한다. 책에 실린 122개의 글은 짧게는 한 줄에서 길게는 수십 쪽에 이른다. 이주혜 소설가의 번역으로 섬세하게 재창조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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