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창우의 인향만리] 국어를 대하는 태도

파이낸셜뉴스 2024. 7. 14.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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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만 쓰기는 불가능
외국어를 무조건 막거나
쉽게 받아들여서는 안돼
서울대 인문대학장 독어독문학과 교수
최근 학내 연구소를 신설하는 안을 심의한 적이 있다. 연구소 명칭에 많은 사람에게 생소할 수 있는 영어 단어가 포함되어 있어서 곤혹스러웠다. 이전에는 대학 내의 기구나 교과목 명칭에 우리말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일상 언어에서 사용하는 영어 표현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추세를 감안하면 이 암묵적인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러울 수 있어서 최근에는 영어 표현도 허용하는 분위기다. AI 시대에 신설되는 다양한 교육·연구 기구와 교과목 명칭에 우리말 표현만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도 하기 때문이다.

20여년 전 독일에 있는 한 언어정화운동 단체의 임원을 맡아줄 것을 요청받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국어순화운동이 활발했던 시절에 학창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 취지에 동의하는 부분이 있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언어학자인 독일 친구와 상의했는데, 그 친구는 펄쩍 뛰면서 만류했다. 언어정화운동은 민족주의나 국수주의적인 성향을 띠기 쉽기 때문에 지난 세기 두 차례에 걸쳐 큰 전쟁을 일으킨 바 있는 독일에서는 이 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좋게만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독일어에 대한 언어정화운동의 역사는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랫동안 라틴어의 위세에 눌렸던 독일어가 17세기 후반부터는 프랑스어에도 밀리게 되자 독일어를 지키려는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 운동은 나치 정권이 민족주의를 부추겨서 세계를 상대로 하는 전쟁의 동력으로 악용하면서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부정적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우리말과 우리글도 순탄치만은 않은 역사를 갖고 있다. 세종께서 창제하신 우리글은 20세기에 들어설 때까지 한자의 위세에 눌렸고, 일제강점기에는 우리말이 수난을 당했다. 이 시기에 많은 분들이 갖은 탄압 속에서도 우리말을 지키려고 노력한 것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서 독립을 기약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해방 이후 우리말에 남아있는 일제강점기의 흔적을 지우고 밀려오는 영어의 영향으로부터 우리말을 지키려고 노력한 것이 국어순화운동이다.

결국 한 언어에 유입되는 외국어 표현에 대한 통제는 그 정도에 따라 언어 정체성을 지킨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도 있지만 언어민족주의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또 외국어 표현의 차용은 새로운 어휘에 대한 수요에 신속하게 대응함으로써 언어 사용의 편의성을 높인다는 측면과 언어의 정체성을 훼손하고 소통의 문제를 유발할 수 있다는 측면이 있다. 오래전 어느 백화점에서 'staff only'라는 문구가 붙어있는 문을 보며, 그 뜻을 알지 못해서 열고 들어가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걱정했던 기억이 있다. 우리 사회에는 영어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은 그 문구의 뜻을 알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영어공용어화 논쟁이 크게 일어났던 것이 1990년대 후반이었는데, 그사이 영어가 공용어처럼 사용되는 분야나 지역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언어를 의사소통의 도구로만 본다면 많은 국가에서 사용하는 외국어로 모국어를 대체하지 못할 것도 없지만, 언어가 민족과 국가 정체성의 핵심이라고 본다면 이것은 전혀 다른 문제가 된다.

인류가 사용했던 수많은 언어 가운데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 대부분이고, 지금 지구상에서 사용되는 7000개 남짓 되는 언어 가운데 절반 이상이 21세기 중에 사라질 것이며, 심한 경우에는 100년 이내에 90% 이상이 사라질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언어의 생로병사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국가와 민족의 운명과 궤를 같이한다는 것은 인류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으니, 우리가 국어를 대하는 태도는 신중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언어도 자연 생태계처럼 지나치게 간섭해서도, 그냥 방치해서도 안 된다. 편의성을 위해 외국어 표현을 쉽게 받아들여도, 정체성을 지키겠다고 막기만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일이 그렇듯이 양극단 사이에서 균형 잡힌 태도를 갖는 것은 참 어렵다.

서울대 인문대학장 독어독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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