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화 칼럼] 트럼프 피격, 극단정치에 `샤론의 장미`를

이규화 2024. 7. 14. 18:4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규화 편집국장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단 몇 센티미터 총알이 빗나가 구사일생한 것도 극적이지만, 충분히 예상됐던 일이라는 '사건의 예측성 또는 평범성'도 충격적이다.

지금 정치 테러는 지구촌적이다. 지난 1월 이재명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부산에서 칼에 찔리는 피습을 당했다. 앞서 2006년 당시 야당 대표였던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서울 신촌에서 지원유세 도중 커터 칼로 얼굴 부위를 기습당한 일은 생각만 해도 몸을 움찔하게 한다. 2022년 7월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유세도중 사제 총에 피살된 것은 정치인이 얼마나 위험에 쉽게 노출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로베르트 피초 슬로바키아 총리가 지난 5월 총탄에 맞는 등 최근 유럽에서도 정치인에 대한 여러 공격 사건이 발생했다.

정치적 폭력의 역사는 정치와 궤를 함께한다. 동서고금의 차이가 없다. 왕조시대엔 더 피 튀기는 암살에 보복이 잇따랐다. 공화정 로마에서 시이저가 정치적 동료이자 적들에게 척살된 것이나, 메디치가를 둘러싼 정치적 테러는 다중의 복리를 위해 정치적 술수가 용인될 수 있다고 주장한 마키아벨리조차 몸서리치게 했다.

그러나 이런 폭력들은 민주주의가 부재했던 시대의 산물이다. 민주주의가 어느 때보다도 성숙됐다고 하는 현대에 일어나는 정치적 폭력은 우리를 아연케 한다. 민주주의의 횃불로 추앙받는 미국에서 의사당 폭거에 이어 암살시도가 일어난 것은 심각성을 더한다. 물론 미국은 국민 수보다도 더 많이 살포된 총기로 인해 언제든 총격이 일어날 수 있는 환경도 작용했을 것이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하버드대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 교수는 그 원인을 의외로 가까운 데서 찾았다. 정치세력 간 상호 관용의 규범과 권력행사에서의 절제의 규범을 잃었다는 데에 주목했다. 현재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 지지자, 또는 트럼프 지지자와 반대자들 사이에서 보이는 극단적 대립상이 정치권의 극렬한 갈등과 불타협, 적대화에서 기인한 측면이 크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헌정사에 요즘처럼 여야 지지자 간 간극이 벌어진 적이 있었던가. 공론의 장을 넓힌다는 디지털 플랫폼 환경이 오히려 특정 여론형성의 장으로 섬처럼 존재하고, 거기에 매몰된 대중은 기존의 제도와 가치를 무시하고 자신의 생각, 자기 진영의 주장만으로 무장한다. 연결돼 있는 듯하지만 결국은 특정 주장만 주입돼 고립된 개인은 극단적 행위를 하게 된다.

지도자들의 책임이 크다. 지금의 미국은 옛 미국이 아니다. 50년대 중반부터 70년대초까지 '링컨컨티넨탈을 갖고 교외의 소담하지만 예쁜 집에서 사는 것을 꿈꿨던 미국 중산층'은 사라지고 없다. 중산층이 엷어지고 사라지면 사회가 불안해지고 대중이 분노하는 건 정한 이치다. 미 연준(Fed)에 따르면 미국 상위 1% 부자가 미국 전체 부의 30%를 점하고 있다. 점유율은 갈수록 확대 중이다.

지금 미국은 굶어죽는 사람만 없지, 1930년대 대공항 이후 중산층이 무너지고 서민이 굶어죽었던 상황과 빼닮았다. 1930년대 시대상을 '분도의 포도'(The Grapes of Wrath)에 담은 존 스타인벡은 사회의 계층적 균형이 붕괴되면 얼마나 끔찍한 일이 생기는지 잘 보여줬다. 퇴락한 오클라호마를 떠나 젖과 꿀이 흐르는 캘리포니아로 가는 행렬은 조드 일가에게 희망의 빛줄기였다. 하지만 막상 당도하니 지옥이 기다리고 있었다. 농장주의 횡포에다 자연재난까지 덮친 세상은 출구가 없었다.

폭풍과 홍수로부터 피난한 빈집에서 조드 일가는 굶어 죽어가는 소년과 아버지를 발견한다. 먹을 것을 아들에게 양보한 아버지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어머니와 사산을 겪은 딸 로자샤인(샤론의 장미)은 눈빛을 주고 받는다. 로자샤인은 젖은 옷을 벗어 소년의 아버지에게 젖을 물린다. 다른 모든 수단이 막힌 상황, 생명을 구하는데 무슨 망설임이 있겠는가. 영화로도 만들어진 '분노의 포도'에서 이 마지막 장면은 인류애의 표상으로 회자되고 있다. 한때 이 작품은 계층적 갈등을 촉발했다 해 금서목록에 올랐었다. 하지만 계급갈등을 유발하려 했다고 볼 수 없다는 반박이 일면서 금서목록은 풀리고 스타인벡은 1962년 이 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지금 미국의 극단적 계층·이념·지역적 분열을 보면서 로자샤인을 떠올린다. 이 극단적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극한의 위기에 젖을 꺼내 생명을 살린 '샤론의 장미의 젖'이 필요하다. 이 나라도 마찬가지다. 편집국장

Copyright © 디지털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