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 검증대 오른 한국의 ‘시설수용’ 문제···정부는 형식적 답변만

김나연 기자 2024. 7. 14.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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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 고문방지위원회의 ‘제6차 한국 국가보고서 심의’에 앞서 지난 8일 <시설수용, 한국의 끝나지 않은 고문: 사과받지 못한 생존자들의 목소리> 토론회가 열렸다. 손석주 영화숙·재생원 피해생존자협의회 대표가 시설수용 피해를 증언하고 있다. 제6차 유엔 고문방지협약 심의 대응을 위한 한국시민사회모임 제공

“배고프지 않냐?” 1971년, 9살이었던 손석주씨(62)는 부산역에서 신문을 팔다가 누군가가 건넨 밥과 음료를 먹고 잠이 들었다. 눈을 뜬 곳은 집단수용 시설로 향하는 트럭 안. 이후 그는 아무리 시설에서 도망을 쳐도 “행색이 남루하다”는 이유만으로 줄곧 시설로 보내졌다. 아침마다 죽어있는 옆 친구를 보는 게 일쑤였고, 친구들은 쓰레기장 옆에 아무렇게나 묻혔다고 했다. 몇몇은 시설 운영진의 학대와 성폭행으로 스무살이 지나서도 기저귀를 착용해야 했다.

손씨는 부산의 집단수용시설 ‘영화숙·재생원’에 수용됐던 시설수용 피해자다. 영화숙·재생원은 1960년대 부산시가 부랑아·노숙인에 대한 정화작업을 하면서 영화숙과 위탁계약을 맺고 재생원지원조례를 통해 이들을 강제 수용하면서 성행했다. 이후 형제복지원의 모델이 된 곳이기도 하다.

지난 10~11일(현지시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 고문방지위원회의 ‘제6차 한국 국가보고서 심의’에 앞서 손씨는 지난 8일 영화숙·재생원 피해생존자모임 대표로서 직접 현지로 날아갔다. 그는 심의가 열리기 전 위원회의 한국 담당 국가보고관들을 만났다.

위원회는 고문 등 비인도적인 대우나 처벌을 방지하기 위한 협약인 ‘유엔 고문방지협약’이 원활하게 이행되는지 점검·평가하는 기구다. 1995년 고문방지협약에 가입한 한국은 위원회에 4년마다 관련 분야의 정책 성과를 국가보고서 형태로 유엔에 제출해오고 있다. 올해는 2017년 3·4·5차 심의에 이어 7년 만에 심의가 진행됐다.

손씨는 보고관들에게 “시설에 있었다는 차별 때문에 가족, 이웃, 사회에 돌아가도 갈 곳이 없었다”며 “지금도 피해 생존자들이 동료 피해자들을 스스로 찾아내고, 직접 시설을 찾아다니며 서류를 찾아 피해를 증명해야 하고, 손해배상을 받으려면 직접 소송해야 한다. 이런 피해가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경인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 공동대표도 보고관들을 만나 각종 학대가 일어나는 장애인 시설 문제에 대해 설명했다. 박 대표는 그룹홈(공동생활가정)에서 학대를 당한 경험을 이야기하며 “한국에서는 ‘장애인은 시설에서 안전하게 사는 것이 좋다’는 믿음이 대부분이다. 장애인들이 시설 밖에서 함께 하는 사회가 오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제6차 고문방지협약 심의 대응을 위한 한국시민사회모임’ 관계자들이 지난 11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고문방지위원회의 ‘제6차 한국 국가보고서 심의’ 상황을 모니터링하고 있다. 제6차 유엔 고문방지협약 심의 대응을 위한 한국시민사회모임 제공

이후 열린 위원회의 심의에서는 한국의 시설수용 피해자들에 대한 구제가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국제인권조약기구 심의에서 국내 시설수용 문제가 조명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위원회의 피터 베델 케싱 위원은 “생존자들 상당수가 아동기부터 수년간 구금됐고, 아주 극심한 가혹행위를 당했다”며 “당사국(한국)은 과거사 시설수용 생존자들에게 필요한 재활과 구제를 받을 수 있게 하고 있나”라고 질문했다. 한국 정부 측은 “법과 원칙에 따라 죄에 상응하는 처벌이 이뤄지도록 하겠다”는 형식적인 답변을 내놨다. 이어 진실화해위원회에서 2022년 내린 형제복지원 관련 결정문을 낭독하는 정도로 답을 갈음했다.

위원회가 시설에서 발생하는 고문과 학대를 어떻게 모니터링하는지를 묻자 한국 정부 측은 “시설 감독은 국가인권위원회의 현장 조사로 충분하다”는 취지로 답했다. 인권위에 진정이 제기되면 시설에서 자료를 제출하고 인권위가 현장 조사를 나간다며 “수용자 인권보장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 심의에서 위원회가 고문방지협약 제1조의 ‘고문의 정의’를 국내법에 반영하도록 권고했으나 후속 조치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지적도 나왔다. 협약 제1조는 ‘공무수행자가 자백이나 처벌 등 특정 목적에 따라 고의로 극심한 고통을 가하는 행위’를 고문으로 규정한다. 협약에 따르면 모든 종류의 차별을 이유로 고통을 가하는 행위는 고문에 해당한다. 정부는 형법에서 모든 고문 행위를 범죄화하고 있다고 답변했으나, 처벌 규정만 담겼을 뿐 고문에 대한 포괄적인 정의는 없다.

위원회는 한국 수용시설에 과밀 문제가 심각하다는 우려도 제기했다. 법무부의 ‘법무시설 기준규칙’에 따르면 현재 국내 수용시설의 1인당 최소 수용면적은 2.58㎡로, 국제기준(1인당 5.4㎡)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 밖에 학대·방치에 취약한 장애인 시설수용 제도에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등 26개 인권시민단체가 모인 ‘제6차 유엔 고문방지협약 심의 대응을 위한 한국시민사회모임’은 “정부가 스스로 협약 위반을 자인하거나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를 들며 변명했다”며 “특히 마지막 정부 답변 시간 30분에서는 2021년에 제출된 보고서를 다시 읽으며 불성실한 답변 태도를 보였다”고 비판했다. 손씨도 “정부가 시설강제수용 생존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나 배·보상에 대해 아무 관심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김나연 기자 nyc@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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