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을 소모품 취급해온 국가의 침묵 [전쟁과 문학]

이정현 평론가 2024. 7. 14.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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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쿠프 전쟁과 문학 28편
태평양 전쟁 최후의 일본군 오노다
30년간 숨어 지낸 일본 패잔병
옛 상관 대동하자 그제야 투항
일본 우익 정신의 상징으로 부각
군국주의에 세뇌된 한 청년의 비극

일본군 소위 오노다 히로는 '태평양 전쟁' 최후의 일본군이다. 일본의 패전 소식을 받아들이지 않은 그는 필리핀의 어느 섬에서 1974년까지 버텼다. 오노다 히로가 귀환했을 때 일본은 '영웅 대접'을 했지만, 정작 그는 적응하지 못했다. 청년들을 소모품 취급한 국가 앞에서 그의 신념은 허망하게 무너졌다. 국가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군국주의였던 일본 정부는 청년을 소모품 취급한 후 어떤 사과도 하지 않았다. 사진은 1974년 52세의 나이로 투항한 오노다 히로.[사진=연합뉴스]

1974년 3월 9일, 필리핀 루방섬에서 일본군 소위 오노다 히로(1922~2014년)가 발견됐다. 무려 30년이나 정글에 숨어 지낸 오노다 히로의 행보는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는 30년간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한 사실을 모른 채 계속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오노다 말고도 전쟁이 끝난 후에도 저항을 계속한 일본군은 곳곳에 있었다. 1951년 마리아나 제도의 한 섬에서 일본군 20여명이 발견됐고, 대만계 일본군인 데루오 나카무라가 인도네시아 모로타이섬에서 20년 넘게 저항을 계속하다가 투항한 적이 있었다. 오노다 히로는 그 모든 기록을 갈아치우면서 태평양 전쟁 최후의 일본군으로 이름을 올렸다.

1944년 12월, 패배를 거듭하던 일본군은 필리핀에서 위기에 몰렸다. 필리핀을 미군에 빼앗기면 일본군은 싱가포르, 인도차이나, 말레이반도에 보급할 통로를 잃었고 대만과 오키나와까지 위험한 상황에 몰렸다. 1942년 징집돼 1944년에 소위로 임관한 일본군 장교 오노다는 필리핀 전선에 투입됐다.

그가 받은 명령은 기존과 조금 달랐다. 이전까지 일본군은 태평양 각지 전선에서 위기에 몰릴 때마다 정면 돌격을 감행했고, 장교들은 포로가 되기를 거부하면서 할복하기 일쑤였다. 무의미한 희생으로 일본군의 병력 부족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게릴라전 훈련을 받고 필리핀 전선에 투입된 오노다는 "절대로 목숨을 끊지 말고 버티라"는 명령을 받았다. 게릴라전으로 후방을 교란하면서 미군의 진격 속도를 늦추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오노다가 지휘하는 일본군들은 루방섬에 건설된 미군 활주로를 파괴하고 섬에 주둔한 미군을 공격했다. 그러나 일본 해군이 레이테만 해전에서 전멸해 보급로가 끊겼고, 루방섬에 투입된 일본군은 대부분 사살됐다. 오노다를 비롯한 30여명의 생존자들은 정글로 도주했다.

도피 과정에서 생존자들은 3~4명씩 조를 짜서 흩어졌다. 그들은 바나나껍질과 코코넛 열매를 먹고, 원주민 마을에서 쌀을 훔쳐 연명했다. 원주민과 민간인이 계속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자 필리핀 경찰은 미군과 연합해 토벌에 나섰다. 1946년에 접어들자 일본군 대부분은 사망하거나 투항했다.

오노다는 3명의 부하와 함께 투항을 거부하고 깊은 정글로 숨어 몇년을 더 버텼다. 1951년 부하 아카즈 유이치가 미군에 투항하면서 오노다가 생존한 사실이 알려졌다. 대대적인 수색작전이 벌어졌으나 오노다 무리는 발견되지 않았다. 오노다는 현실을 철저하게 부정했다.

한국전쟁 발발로 무수한 항공기들이 출격하자 오노다는 일본군이 반격을 시작한 것으로 여기면서 기뻐했고, 투항 권고 방송을 미군의 기만전술로 생각했다. 1954년, 원주민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필리핀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부하 시마다 쇼이치가 사살당한 후에도 오노다는 계속 도주했다.

2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오노다가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원주민 마을에서 훔친 라디오에서 일본의 항복과 경제발전, 도쿄 올림픽,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 관한 뉴스를 들었지만, 모두 미군의 선전 활동으로 여겼다.

1972년, 필리핀군과의 총격전으로 마지막 남은 부하 고즈카 긴시치가 사살되자 오노다는 홀로 남았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오노다의 가족에게 사망통지서를 발부한 일본 정부는 당황했다. 일본 정부는 오노다가 숨은 정글에 가족들의 편지와 사진, 일본 신문과 잡지 등을 살포하면서 투항을 권유했다. 그래도 오노다는 투항을 거부했다.

1974년, 일본 탐험가 스즈키 노리오(1949 ~1986년)가 마침내 정글에서 오노다를 찾아냈다. 총을 겨눈 오노다와 마주한 스즈키는 끈질기게 그를 설득했다. 스즈키와 대화하는 과정에서 오노다는 일본의 패전과 그 이후의 역사를 알게 됐지만, 상부의 명령이 없다면 투항할 수 없다면서 버텼다.

일본 정부는 다급하게 오노다의 직속상관들을 수소문했다. 오노다와 같은 부대에서 근무한 부대원 중 생존자는 매우 드물었다. 일본 정부는 퇴역한 후 서점을 운영하던 60대 노인 다니구치 요시미를 겨우 찾아냈다.

다니구치는 필리핀 전투 당시 오노다의 중대장으로 복무한 자였다. 오노다의 생존 소식을 들은 다니구치는 직접 필리핀으로 가서 오노다에게 자신이 작성한 명령서를 전달했다.

오노다는 명령서를 받은 후에야 비로소 투항했다. 22세 젊은 장교였던 오노다는 52세 중년이 돼서야 고국으로 돌아왔다. 귀국한 오노다는 일본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특히 일본 극우세력들은 오노다의 생환을 반기면서 '일본정신의 부활'이라고 선전했다.

그러나 오노다는 완전히 달라진 일본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토록 적대적으로 싸웠던 미국 문화는 일본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고,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특수로 엄청난 부를 쌓은 일본 사회를 보면서 그는 커다란 위화감을 느꼈다.

프랑스 감독 아서 하라리는 고정관념에 갇혀 버린 한 인간으로서 오노다 히로의 이야기를 조명했다. 사진은 '오노다: 정글에서의 10000일' 포스터.[사진=더스쿠프 포토]

일본을 등지고 브라질로 이주한 오노다는 그곳에서 목장을 경영해 많은 돈을 벌었다. 1990년대에 오노다는 필리핀 정부의 초청을 받고 자신이 숨어 지냈던 정글을 방문했다. 도피 기간 중 그와 부하들이 살해한 필리핀 주민은 30명이 넘었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의 경제 지원이 절실했던 필리핀 정부는 오노다의 전쟁범죄를 문제 삼지 않았다. 오노다도 자신의 과거를 사과하지 않았다.

2021년 프랑스 감독 아서 하라리는 오노다가 쓴 회고록 「항복은 없다: 나의 30년 전쟁」을 바탕으로 '오노다, 정글에서 보낸 10000일'이라는 영화를 제작했다. 이 영화는 칸 국제영화제에서 초청받았으며 프랑스 영화비평가협회 최우수 작품상, 세자르 영화제 최우수 각본상을 받았다.

이 영화는 오노다를 영웅으로 그리지 않는다. 감독은 "자신만의 고정관념에 완전히 갇혀버린 한 인간을 이해하고 싶었다"고 연출 의도를 밝혔다. 오노다의 오랜 도피 생활은 군국주의에 세뇌된 한 청년의 삶이 소멸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일본은 패전 후 완벽한 친미국가로 돌변했고,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 특수를 발판으로 달러의 단맛에 빠졌다. 청년들을 소모품 취급한 국가는 그들에게 어떠한 사과도 하지 않았다. 이 역사 앞에서 오노다가 품었던 거창한 신념은 한없이 초라하기만 하다. 영웅적인 저항이라는 미명 아래 한 청년의 청춘은 덧없이 망가졌다.

이정현 평론가 | 더스쿠프
21cbac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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