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따, 대입 실패도 내 잘못이란 부모님, 나도 내가 너무 싫어요" [정우열의 회복]
편집자주
‘정우열의 회복’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정우열 원장이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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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대학생입니다.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터라 1학년 때 반수를 결심했습니다. 고등학생 때와는 달리 ‘스스로 해보자’는 생각에 혼자서 준비해 대학 입시 1차에 합격했고, 면접을 보려는데 ‘왜 내가 합격했을까’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사실 능력이 없는 사람인데, 글만 그럴듯하게 써서 붙었을 것이라는 불안 때문에 면접을 망치고 불합격했어요. 평소 이렇게 스스로를 쉽게 비난하고, 자꾸 떠오르는 뒤엉킨 생각들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편입니다.
돌이켜 보면 중학교 2학년 때 ‘눈치가 없다’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처음으로 미움을 받았습니다. 부모님께 이를 털어놓자 “네가 눈치가 없고 말을 못하는 아이라서”라고 저를 나무라셨어요. 부모님은 늘 이런 식이었죠.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편이라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공감이나 위로를 해주기보다는 제 잘못을 이야기하시곤 했습니다. 고등학교에서는 비슷한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조심했지만, 또 친구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됐습니다. 힘들어하는 제게 부모님은 “무시하고 공부하라”고 조언했지만, 너무 괴로워서 전부 다 그만두고만 싶었습니다.
그러다 가고 싶은 대학교가 생겼고, 공부를 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주변인과 잘 지내려 외모에 대해 고민하다가 무리하게 다이어트를 하기도 했지요. 학년이 바뀌었는데도 저를 미워하던 친구와 같은 반이 됐고, 또 다른 문제에 휘말렸습니다. 저를 미워하는 친구의 눈치를 보느라 절 챙겨주던 친구에게 상처를 주게 됐고, 이 친구가 자퇴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제 탓이라는 자책을 계속하게 됐습니다. 대학도 지망한 곳에 가지 못하자 독하게 공부하지 못했던 저에 대한 원망이 커졌어요.
이런 상태로 대학에 갔지만, 저 스스로를 향한 비난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잘 맞는 사람들끼리만 다니고 그렇지 않으면 인사도 하지 않는 대학교의 분위기에 좌절도 느꼈어요. 다시 무리에서 도태됐구나, 내가 뭘 잘못했을까 고민하다가 ‘맞지 않는 학과’라는 결론을 내리고 좋아하는 일을 찾아 나서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도망치다시피 휴학하고 좋아하던 옷가게에서 일해 봤지만, 이 역시 힘들었어요. 학업과 대인관계 등으로 부모님과 이야기하다 보면 늘 화가 납니다. 부모님의 말씀에 반박하면 “그렇게 말한 적 없다. 네가 지어낸 것”이라고만 하시니 또 화가 치솟아요.
이제 취업을 비롯한 현실을 고려해야 하는 시점이지만, 어떤 것에도 흥미가 없습니다. 취업을 위해서 성적을 올려놔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결과가 잘 따라 주지 않아요. 결과가 불만족스러우면 또다시 능력 없는 저를 탓하는 굴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게 옳고 틀린 건지에 대한 기준이 무너져 객관적인 시선만 찾게 됩니다. 감정 일기를 쓰고 있지만,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잘 모르겠어요. 외부의 객관적인 시선을 찾으면 또 자신을 비난하게 되고요. 이제 저를 그만 비난하고, 뭔가를 잘 해내고 싶습니다.
최해진(가명·22·대학생)
해진씨, 최근 인기를 끄는 애니메이션 영화 ‘인사이드 아웃2’를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영화는 자신이 누군지를 찾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의 자아 형성은 ‘인사이드 아웃2’의 주인공처럼 주로 청소년기에 이뤄집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청소년기에 가장 중요한 것을 공부라고 여기고 자아 형성은 뒷전으로 미루곤 합니다. 보호자들은 ‘쓸데없는 고민 하지 말고 공부나 해라’라고 청소년에게 말하곤 하죠. 그러나 자신과 친구 등 여러 고민과 이와 관련된 감정을 믿을 만한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공감받으며, ‘내가 이런 이유로 힘들구나’를 인식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자아는 점차 견고해집니다.
이처럼 중요한 단계를 청소년기에 거치지 못하면 나중에 사춘기가 찾아오는 느낌이 듭니다. 일종의 성인 사춘기처럼 20대나 30대, 또 40대가 되어서 그런 고민을 하게 되는 겁니다. 해진씨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해진씨가 하는 고민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필요하고 또 거쳐야 하는 과정이지만, 청소년기에 이런 단계를 밟지 못했죠. 하지만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천천히 자신을 돌아보며 자아를 형성해 나갈 수 있습니다.
사람의 본능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독립적인 하나의 개인으로 살고자 하는 욕구, 또 하나는 주변인과 관계를 잘 형성하면서 의존하고 싶은 욕구입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상충하기 때문에 동시에 가져가기가 쉽지 않죠. 이 역시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진 딜레마입니다. 인간의 평생 과업이 두 가지 본능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것이기도 합니다.
특히 청소년기에는 이와 관련한 갈등이 많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청소년기에 누구나 겪는 시행착오입니다. 이런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그 사이에서 조절하는 방법도 배우게 되죠. 중요한 건 이런 상황이 생겼을 때 전적으로 내 편이 되는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 마음을 공감받고, 어려움을 함께 극복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과정을 해진씨는 거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눈치 없다’는 친구들 사이의 비난을 가족들에게서도 똑같이 받았죠. 두 번 경험하는 상처에 얼마나 속상하셨을까요.
이런 경우 악순환이 생깁니다. 자신이 눈치가 없다는 생각에 몰두해 늘 조심하려다 보면 대인관계에서 지나치게 긴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긴장하면 원래 가진 공감 능력이나 분위기 파악 능력이 떨어지게 되고요. 그래서 더 이상하게 행동하게 되는 겁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진짜 눈치가 없는 사람은 아예 눈치를 보지 않기 마련입니다. 해진씨는 주변의 눈치를 살필 정도로 사회적인 관계나 감정에 민감한 분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를 활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위축된 채로 과도하게 타인에게 신경을 쓰다 보니 마치 눈치가 없는 것 같은 행동을 하게 됐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해진씨는 자녀가 청소년기에 당연히 겪는 관계 스트레스에 관심이 없는 부모님으로 인해 고민을 존중받지 못했습니다. 이는 고민 자체뿐 아니라 ‘나 자신’을 인정받지 못한다는 느낌으로 이어집니다. 자신이 어딘가 부족하다고 여기게 되고 생각과 감정에 확신을 가지지 못하니, 늘 스스로의 부족함을 찾아 비난하는 검열자 역할을 하게 됩니다. 자책이라는 감정 역시 해진씨가 무언가를 제대로 해내지 못해서 생긴 게 아닙니다. 정체성이 안정적으로 형성되지 않아 위축되고, 나를 부족하게 보는 게 내 마음이 아닌 ‘남들의 시선’이라고 투사한 결과입니다. 실제로 남들이 나를 그렇게 보고 있지 않은데도 높은 기준으로 자신을 비난하고 검열하게 되는 겁니다.
삶의 기준은 바깥이 아닌 자신의 마음에 관심을 가져야 비로소 세워집니다. 누구에게나 살아가면서 ‘그냥 나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자’와 ‘하기 싫어도 해야 할 일을 하자’라는 마음이 공존하기 마련이고, 이를 조율하고 타협하며 기준을 세워나가는 것이죠. 그게 바로 자아가 하는 역할이고, 그 역할을 반복할수록 자아가 견고히 형성됩니다. 이 과정은 아쉽게도 매끄럽지만은 않습니다. 많은 갈등과 시행착오가 필수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해진씨 자신에게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내 마음과 가까워진 상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럴 때 비로소 다른 사람의 자아도 존중하게 되고, 그래서 지나친 기대와 그로 인한 좌절의 악순환을 끊고 안정적인 관계를 맺게 됩니다.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감정 일기’를 쓸 때도 노력만큼 잘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 마음조차 스스로 검열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두고 ‘이게 맞는 걸까, 아닐까’에 신경 쓰기 시작하면 솔직해질 수 없습니다. 자신을 검열하는 그 모습은 바로 해진씨가 오랫동안 괴로워하던 부모님의 모습입니다. 그게 힘들어서 지금도 부모님에게 화가 나면서도 자신을 또 그렇게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내 마음의 판사나 검사가 아닌, 변호사가 되길 바랍니다. 오랜 습관 때문에 자꾸 검열자로 돌아가는 게 괴롭더라도 그마저도 수용하며 자기편이 되어 자아가 형성되는 과정에 집중해 봐야 합니다.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에게 1대1로 상담받으면서 정서적으로 수용받는 경험을 지속적으로 갖는 것도 적극적으로 권해드립니다.
해진씨는 성장 과정에서 정서적 상호작용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하셨기 때문에 쉽지는 않을 겁니다. 그건 당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경험하지 못해서인 만큼, 힘을 빼고 긴 호흡으로 경험을 쌓아 나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생각보다 금방 자라지 않는 식물을 키운다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계속 물을 주고 또 햇빛을 쪼여 주고, 그러다 어느 날은 비가 많이 와서 해를 보지 못하는 시기가 이어지더라도 자아를 찬찬히 키워나가는 해진씨가 되기를 응원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당신 안에 단단한 뿌리가 내려 있을 겁니다.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고통 때문에 힘겨운 분이라면 누구든 상담을 신청해 보세요. 상담신청서는 한국일보 신청 링크(https://forms.office.com/r/Krc2wt0UH5)에서 작성해 주시면 됩니다. 또 기사 하단의 QR코드로도 접속이 가능합니다. 선정되신 분의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 지면과 홈페이지에 소개되며 익명을 철저히 보장합니다. ▶상담신청서 바로 가기
정리=전혼잎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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