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우파? 나의 정체성은 전국”…남희석표 노래자랑 ‘딩동댕~’
참가자들 편안하게 만드는 진행 눈길
비연예인 프로 맡아온 오랜 내공 빛나
“이 얘기를 좀 더 하면 재미있을 것 같아요.” “발음이 더 명확하면 좋겠어요.”
지난 6월 서울 송파구 가락시장 인근 ‘전국노래자랑’(KBS2) 예심 현장에서 남희석은 ‘일타강사’를 자처했다. 대부분 무대가 처음일 비연예인 참가자들이 방송에 더 잘 나올 수 있도록 조언하고 격려하며 긴장을 풀어줬다. 예심이 끝난 뒤 한겨레와 만난 남희석은 “되도록 예심 현장에 가서 참가자들의 면면을 미리 살피고 그들과 스킨십하며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편안한 분위기를 조성해주려고 한다”고 했다. ‘전국노래자랑’ 역대 진행자 중에서 예심까지 챙기는 건 남희석이 처음이다. 그는 고 송해처럼 녹화 전날 현장에 가서 주민들과 어울리기도 한다.
남희석의 ‘사서 고생’은 성과를 내고 있다. 6월30일 방송이 시청률 7.4%(닐슨코리아 집계)를 기록하며, 그가 “연말까지 목표했던 수치” 7%를 진행 3개월 만에 넘어섰다. 시청률이 보장된 연말 특집 방송(2023년 12월31일 7.7%)을 제외하면, 평소 방송에서 7%는 지난해 1월29일(7.4%) 이후 1년5개월 만이다. 남희석은 “장거리 달리기라고 생각해서 일희일비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했지만, 마음의 부담을 조금은 덜었을 것이다.
남희석은 지난 3월24일 방송을 끝으로 마이크를 내려놓은 김신영의 후임이라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억측에 시달렸다. 제작진이 진행자 교체를 몰랐던 것처럼 잘못 알려지면서 “어렸을 때부터 바랐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기쁨을 누릴 기회도 얻지 못했다. ‘남희석을 정치권에서 꽂았다’ ‘김신영이 여자여서 잘렸다’는 등 확인되지 않은 말들이 쏟아졌다. 어수선한 분위기가 이어지면 프로그램에 해가 될까 봐 그는 해명도 소감도 삼켰다. 남희석은 “창의력이 동원된 수많은 말들을 봤지만, 결국은 1년 뒤 어떤 모습이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묵묵히 방송하자 싶었다”고 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하며 넘겼다지만 정치적 프레임을 씌우는 것은 이해가 안 됐던 듯했다. “내가 나를 뭐라고 규정하지 않았는데 외부에서 내가 어떻다고 함부로 규정하는 건 폭력이라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저더러 좌파 연예인이라더니 지금은 또 우파라네요. 왜 좌우 편 가르기를 하는지 모르겠어요. 언젠가부터 엄지를 들거나 손가락으로 브이(V)를 하는 것도 조심하게 돼요. 연예인들이 옷 색깔도 신경 써야 하는 세상이 된 게 안타까워요.” 그는 “나는 한겨레와 조선일보 모두 다 본다”며 “나의 정체성은 전국”이라며 웃었다.
정작 지난 3개월 동안 그를 힘들게 한 건 따로 있었다. “전 저를 둘러싼 억측보다 인구 소멸 문제가 더 걱정이었어요. 예심 현장에 가보니 인구 격차가 심각하다는 게 체감되더라고요. 인구가 많은 지역에서는 젊은 세대들이 나와 댄스곡도 부르는데 인구가 적은 지역은 중장년층이 대부분이에요. 기온이 올라 지역 특산물 시장이 죽어가는 것도 한눈에 보이죠. 착한 척하는 게 아니라 그런 것들이 결국 ‘전국노래자랑’ 문제로 이어질 테니, 전 그게 더 걱정입니다.”
‘전국노래자랑’은 남녀노소 모두 참가해 저마다의 삶이 녹아나는 프로그램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이날 송파구 예심에서도 4살부터 83살까지 다양한 연령대에서 총 469명이 참가했다. 지난달 2일 방송에서는 역대 최고령 참가자인 102살 할머니가 ‘찔레꽃’을 불러 감동을 주기도 했다. 남희석은 “한번은 신발 공장에서 일하는 부부가 재미있는 춤을 추며 한바탕 웃음을 줬는데 이를 방송으로 보니 뭉클하더라고요. 춤추는 부부 뒤로 그 지역 신발 공장의 흥망성쇠가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면서 부부가 겪었을 희로애락이 보이는 거죠.” 그는 “시청자로서 ‘전국노래자랑’을 볼 때면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가 떠오른다”고 했다. 매주 화·토 녹화로 1주일에 최소 나흘은 빼야 하는 빠듯한 일정에도 그가 이 프로그램을 맡은 이유다.
그는 몸을 낮춰 참가자들과 눈높이를 맞추고, 힘 좋은 참가자에게 둘러메쳐지는 등 망가짐도 서슴지 않으며 현장을 이끈다. 한 방송사 예능 피디는 “보통 사람들의 언어로 얘기하는 평범함과 편안함이 그의 장점”이라고 했다. 탈북민(새터민)이 나오는 ‘이제 만나러 갑니다’를 2011년부터 13년째 진행하는 등 주로 외국인 여성(‘미녀들의 수다’), 전국 이장(‘전국이장회의’) 등 삶의 내음이 묻어나는 소시민들을 만나온 것이 도움됐다. 이 모든 사람이 다 참여할 수 있는 ‘전국노래자랑’은 그의 장기가 가장 빛날 수 있는 무대인 것이다. “전문 방송인이 아닌 이들을 이끌어주는 건 자신 있어요. 저보다 그들이 주인공이 되어야 해요. 특히 ‘전국노래자랑’은 지역 잔치잖아요. 지역 주민들이 돋보일 수 있도록 저는 현장에서 흥만 돋우고 방송에는 적게 나오면서 최대한 남희석을 지우려고 합니다.”
비연예인들을 만나면서 그도 힘을 얻는다. “제가 강호동·유재석급은 아닌데 오랫동안 활동해서 얼굴은 알려진 사람이잖아요. 지역에 갈 때마다 어르신들이 좋아해주시는 걸 보면 저도 기운이 나죠.”
자신을 스스로 “강호동·유재석급은 아니라”라고 서슴없이 말하며 객관화시키기까지 그에게도 희로애락이 있었다. 그는 1991년 한국방송(KBS) 공채 코미디언으로 데뷔한 이후 ‘좋은 친구들’ ‘남희석 이휘재의 멋진 만남’ 등으로 시대를 풍미했지만, 2000년대 말 버라이어티 시대가 되면서 중심에서 벗어났다. 공채 동기인 유재석 등이 여전히 ‘나의 시대’를 사는 모습을 보며 옛 영광이 그립지 않으냐고 물으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각자의 자리와 역할이 있잖아요. 전 묵묵히 조용히 진행하는 프로그램이 좋아요. 그러다 방송에 쓰임이 없어지면 ‘그렇구나’ 하고 다른 직군을 찾으려고 애쓸 수 있는 사람입니다.” 앞으로의 목표도 “평지라도 뚜벅뚜벅 걸어가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남과 나를 비교하지 않고 과거에 취해 살지 않는 건강함은 ‘전국노래자랑’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는 ‘전국노래자랑’을 내 것으로 만들려고 서두르지 않는다. “‘전국노래자랑’은 송해 선생님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한, 송해 선생님 자리가 큰 프로그램이에요. 내가 이 프로그램을 어떻게 끌고 가고 싶다는 방향성은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남희석표 프로그램’으로 만들 수는 없어요. 지금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길을 가면서 차근차근 남희석이 잘하는 걸 맞춰 가야죠. 그게 1년, 2년이 걸릴 수도 있지만 자연스러운 상황이 나올 거라고 생각해요.”
남희석은 프로그램을 하면서 만난 비연예인들과도 꾸준히 교류하고 있다고 했다. 사람에게 다가가는 데 거리낌이 없고 인연을 중시하는 사람 같았다. 그는 “시사 프로그램 ‘외부자들’을 진행할 때는 정치에 대해 궁금한 게 있으면 정치부 기자든 보좌관이든 안면이 없어도 연락해 물었고, 책을 읽다가 궁금한 게 있으면 출판사에 전화해 묻기도 한다”고 했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도 관심이 많다. 2001년 외국인 노동자들이 학대받는 뉴스를 보고 화가 나 서울 외국인노동자 센터에 찾아가 홍보대사를 맡기도 했다. 한때는 소셜미디어(SNS)에서 전투경찰의 과잉진압 부당성을 꼬집고, 농촌과 농민을 살려야 한다고 호소하는 등 할 말을 하기로도 유명했다. 그를 잘 아는 방송국 관계자는 “‘전국노래자랑’ 진행을 둘러싼 억측들도 이런 성격에서 오인된 것 같다”고 했다.
남희석은 “전국을 돌아야 하는 ‘전국노래자랑’을 맡으니 오해를 받지 않으려고 가급적 정치 뉴스를 안 보려고 한다”며 “시사를 끊으니 건강해지더라”며 웃었다. 그런 그도 대놓고 정체성을 드러내어 편드는 ‘진영’은 있다. “제가 매사에 덤덤할 수 있는 건 한화 이글스 팬이어서기도 해요.(웃음)” 그러고 보니 휴대폰 케이스도 팔목에 찬 시계도 한화 이글스다. “전 한화 이글스 시계만 차요. 다른 시계에는 관심 없습니다.(웃음)”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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