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삶은 아름답다 《퍼펙트 데이즈》
(시사저널=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일본 도쿄 시부야의 공공화장실을 청소하는 남자의 일상. 직관적으로 궁금해지는 소재와는 거리가 먼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빔 벤더스 감독의 신작 《퍼펙트 데이즈》는 그것이 전부인 영화다. 이 단출한 영화가 걸어온 길은 심상치 않다. 지난해에는 제76회 칸국제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주연배우 야쿠쇼 고지가 시상식 직후 일본 언론 관계자들과 가진 인터뷰에서 "이제 겨우 야기라 유야(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로 제57회 칸국제영화제 사상 최연소 남우주연상 수상, 당시 14세) 를 따라잡았다. 이 상에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라는 수상 소감도 화제였다. 동시에 에큐메니컬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인간 존재를 깊이 있게 성찰한 예술적 성취가 돋보이는 작품에 수여하는 상이다. 매일 같은 일과의 반복을 보여주는 단출한 이 영화에는 대체 어떤 힘이 있는 것일까.
공공화장실을 청소하는 남자의 사연을 고르기까지
히라야마(야쿠쇼 고지)의 일과는 지독하리만큼 똑같은 루틴으로 채워진다. 아침에 일어나면 바로 이부자리를 정리한다. 화초에 물을 주고, 부엌의 좁은 싱크대에서 세수를 한 후 수염을 정리한다.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문을 나서기 전에 차례로 소지품을 챙긴다. 지갑, 열쇠, 시계, 동전 같은 것들이다. 집 앞 주차장 자판기에서 캔커피 하나를 뽑고 차에 올라탄다. 청소도구 같은 것들을 가득 실은 소형 용달차다.
좋아하는 곡들이 녹음된 카세트테이프 중 그날의 음악을 고르고, 운전해 일터로 향한다. 자신만의 도구와 루틴으로 깔끔하게 청소를 마친 후, 점심시간에는 근처 공원에서 간단히 도시락을 먹는다.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빛을 필름 카메라로 찍는 것 역시 잊지 않는다. 퇴근 후에는 동네 목욕탕에 갔다가, 지하철역 상가와 이어진 술집에서 간단히 식사를 한다. 집에 돌아오면 책을 읽다가 잠든다.
주말의 루틴은 같은 듯 조금 다르다. 코인세탁소에서 빨래를 하고, 일주일간 찍은 필름 사진을 인화한다. 중고 책방에서 윌리엄 포크너나 패트리샤 하이스미스 같은 작가들의 책을 골라 산 후 작은 단골 바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온다. 그 모든 동작과 동선에 불필요한 낭비가 하나도 없는 것으로 보아, 자신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을 남기기까지 히라야마는 무수한 뺄셈을 거듭해 지금의 루틴을 완성했을 것이다. 톱니바퀴처럼 착착 맞아떨어지는 수순을 반복하는 그의 하루는 금욕적이고 단정하다.
《퍼펙트 데이즈》는 마치 짐 자무쉬 감독의 《패터슨》을 향한 빔 벤더스 감독의 응답 같은 영화다. 《패터슨》은 미국 뉴저지주의 소도시 패터슨에 사는 버스운전사 패터슨(아담 드라이버)의 삶을 담은 이야기였다. 이 영화가 패터슨의 반복적 하루의 운율을 그가 쓰는 시(詩)와 연결 지었다면, 빔 벤더스는 《퍼펙트 데이즈》에서 히라야마의 일상과 그가 찍는 사진을 연결 짓는다. 《파리, 텍사스》 《베를린 천사의 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등의 명작으로 유명한 감독은 왜 타국의 도시에 사는 한 청소부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 걸까. 여기에는 흥미로운 사연이 있다.
히라야마는 뒷면에 '더 도쿄 토일렛(The Tokyo Toilet)'이 인쇄된 작업복을 입는다. 극 중에서 그가 소속한 공공업체이자, 실제로는 일본 도쿄 시부야구의 공공화장실 17개를 재건축한 프로젝트의 이름이다. 2018년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진행된 설문조사에 따르면 90%의 참여자가 공공화장실의 비위생적인 환경과 안전 문제를 들어 '전혀 이용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이에 비영리단체 닛폰 재단의 지원으로 도쿄 화장실 프로젝트, 즉 '더 도쿄 토일렛'이 추진됐다. 안도 다다오, 구마 겐고 등 일본 출신의 세계적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이 참여해 공공화장실을 안전하고 감각적인 디자인으로 바꾸는 작업이었다. 그 과정에 빔 벤더스에게 다큐멘터리 촬영과 연출을 의뢰했으나, 뜻밖에도 그는 화장실이 등장하지만 화장실 이야기가 아닌 장편 극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역제안을 했다.
'고모레비(こもれび)'의 아름다움을 좇아
일본의 거장 오즈 야스지로 감독을 향한 빔 벤더스의 사랑은 유명하다. 《동경 이야기》(1953)를 처음 본 날, 빔 벤더스는 그 자리에서 연거푸 두 번을 더 보았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일본영화연구소에서 오즈 야스지로 전작을 보기 위해 1977년 일본에서 열린 한 영화제 참석을 수락한 일화도 있을 정도다.
이후 《동경 이야기》에 나온 해안도시를 여행하며 찍은 사진을 모아 '오모미치 사진집'을 내고 동명의 전시를 열었다. 오즈 야스지로 세계의 핵심 배우 중 한 명인 치슈 류와는 《이 세상 끝까지》(1994) 중 한 대목을 촬영하기도 했다. 히라야마의 이름은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 《꽁치의 맛》에 등장한 주인공에게서 따왔다. 말하자면 《퍼펙트 데이즈》는 사랑하는 도시 도쿄를 향한 애정, 타국의 예술가 오즈 야스지로를 향한 예우, 삶을 찬미하는 철학이 더해진 빔 벤더스 버전의 '최선의 현재'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된 것이 '고모레비(こもれび)'의 아름다움이다. 일본에만 있는 이 단어는 '나무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을 뜻한다. 《퍼펙트 데이즈》의 원래 제목이기도 했다. 그것은 언뜻 지루한 반복 같지만 조금씩 달라지고 매번 다르게 아름다운, '순간'이라는 소박한 기적을 뜻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그 가치를 깨닫게 된 히라야마에게는 세상의 모든 것이 경탄과 존중의 대상이다. 남들이 더럽힌 변기, 매일 공원 벤치에서 마주치는 은행원, 남들이 모두 피하고 싶어 하는 노숙자의 움직임까지. 그것은 모두 세계를 이루는 아름다움이다.
영화는 히라야마의 전사를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는다. 어느 날 불쑥 히라야마에게 찾아온 조카와의 일화를 통해 더듬거리며 짐작해볼 수 있을 뿐이다. 과거 그는 부자였을 것이고, 불행했을 것이다. 자신의 삶이 쓰레기 같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 아침에 문득 벽에 비치는 그림자를 보았고, 따스한 햇볕과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가 만나 만든 아름다운 일렁임을 보고 조용히 울었을 것이다. 자신의 인생에서 그렇게 아름다운 것을 본 기억이 없었기 때문에. 그 깨달음의 순간, 그는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고자 결심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사연은 빔 벤더스 감독이 떠올리고 야쿠쇼 고지와 조용히 공유했으나 영화에 등장하지는 않는 히라야마의 이야기다.
《퍼펙트 데이즈》는 작은 아름다움을 알게 되기까지 한 사람의 인생 여정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게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히라야마의 말마따나 "나중은 나중이고, 지금은 지금"이 우리에겐 가장 중요하다.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예상했지만 막상 두 개의 그림자를 포개어 보면 "겹치는 순간 더 진해진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처럼, 우리의 일상은 그렇게 작은 발견의 순간들로 가득하다.
가느다란 햇빛을 좇으며 기쁨을 찾던 히라야마에게 햇빛이 가득 쏟아지고, 벅차오른 그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는 마지막 장면의 여운이 주는 감동은 말로 다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 얼굴은 세상의 모든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뛰어넘어, 삶은 분명 아름답다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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