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연·박해수 덕에 성공했다?…우리가 주목해야 할 '뒷것' [스프]

김수현 문화전문기자 2024. 7. 14.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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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콜+] 연극 '벚꽃동산'으로 보는 '뒷것'의 역할

'월드 스타' 전도연·박해수 출연으로 장안의 화제가 된 연극이 얼마 전 폐막했습니다. 바로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됐던 연극 '벚꽃동산'입니다. 6월 4일 개막한 이 연극은 30회를 원 캐스트로 진행하며 객석 점유율 95%를 기록했습니다. 4만 명 넘는 관객이 이 연극을 본 것이죠. 아무리 '스타 캐스팅'이었다 해도 대중적 관심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연극 장르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입니다.

'벚꽃동산'은 안톤 체호프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19세기 말 러시아를 배경으로 벚꽃동산의 지주 라네프스카야와 그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귀족 가문의 몰락을 그려낸 작품입니다. 하지만 이번 공연은 시간과 공간적 배경을 한국으로 옮겨, 한국의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이야기가 된 '벚꽃동산'


이 연극은 고전의 재해석으로 주목받는 호주 출신의 연출가이자 영화감독인 사이먼 스톤이 연출을 맡았습니다. 사이먼 스톤은 원작을 직접 한국판으로 각색했습니다. 무대를 19세기 말 러시아에서 현대 한국으로 옮겨왔지만, 전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원작의 라네프스카야는 한국의 재벌 3세 송도영이 되었습니다. 송도영은 10여 년 전 어린 아들의 죽음 이후 미국으로 떠났다가 한국으로 돌아옵니다. 그가 돌아온 서울은 예전 같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가세가 기울어 가족들과 오랫동안 함께 살았던 집이 넘어갈 위기에 처해 있죠. 이 집 운전기사의 아들로 성공한 사업가가 된 황두식은, 송도영과 오빠 송재영에게 더 늦기 전에 좋은 조건에 자산을 처분하고 기업을 살리라고 조언하지만, 이들은 귀담아듣지 않습니다.

송도영을 연기하는 전도연, 황두식을 연기하는 박해수, 송재영을 연기하는 손상규, 모두 명불허전의 연기를 보여줬습니다. '벚꽃동산'은 본래가 몇몇 주역만 돋보이지 않고, '벚꽃동산'을 드나드는 모든 인물이 생생한 매력으로 조화를 이루는 작품이죠. 최희서, 남윤호, 유병훈, 이세준, 이주원, 이지혜 등 다른 배우들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연출가 사이먼 스톤은 한국 영화를 200편 이상 소장하고 있을 정도로 한국 문화에 친숙하다고 합니다. 역할에 어울리는 한국 배우들을 직접 추천하기도 했죠. 한국판 '벚꽃동산'을 쓰기 위해 평창동 같은 전통적 부촌을 답사했고, 한국 배우들과 소통하며 대본을 완성했습니다.

무대 디자인은 주목받는 한국인 건축가 '사울 킴(김민규)'이 맡았습니다. 예전부터 건축가 사울 킴의 팬이었던 사이먼 스톤이, 한국판 '벚꽃동산'의 무대를 맡아달라고 요청했고, 사울 킴이 이를 받아들여 인상적인 무대가 탄생했습니다. 좋아하던 건축가를 자신이 연출한 작품에 참여시킨 사이먼 스톤이 '성덕'이 되었다는 얘기도 나왔습니다.

'꼭 봐야 할 작품'…해외 초청 잇따라


'벚꽃동산'은 스타 배우들과 감독들에게도 '꼭 봐야 할 작품'으로 꼽혔습니다. 이영애, 황정민, 정우성, 설경구, 송혜교, 한가인, 임지연, 김고은, 천우희, 차은우 등 배우들과 박찬욱, 이창동, 이준익 감독이 공연장을 찾았습니다. '나도 이런 연극 한번 해보고 싶다'고 한 배우들이 많다는 얘기가 들립니다.

해외 유명 페스티벌과 공연장 관계자들도 '벚꽃동산'을 보기 위해 잇따라 한국을 다녀갔습니다. 토니상과 올리비에 어워드 연출상을 석권한 연출가 이보 반 호브는 개막 첫날 공연을 보고 ''벚꽃동산'의 위대한 현대적 재해석'이라고 찬사를 보냈습니다. 이보 반 호브는 유럽의 주요 공연 축제 중 하나인 독일 루르 트리엔날레 예술감독을 맡고 있는데요, 당장 '벚꽃동산'을 이 축제에 초청했습니다. 이외에도 해외 주요 페스티벌과 극장들이 '벚꽃동산'을 공연해달라는 요청을 해온 상태입니다.

내년 3월 호주 애들레이드 페스티벌 공연 일정은 확정되었고, 루르 트리엔날레를 중심으로 한 유럽 투어 일정도 내년 가을 정도로 조율하는 중입니다. 뉴욕과 싱가포르, 타이완 등 다른 지역 투어도 논의 중인데요, 바쁜 배우들의 일정을 맞추는 게 문제일 뿐, 한국 배우들이 한국어로 공연하는 한국판 '벚꽃동산'을 전 세계 관객들이 보게 되는 것이죠.

연극 '벚꽃동산'의 '뒷것'


'벚꽃동산'이 화제가 되면서 주로 배우들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고 있지만, 저는 이 공연 제작을 맡은 LG아트센터의 역할에도 주목하게 됩니다.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라는 SBS 다큐멘터리 덕에 유행한 '앞것' '뒷것' 용어를 빌어 말하자면, 공연 제작을 맡은 LG아트센터는 '뒷것'이고, 앞것들을 빛나게 하는 뒷것 역할을 아주 잘 해냈습니다.

LG아트센터는 '충성 관객'이 많은 공연장으로 알려져 있죠. 초창기에는 세계 공연 시장 트렌드를 선도하는 해외 연극, 무용 작품들을 선별해서 소개하는 공연장으로 공연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해외 초청 공연을 하더라도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작품만 좋으면 꾸준히 다시 초청하며 협력 관계를 공고히 했습니다.

관계가 쌓일수록 해외 신작을 발빠르게 초청하는 것도 쉬워지고, 해외 공연장들과 공동으로 신작을 위촉 제작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작고한 독일의 세계적인 무용가 피나 바우쉬가 2005년 LG아트센터의 위촉으로 한국을 소재로 한 무용극을 만든 게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 작품은 LG아트센터 초연 이후 일본과 독일, 프랑스 등 해외 공연장에서도 선보였습니다.

LG아트센터는 이보 반 호프 같은 세계 연극계 거장의 작품들을 소개하기도 하지만, 한국 연극도 꾸준히 제작해 왔습니다. LG아트센터 역삼동 시대를 마감한 연극 '코리올라누스'는 양정웅 연출, 남윤호 주연으로 당시 연극계에서 돋보이는 화제작이었습니다.

스타 연출가를 초빙하고, 작품에 맞는 배우들을 캐스팅하고, 긴 시간 연습과 제작 과정을 원활하게 진행해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얻어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스타들을 모아놓는 것도 힘들지만, 모아만 놓는다고 일이 다 되는 것도 아니죠. 이번 공연은 LG아트센터가 몇 년 전부터 사이먼 스톤과 교류하며 한국에서 연극 같이 만들어보자는 공감대를 쌓았고, 그동안 연극을 직접 제작하며 축적한 역량이 있었기에 가능한 프로젝트였습니다.

LG아트센터가 돋보이는 이유


어쩌면 이 프로젝트는 민간 공연장인 LG아트센터라서 가능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벚꽃동산' 총괄 프로듀서를 맡은 이현정 센터장은 LG아트센터 개관 준비부터 시작한 1호 직원입니다. 그는 평직원으로 입사해 공연기획팀장, 국장을 거쳐 내부 승진했습니다. '벚꽃동산'은 LG아트센터라는 공연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이 공연장의 정체성을 만들어온 센터장이 큰 그림을 그리고, 실현해 낸 프로젝트였습니다.

해외에서는 대형 신작 개발을 공공극장이 맡는 경우가 많지만, 정권을 누가 잡느냐, 지방자치단체장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쉽게 바뀌고 휘둘리는 한국의 공공 극장 현실에선 이런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쉽지 않습니다. 길어야 임기 3년인 한국의 예술 단체장이나 극장장은 어쩌면 자기 임기 후에나 실현될 장기 프로젝트를 준비할 여유도, 이유도 많지 않습니다.

만약 단체장에게 뚜렷한 비전이 있다면, 영혼을 갈아 넣어서라도 좋은 공연 해보고 싶다는 실무자가 있다면, 그리고 그 실무자가 오랫동안 자리를 지킨다면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상당히 예외적인 경우고, 현실에서는 전문성 없는 사람이 갑자기 낙하산 인사로 예술 단체장이나 극장장이 되고, 어느 캠프 출신이라더라, 정치인 누구와 친하다더라, 이런 풍문들이 떠도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게다가 그 자리에 누가 있으나 없으나 별 상관없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건지, 경제·사회 단체장 인사 먼저 챙기느라 그러는 건지, 후임자를 미리 정해 충분한 인수인계 시간을 주기는커녕, 공석이 나도 빨리 채우지 않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국립극장장 자리가 2년 가까이 공석이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문화예술을 홍보 수단 정도로만 보는 인식도 아직 팽배합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김수현 문화전문기자 shkim@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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