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트병 생수 대신 수돗물을 마실 결심 [독서일기]
앨리스 달 고보 지음, 경규림 옮김
이상북스 펴냄
위기는 과거가 순간적으로 부정되고, 정지되고, 혹은 폐기되는 순간이자 미래가 아직 시작하지 않은 순수한 잠재력의 순간이다. 위기는 관습적으로 이어져온 그동안의 정상 상태에 대한 의문을 허용하기 때문에,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실험뿐 아니라 정치적 변혁이 생겨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위기가 항상 바람직한 변화만을 낳지는 않았다. 금융위기 사태를 맞은 한국에서는 민영화와 시장개방이 날치기로 이루어졌고, 2019년 코로나19 팬데믹은 ‘비대면’을 핑계로 정부가 그동안 해온 여러 종류의 대면 서비스를 소리 소문 없이 종료시켰다.
긍정과 부정이라는 양방향을 가진 저 공식은 이탈리아의 사회학자이자 생태여성주의자인 앨리스 달 고보에게 재미난 숙제를 안겼다. 위기가 기회라면, 개인에게 일어나는 실직이나 수입 감소 또는 한 지역이나 국가의 경제불황은 사람들에게 생태주의에 대한 관심을 더욱 민감하게 만들었을까, 아닐까. 2007~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에서 시작된 세계 금융위기는 전 세계의 생태주의를 더욱 촉진했을까, 아닐까. 생태주의 담론이나 실천을 주제로 한 책은 많지만 앨리스 달 고보의 〈나의 행동이 대양의 작은 물방울에 불과할지라도〉(이상북스, 2024)는 접근 방법이 기발하고 흥미롭다.
지은이가 현장 연구를 위해 선택한 지역은 자신의 고향인 이탈리아 북동부의 소도시 비토리오 베네토다. 르네상스 시대의 흔적을 갖고 있는 이 도시는 1960년대부터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발발 전까지는 경제적으로 꽤 풍족했다. 세계의 어느 도시나 그랬듯이, 이 도시 역시 급격한 경제발전으로 소비주의가 넓고 깊게 침투되고, 그만큼 생태계는 파괴되어 있었다. 그랬던 도시는 2008년부터 세계적인 경기침체의 타격을 받으면서,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이 갑자기 끝났다”라는 위기의식이 그곳 시민들을 사로잡았다. 지은이는 2015년부터 1년8개월간, 18~76세의 주민 열한 명을 대상으로 그들의 일상에서 생태주의가 어떤 식으로 실천되고, 선별되고, 배격되는지 관찰했다.
사례 연구의 첫 번째 인물은 스키 부츠 디자이너였던 오누르비오. 그는 경제침체와 기후변화가 함께 들이닥친 2008년, 회사에서 해고됐다. 안정된 중산층으로 살아온 그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주식투자, 스키·골프·탱고 강사 등 다양한 비공식 활동을 통해 새 삶을 시작했다. 이 활동 중 일부는 그에게 약간의 수입을 가져다주었으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유급 노동에 의해 상품화되었던 자신의 자유와 자긍심을 되찾은 것이다. 수입이 줄었다는 위기감은 그에게 반소비적 생활습관을 갖게 했다. 그 때문에 생겨난 의미 있는 생태주의적 변화는 페트병에 든 생수 대신에 시의회가 설치한 공공 급수기의 물을 길어 먹게 된 것이다.
다시 수입이 늘면 어떻게 될까
생태주의자라고 하면 마땅히 ‘자연’이나 ‘환경’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생태사회주의(정치생태학)를 최초로 제시했으며 앨리스 달 고보에게도 커다란 이론적 자원을 제공한 앙드레 고르스는 〈에콜로지카〉(갈라파고스, 2015)에서 한 번도 자연이나 환경을 생태주의와 연결 지은 바 없다(‘기후재앙’ 같은 말이 나오기는 한다). 생태주의자란 다른 그 무엇이 아니라, 소비에 저항하는 것이다. 고르스는 말한다. “‘생태주의자’라는 말이 생기기도 전에 나는 바로 이 주제에 의해, 즉 펑펑 쓰는 소비 모델에 대한 비판을 통해 생태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오누르비오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례 제공자들은 실업이나 은퇴, 이혼 등의 생애 전환을 맞이하여 절약과 재사용·재활용을 습관화하게 되었다. 그런 끝에 절약이라는 자체의 목적을 넘어, 소비가 가져오는 자원 낭비와 폐기물 생산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터득하게 되었다. 소득 감소가 습관적 행동의 반복에 단절을 만들었고, 그러면서 그 반복된 행동을 의심할 여지가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다시 수입이 늘어나더라도 이들이 여전히 소비에 저항하게 될까. ‘위기가 기회’라는 말이 그렇듯, 이들의 회복탄력성도 어디로 튈지 모른다.
사실 오누르비오는 실직 상태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여유로운 백인 중산층의 생활양식을 누렸다. 그가 공공 급수기의 물을 길어 먹게 된 행위를 지속 가능한 세계를 만들기 위한 합리적인 선택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환경 윤리에 대한 내적인 깨달음에서 비롯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지은이는 그런 번지르르한 해석을 물리친다. 오누르비오가 공공 급수대를 이용하게 된 것은, 먼저 그에게 자전거를 타고 느긋하게 물을 뜨러 갈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인프라’가 마련되어 있어서였다. 이 두 조건 가운데 하나라도 없었다면, 그의 생태주의적 실천도 없었다.
국가나 사회의 주도권이 시장으로 재편된 신자유주의 시대에, 생태주의적 실천의 신자유주의적 해결은 생태주의를 초자아와 같은 것으로 승격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생태주의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처럼 개인의 윤리로 고립시키는 것이다. 지속가능성이라는 개념은 원래 생태주의자들이 자본과 산업에 저항하기 위해 개발한 것이었으나, 현재는 자본주의 경제를 존속시키는 데 활용되고 있다. 지속가능성 개념에서 삶을 구성하는 존재 양식 자체에 대한 의문과 맥락이 제거되면서 중산층의 생태운동은 그린워싱(Greenwashing·기업의 이미지나 상품 홍보를 위해 환경친화적인 위장술을 쓰는 것)된 상품을 골라 쓰는 소비로 변질되었다. ‘지구를 구하자!’라는 막중한 임무는 ‘시민-소비자’의 책임이 되었다.
정치생태학과 에코페미니즘(생태여성주의)을 신물질주의(신유물론) 이론과 접합하고 있는 이 책에는 들뢰즈-가타리가 고안한 개념이 수시로 출몰한다. 그렇더라도 원제(‘일상의 생태학’)와 동떨어진 한국어판 제목만큼 난해하지는 않다. 이 책이 생태주의 운동에서 일상이 가진 변혁의 힘을 매우 강조하고 또 ‘좋은 삶’을 향한 개인의 욕망을 매우 중시하기는 하지만, 한국어판 제목은 지은이가 경계했던 핵심과 어긋난다. “개인의 창의성과 역할이 실천에 중요한 것은 맞지만, 변화에 대한 ‘일차적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잘못된 일이다. 변화는 필수 자원을 공급하는 물질문화에서부터 사회의 규범과 표준에 이르기까지 통합된 사회 기술 체제 수준에서 일어나야 한다. 이런 전제를 바탕으로 하면, 개인의 국지적 행동뿐 아니라 시스템 역학을 고려하게 된다. 예를 들어, ‘자연 자원을 끝없이 착취하는’ 현대 소비문화의 확장은 환경파괴의 주원인이다. 따라서 일상의 실천을 바꾸려면 이러한 시스템 수준의 원인을 제대로 이해하고 변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장정일 (소설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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