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부시 회담 중 나간 파월 장관, 북한 향해 경고 기자회견
한·러 ABM 공동성명, 1주일 후 한미 정상회담에 악영향
파월은 부시 질책받고 하루 만에 강경 입장 발표
DJ “내가 미국에 얼마나 많이 사과해야 했는지 모른다”
[조선일보 외교부·민주당 출입기자·한나라당 취재반장·외교안보팀장·워싱턴-도쿄 특파원·국제부장·논설위원과 TV조선 정치부장으로 정치·외교·안보 분야를 25년간 취재해왔습니다. 주요 사안의 막전막후에서 취재한 비사를 전해드립니다.]
◇ 청와대 “ABM 논란 진정시켜라”
우리 외교사에서 실패한 정상회담으로는 2001년 3월 김대중-조지 W 부시 대통령 회담이 꼽힙니다. 상견례를 겸한 첫 회담이었는데 1주일 전 한러 정상회담 공동성명에 부시 대통령이 반대하는 ‘탄도탄요격미사일(ABM)조약의 보존 및 강화’ 문구가 들어가면서 분위기가 좋지 않았습니다.
2001년 3월 1일, 이번 사태와 관련된 청와대와 외교부의 당국자들은 대부분 출근해 이에 대한 수습책을 논의했습니다. 외교채널을 통해 미국에 관련 부분을 해명하는 한편, 적절한 해결책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외교부는 논란을 진정시키기 위한 논리를 마련하느라 급박하게 움직였습니다.
3월2일 오전 7시30분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가 열렸습니다. 임동원 국정원장, 이정빈 외교부 장관, 박재규 통일부 장관, 조성태 국방장관 등 정부 내 외교안보팀이 모인 가운데, 대책을 집중적으로 논의했습니다.
그 후, 이정빈 외교부 장관과 청와대의 고위 관계자가 이날 오후 각각 기자들을 만나 부시가 추진하는 국가미사일방어(NMD)체제에 대한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들은 NMD체제에 대한 ‘지지’, ‘반대’ 를 명시적으로 표명하지 않은 채 “미국의 입장을 호의적으로 이해한다”는 정부 입장을 피력했습니다.
이정빈 장관은 “미국이 NMD계획에 대한 구체적 입장을 아직 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 정부가 반대나 찬성의 입장을 취할 수 없다”는 전제하에 “미국은 동맹국 및 관련국가들과 긴밀한 협조를 통해서 (NMD계획) 문제에 대처해 나가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청와대의 고위 관계자는 “NMD에 대한 우리 정부의 입장이 ‘반대’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고 했습니다.
이 장관은 NMD에 관한 정부 입장에 대해 ①세계 안보상황은 새로운 접근을 필요로 한다②우리는 새로운 접근 방법을 추구하고 발전시키는 데 있어 부시 대통령의 지도력을 신뢰한다 ③미국 정부가 국제평화·안전 증진하는 방향으로 동맹국 및 관련 국가들과 충분한 협의를 통해 이 문제에 대처해 가기를 바란다는 3개 항의 입장을 아울러 발표했습니다.
또 지난 2월 상공회의소 초청연설에서 NMD체제에 대해 부정적으로 해석될 수 있었던 발언을 “개인적인 입장을 밝힌 것”이라며 사실상 취소했습니다. 이 장관은 당시 “미국이 NMD를 강력히 추진하는것 보다는 이같은 원인제공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더 빠르고 쉬운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반 차관이 미국을 잘 안다고 해서 시켰는데...”
이런 준비과정을 거쳐 3월 7일 워싱턴 DC에서 한미 정상회담이 열렸습니다. 이 회담에서 DJ는 ABM 문제에 대해 사과하며 부시를 설득해 햇볕정책을 받아들이게 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부시는 강하게 이를 거부했습니다.
당시 DJ를 수행한 이정빈 장관은 백악관의 한미 정상회담장 좌석 배치부터 이상했다고 회고합니다. “부시 대통령이 한 가운데 앉고 미국의 주요 인사들이 좌우에 포진했는데,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구석에 앉아 있었다. 국무장관이 구석에 앉다니…. 뭔가 이상했다. 회의를 시작하자마자 부시 대통령이 파월 장관에게 눈짓하니 그가 밖으로 나가버렸다. 왜 그런가 의아했는데 회담이 열리고 있을 때 백악관 기자들에게 자신이 전날 했던 ‘클린턴 전 정권의 대북접근법 계승’ 발언을 부인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파월은 그 전날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계승하겠다고 했다가 부시 W 대통령이 격노하자 입장을 바꾼 겁니다.
그 장면 하나로 한미정상회담의 성패는 결정이 났습니다. 부시는 기자회견장에서 DJ를 ‘디스 맨(this man)’으로 지칭, 논란이 일기도 했습니다. 부시는 DJ의 햇볕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자신을 반대하고 푸틴과 손을 잡는 듯한 ‘한·러 ABM공동성명’이 나오니 더욱 반감을 가졌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DJ는 훗날 자서전에 참담했던 자신의 심경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나중에 외교부 장관이 된 A씨는 “귀국 비행기에서 김 대통령의 침울했던 표정을 잊을 수 없다”고 회고했습니다. 김 대통령은 미국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외교부 수뇌부 교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DJ는 이 장관에게 “반기문 차관이 미국을 잘 안다고 해서 차관을 시켰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 라며 불편한 심경을 토로했습니다. 사실은 반 차관뿐만 아니라 이 장관을 경질하겠다는 뜻을 내비친 겁니다.
◇외교정책실·북미국·조약국 “ABM 표현 문제 없다”
그러면 어떻게 2001년 한러 정상회담 공동성명에 ABM조약을 유지하는 내용이 포함돼 한미관계에 태풍을 불러 일으키게 됐을까요? 문제의 공동성명 문안이 확정된 것은 푸틴이 방한하기 이틀 전인 2월24일 토요일이었습니다. 우리 정부는 2001년 1월부터 러시아 정부와 공동성명 문안 작성에 들어간 후, 푸틴 방한을 이틀 앞두고 공동성명에 합의했습니다. 보통 정상회담 공동성명 문서는 1~2페이지에 불과하나, 한·러 공동성명은 10페이지가 넘었습니다.
당시 외교부 내에서는 문제의 문장이 포함되어도 좋은지를 두고, 내부 논의가 있었습니다.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실이 이에 대한 재검토를 요청하고, 러시아를 담당하는 구주국에서 미국을 담당하는 북미국과 조약국 등에 이에 대해 질의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논의 군축·비확산을 담당하는 외교정책실에서 문제가 없다는 최종 판단을 내리자 구주국은 이를 수용하기로 했습니다. 이에 따라 문제의 성명은 2월 26일 월요일 반기문 차관, 이정빈 장관을 거치는 과정에서 걸러지지 않은 채 통과돼 버렸습니다.
외교부는 2000년 미국이 참석한 오키나와 G8 회의에서도 같은 문장이 포함된 성명이 통과됐고, 부시가 추진하는 NMD 체제 반대가 아닌 가치중립적 표현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2001년 3월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이 이에 대해 유감을 표명, 외교부가 사안을 잘못 처리한 것으로 결론났습니다. 김 대통령은 한·미 정상회담을 마친 후 귀국, “내가 이 문제로 미국 측에 얼마나 많이 사과를 해야 했는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ABM 사건은 당시 서울대 백진현 교수의 지적대로 “미국이나 러시아 양국 모두에 신뢰를 주지 못한 일”로 기록됐습니다. 또, 정부의 공식해명과는 달리 우리 정부가 ‘러시아 카드’를 이용, 미국을 견제하고 독자적인 대북정책을 가속하려 했다는 의혹이 계속됐습니다. 한 전문가가 익명으로 한 평가는 이 문제에 대한 핵심을 짚고 있습니다. “김대중 정부가 NMD체제 문제의 중요성을 모른 채 한러 공동성명을 냈다면 직무유기이고, 알고도 그렇게 했다면 미국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외교적 미숙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반기문 차관, 외교부 자성론 제기
결국 반기문 차관은 2001년 3월7일 외교부 전 직원이 참석하는 비공개 조회를 소집, ‘외교부 자성론(自省論)’을 제기했습니다. “한러 공동성명에 언급된 ABM조약 관련 문구는 국제사회에서 통용되는 것이었으나, 외교부가 국제사회의 상황변화에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다는 지적이 있다. (NMD체제 관련) 좋지 않은 결과가 나와 국민에게 누를 끼친 데 대해 반성해야 한다.”
그는 또, “외교부는 상하(上下) 의 의견이나 명령은 잘 전달되나 횡적인 논의나 정보 공유가 잘 되지 않고 있다. 앞으로 각 부서간의 협조를 긴밀히 하고, 다른 부처와의 관계에도 신경을 기울여 달라”고 말했습니다. 이날 직원 조회에 참석했던 외교부 직원들은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국을 자극하는 듯한 일이 발생한 데 대해 미국통인 반 차관이 도의적인 책임을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다음 회에 계속>
P.S.
1. 당시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정빈 장관은 ABM 사건 처리 방식에 대해 다른 입장을 갖고 있었습니다. 미국에 그 과정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해야 하는 사안일 뿐, 사과할만한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한러 정상회담에 포함된 ABM 관련 내용은 G8 정상회의에서 사용한 표현이고, 러시아와 다른 국가와의 정상회담에서도 들어가 있으므로 문제 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었는데, 대북 화해정책을 추진 중인 김 대통령이 부시 행정부의 지지를 얻기 위해 사과했다”는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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