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혁명은 가능한가?
20세기 후반 신자유주의가 등장한 이후 자본주의는 심각한 갈등과 파괴를 초래했다. 자본주의가 삶의 토대인 땅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는 일에 집중한다면 신자유주의는 가족시스템을 포함한 모든 공동체로부터 개인을 분리해낸다. 세계 어디에서나 공동체는 무너져내리고 있다. 모두가 모두를 혐오하고 두려워하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철학자 한병철은 이런 상황의 부당함을 논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이 시스템이 많은 비난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왜 강고하게 유지되는 것인지를 질문한다. "왜 저항들은 모두 이토록 빠르게 물거품으로 돌아갈까? 부자와 빈자의 격차가 점점 더 커짐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혁명은 어찌하여 더는 불가능할까?"(<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한병철 지음, 전대호 옮김, 김영사 펴냄) 책은 혁명의 불가능성을 탐구한다.
새로운 체제의 도입에는 시스템을 강제하는 설정권력이 필수적이다. 이 권력은 곧잘 폭력을 수반한다. 대처는 탄광노동자를, 레이건은 항공관제사를 폭력적으로 탄압함으로써 신자유주의를 도입할 수 있었다. 설정권력만이 폭력을 동반하는 것은 아니다. 체제도입 이후 유지권력도 산업사회에서 폭력적, 억압적이었다. 공장에서의 착취는 일상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출구는 존재했다. "공장노동자는 공장소유자에게 야만적으로 착취당했다. 공장노동자들에 대한 폭력적인 타자착취는 저항과 반발을 일으켰다. 이 경우에는 지배적 생산관계를 뒤엎을 혁명이 가능했다. 이런 억압체제에서는 억압도 억압자도 눈에 띈다. 구체적인 상대가 있고, 저항해야할 가시적인 적이 있다."(인용 미기재 시 본서 인용) 공장에서는 대규모 노동자를 통제하기 위해 규율권력이 행사되었다. 신자유주의 지배체제는 산업사회와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된다. "신자유주의 지배체제는 구조가 전혀 다르다. 이 체제에서 체제유지권력은 더는 억압적이지 않고 유혹적이다. 그 권력은 규율 체제에서도 확연히 눈에 띄지 않는다. 구체적인 상대도, 자유를 억압하는 적도, 맞서 저항하는 것이 가능한 적도 더는 없다."
신자유주의체제에서 노동자는 스스로를 억압받는 노동자로 인식하지 않는다. 노동자가 아니기에 노동자로서의 저항은 소멸된다. "신자유주의는 억압당하는 노동자를 자유로운 경영자로, 자기 자신을 부리는 경영자로 만든다. 지금은 누구나 경영자인 자신에게 고용되어 자신을 착취하는 노동자다. 누구나 주인인 동시에 노예다. 계급투쟁도 자신과의 내적 투쟁으로 바뀐다. 오늘날 실패하는 사람은 자책하고 부끄러워한다."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노동자들로부터 노동자성을 앗아갔을까? 한병철은 권력행사방식이 규율권력에서 매혹과 매력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규율권력은 비효율적이다. 훨씬 더 효율적인 것은 사람들을 자발적으로 지배맥락에 예속하게 하는 기술이다. 이 기술은 금지와 박탈을 통해서가 아니라 마음에 듦과 이루어짐을 통해 작동하기 때문에 특별히 효율적이다."
시민들은 '자유롭게' 자유롭지 않은 체제에 철저히 예속된다. 한병철의 말이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대단히 안정적이며 어떤 저항에도 끄떡없는데, 왜냐하면 이 체제는 자유를 억압하는 대신에 이용하기 때문이다. 자유에 대한 억압은 곧바로 저항을 부추긴다. 반면에 자유에 대한 착취는 그렇지 않다." 한병철은 한국의 현실을 이렇게 설명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저항이 거의 없다, 오히려 우울과 소진(burnout)을 동반한 순응주의와 합의가 대세다. 현재 대한민국의 자살률은 세계 최고다. 사람들은 사회를 바꾸려 하는 대신에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혁명으로 이어질만한, 바깥을 향한 공격은 자기 공격에 밀려난다." 자유로운 세상에서 실패는 오롯이 자신의 몫이다. 사람들은 함께 저항하는 대신 각자 자살해버린다. 한병철은 단언한다. "혁명을 일으킬 다중(multitude)은 없다."
마르크스주의로는 신자유주의를 충분히 설명해낼 수 없다. 한병철은 프로이트의 '죽음충동' 개념을 들고 온다. 프로이트는 인간에게는 삶의 에너지인 에로스와 죽음을 향하는 공격적 에너지인 타나토스가 있다고 생각했다. 생생하게 살아있으려는 충동과 무생물로 돌아가려는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충동이 인간에게는 동시에 존재한다. 죽음충동에 사로잡힌 채 성장에만 집착하는 신자유주의를 한병철은 이렇게 묘사한다. "오늘날 우리가 이야기하는 성장은 실은 암 덩어리들의 목표없는 번성이다. 지금 우리는 죽음 도취를 방불케 하는 생산 및 성장 도취를 체험하고 있다. 그 도취는 생기인 척하면서 다가오는 치명적 파국을 은폐한다. 생산은 점점 더 파괴를 닮아간다. 인류의 자기소외는 어쩌면 인류가 자기파괴를 미적 향유로 체험하게 되는 수준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오늘날 신자유주의가 보여주는 모습은 전근대를 뚫고나오던 활발발한 시절의 자본주의와는 몹시 다르다. 어딘가 병적이고 자기파괴적이다. 신자유주의는 삶의 충동인 에로스가 아니라 죽음충동인 타나토스에 기대어 성장중이다.
프랑스 경제학자 베르나르 마리스는 논문 <자본주의와 죽음충동>에서 이렇게 말한다. "파괴적인 힘들을, 죽음충동을 한쪽으로 이끌어 성장을 향하도록 방향을 트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의 대단한 술수다." 프로이트의 죽음충동의 토대는 순전히 생물학적인 것이었다. 생명 없는 물질 안에서 생명이 생겨났다.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에 엄청난 긴장이 발생한다. 생명은 그때 발생한 긴장을 완화하려는 정향을 갖고 살아간다. 생명없던 시원으로의 회귀충동 이것이 죽음충동이다. 그런데 자본주의를 죽음충동으로 연결하려는 생각은 우리의 직관과 어긋난다. 살아있는 자만이 생산하고 소비하는 것이다. 마리스의 분석이 불충분하다고 생각한 한병철은 다시 질문한다. "죽음충동은 파괴적 자본주의를 설명하는데 적합한가?" "무엇이 자본주의를 이토록 파괴적으로 만드는 비합리적 성장강제를 유발할까?"
프로이트의 죽음충동만으로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프로이트는 "모든 생물이 죽음에 맞서 싸운다"는 생물세계의 대전제를 무시했다. 한병철은 죽음충동에 대한 자신만의 독특한 관점을 제시한다. 프로이트의 죽음충동은 생명이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긴장을 소멸시키려는 충동이 아니다. 한병철은 이렇게 주장한다. "프로이트의 죽음충동 개념은 궁극적으로 죽음을 몰아내기 위한 무의식적 전략이다." 축적되는 살해능력은 상상 속에서 생존능력으로 간주된다. '돈'을 의미하는 독일어 겔트(Geld)는 원래 동물 희생제의에서 제물을 사는데 사용된 교환수단을 의미했다. 겔트를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은 살해능력을 가진 권력자가 되었다. "축적된 겔트는 그 소유자에게 포식동물의 지위를 부여한다. 축적된 겔트의 소유자는 죽음에 대한 면역력을 얻는다. 축적된 살해능력이, 성장하는 자본자산이 죽음을 밀어낸다는 원시적인 믿음은 심층심리학적 수준에서 유지된다." 죽음충동에 대한 한병철의 탁월한 해석이다.
한병철은 시니컬하다. 뜨거운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의 답은 차갑고 소박하다. "삶과 죽음의 분리를 되돌리고 삶을 다시 죽음에 참여하게 하는 다른 삶꼴이 필수적이다. 모든 정치혁명에 앞서 삶에 죽음을 되돌려주는 의식혁명이 선행해야 한다. 삶은 오로지 죽음과 교류할 때만 생동한다." 죽음은 제거 대상이기보다 동반자가 되어야한다. 탁월한 분석이다. 핵가족이 보편화되면서 사람들은 죽음을 드물게 조우한다. 경조사문화가 있지만 가까운 가족이 아닌 사람들의 사망은 개인에게 실존적 경험으로 체험되지 않는다. 삶을 충실히 살아갈 것을 권면하던 붓다는 늘 죽음을 곁에 두었다. 붓다교단의 수도자들은 화장터에서 버려진 분소의(糞掃衣)를 입고 다녔다. 백골을 떠올리며 명상하는 부정관이 중요한 수행방법이었다. 죽음이 곁에 있어야만 사람은 경건해진다. 이런 경건함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인격신을 배제했던 유교조차 죽음을 연상하게 만드는 제사의례를 중요시했다. 죽음이 곁에 있어야만 삶은 충동에 휩싸이지 않을 단단한 심리적 지반을 갖게 된다.
한병철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도 빼어나다. 그러나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그의 단언은 살짝 아쉽다. 신자유주의 지배체제가 설계한 덫에 걸려 허우적 대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집단서방의 중산층이다. 금융위기와 코로나사태를 거치면서 그들중 상당수가 하층으로 추락하고 있다. 세계체제론자인 월러스틴이 말했듯이 자본주의는 외부세계를 편입시키면서 갈등을 회피해왔다. 21세기 중반이면 외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껏 없었던 일이다. 혁명의 불가능성을 단언하기에는 세상의 변화가 심상치않다. 무너진 중산층계급은 파시즘의 토양이 될 수도 있고 또 다른 세상을 추동하는 지반이 될 수도 있다.
한병철은 '피로사회', '자기착취', '진정성의 공포', '괴로운 공허감' 등의 개념들을 열거한다. 필자의 지적 능력이 부족해서인지 이런 개념들이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조감도가 잘 그려지지 않는다. 필자는 한병철과 달리 '공허감'을 현재 인류가 마주친 가장 큰 도전이라 생각한다. 공허감이란 들판 위에서 여러 개념들이 떠돈다. 개념의 시계열에서 공허감이 가장 앞자리에 와야 할 것 같다. 현대인의 의미매트릭스가 허술해진 것은 ‘근대적 자유’ 때문이다. 공동체주의철학의 대표적 인물 찰스 테일러는 이렇게 말한다.
"근대적 자유란 구시대의 도덕적 지평들로부터의 단절을 통해서 성취된 것이다. 옛날에는 자신을 보다 더 큰 질서의 한 부분으로 간주하였다. 어떤 경우에는 이 큰 질서는 바로 하나의 우주적 질서, 즉 "존재의 거대한 고리"(존재의 대연쇄로 통상번역됨-필자주)를 의미하였다. (중략) 근대적 자유는 이런 질서들에 대한 부정을 통하여 생겨난 것이다."(<불안한 현대사회>(찰스 테일러 지음, 송영배 옮김, 이학사 펴냄)
인간에게 의미를 부여해주던 매트릭스를 벗어나고서야 근대인은 자유를 얻었다. 그리고 공허해졌다. 이 공허감을 충족하기 위해 사람들은 상징적 살해능력인 돈을 죽음충동을 통해서 추구한다. 초점은 공허감의 극복에 맞춰져야 한다. 한병철은 이 지점에서 흐릿하다. 필자가 그리는 개념들의 시계열은 공허감이 존재증명에 대한 강박증 즉 진정성을 유발하고, 진정성은 죽음충동마저도 자원으로 활용한다. 마침내 모두가 자신의 진정성을 호소하는 피로사회로 귀결된다. 우리 모두의 미친듯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나아지지 않는다. 공허감도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다. 사회 전체가 잘못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계몽프로젝트의 최종판본인 사회주의사회에서 횡행했던 개인숭배도 공허감에 대처하기 위한 허술한 시도였다. 필자는 개인숭배를 의미매트릭스를 두텁게 만드는 작업이었다고 생각한다.
필자의 사소한 딴지에도 불구하고 책은 빼어난 철학적 작업물임에 틀림없다. 세계 철학계의 걸출한 스타에게 푹 빠져 더위를 이겨보길 원하는 분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김창훈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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