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내전의 뇌관' 대통령제, 군주제 유산이다

안성호 대전대 석좌교수, 전 한국행정연구원장 2024. 7. 13.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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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과 쏠림이냐, 포용과 분권이냐] 대통령제, 계속 고수해야 하나? ①

한국 정치는 내전 상태다. 정당과 국회는 정파들의 대권 진지로 전락했다. 선거는 집권당의 실정(失政)으로 반대당이 반사이익을 얻는 네거티브 경쟁으로 타락했다. 한국은 OECD 국가 중 갈등과 정치적 양극화가 가장 극심한 나라다. 한국은 자살률과 노인빈곤율이 OECD 국가 중 가장 높고, 합계출산율이 세계에서 가장 낮다. 정치개혁, 헌법개혁, 사법개혁, 연금개혁, 교육개혁 등 중대한 국정 난제는 마냥 방치되고 있다. V-Dem연구소는 2023년 한국을 독재화가 진행된 42개 국가 중 유일한 자유민주국가로 경고했다.

기원전 380년경 플라톤이 정부형태를 탐구한 「국가」에서 심각하게 우려한 “국가 쇠망에 이르는 정치 내전”의 뇌관이 대통령제라는 데 별 이견이 없다. 하지만 총선 이후 정치권과 언론이 내놓은 대통령제 개혁안은 4년 중임 대통령제 일색이다.

그러나 대통령제 개혁방안을 4년 중임제에 국한하는 것은 그동안 국내외 연구성과와 경험을 무시하는 처사다. 현실주의자들은 그래도 다수 국민이 여론조사에서 직선 대통령을 원하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냐고 반문한다. 과연 대통령제는 불가피한 선택인가?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물어본 의견조사 결과에서 대통령제를 선호하는 응답이 많다는 이유로 대통령제 유지를 불가피한 선택으로 간주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2023년 5월 선거제도 공론화 500인회의 결과는 학습과 숙의 및 토론을 거친 공론조사가 여론조사와 얼마나 다른지 분명히 보여주었다. 단 두 주 동안의 공론과정만으로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사전 조사에서 ‘비례대표 의원 수 증가’에 대해 27%에 불과하던 선호율은 공론조사에서 70%로 뛰어올랐다. 이는 대통령제에 대한 국민의 선호가 충분한 학습과 숙의 및 토론이 이루어지는 경우 크게 달라질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일인 수장제의 함정

로버트 그린리프의 ‘일인(一人) 수장제’ 논의는 대통령제의 위험을 일깨운다. 섬기는 리더십을 촉진하려면 권력을 오직 한 사람의 수장에게 집중시키는 피라미드 구조를 ‘동료 중 수석(primus inter pares)’이 이끄는 동료체제로 바꿔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린리프가 지적한 일인 수장제의 함정은 다음과 같다.

피라미드의 정점에 오른 수장은 친근한 동료의 진솔한 도움을 받을 수 없다. 그의 수하에는 오직 뒤틀리고 여과된 정보만을 전달하는 부하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기방어적 전지전능한 신 이미지는 비판과 도전을 원천 봉쇄함으로써 일인 수장의 판단을 왜곡시킨다. 피라미드 정상에 홀로 자리한 수장은 종종 아첨하는 측근의 장막에 가려져 오만한 외톨이의 고독으로 고통받는다.

일인 수장은 이론적으로 결단력 때문에 옹호된다. 그러나 현실의 일인 수장은 흔히 고질적 우유부단함과 의사결정 지체로 조직의 활력과 경쟁력을 파괴한다.

일인 수장의 과중한 업무 부담과 정보 부하는 전략적 사고와 창조적 업무수행을 가로막는다. 권력을 독점하는 일인 수장은 구성원의 자발성과 열정을 고취하는 설득의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구성원의 리더십 훈련 기회를 빼앗아 리더를 고갈시킨다. 분주한 일정에 쫓기는 일인 수장은 숙의 토론하고 소통할 여유 없이 압축된 보고와 비서진이 가공한 정보에 기대어 중대한 사안을 결정한다. 일인 수장은 임기 종료 1∼2년 전부터 후임자를 물색하기 시작하면서 레임덕 함정에 빠진다. 통제와 명령으로 지배하는 일인 수장은 사회 전반에 피라미드의 정상을 차지하려는 권력 추구자들의 권력투쟁 문화를 부추긴다.

대통령제의 위험성

예일대학의 후앙 린쯔가 삼십여 년 전 제기한 “대통령제의 위험성”은 트럼프 행정부의 등장으로 미국에서도 예외가 아님이 확인되었다. 최근 대통령제와 준내각제(준내각제)를 비교 연구한 슈테펜 강호프는 대통령제의 위험성이 한 명의 불완전한 인간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막대한 권력을 집중시키는 “행정부 일인주의(executive personalism)”에서 비롯된다고 강조한다. 이들이 지적한 대통령제의 함정은 다음과 같다.

대통령제에서 대통령과 의회 간 정통성 다툼은 종종 정치를 교착상태에 빠뜨리고 체제 불안을 조장한다. 특히 여소야대의 분점정부 상황에서 정치는 마비된다. 권력에 굶주린 군부나 검찰은 이 틈새를 비집고 국가권력을 탈취해 전횡을 일삼는다.

정치적 다원주의를 거부하는 대통령제는 반(反)정당주의적이고, 반(反)의회주의적이다. 대통령은 종종 자신의 득표율을 상회하는 권력과 사명의식으로 정당을 비난하고 국회를 혐오한다. 대통령제에서 정당과 국회는 통상 불신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대통령의 고정된 임기는 대통령의 실정과 폭주를 견제하기 어렵게 만들고, 이로 인해 종종 탄핵 갈등으로 체제위기를 겪는다. 대통령 단임제나 연임 제한은 임기 중 이룩한 국정성과에 대한 보상이나 문책을 어렵게 만든다. 대통령의 재선이 허용되는 경우에도 대통령의 정치적 실정과 폭주에 대한 책임을 물으려면 임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장기독재를 막으려고 도입한 대통령 중임제한은 국정운영의 경험과 경륜 축적, 정책의 일관성 유지, 그리고 장기적 관점에서 국정 난제를 해결하기 어렵게 만든다. 4년 중임 대통령제 개헌안도 이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

승자독식의 대통령선거는 흔히 승자와 패자 간 적개감과 극심한 갈등을 일으키고 국민분열을 조장한다. 권력을 독점한 승자와 그로부터 소외된 패자 사이에 사생결단의 암투가 벌어진다. 경쟁은 비난게임으로 타락하고, 협치는 공염불에 불과하다.

대통령선거는 종종 이미지 조작과 대중선동으로 정당 경험과 정치 경륜이 매우 짧거나 없는 문외한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킨다. 문외한 대통령은 종종 여당을 사당화하고 야당을 적대시하며 폭정을 자행한다. 대통령제 정부는 강력한 리더십과 안정된 정부를 보장하지만, 내각제 정부는 그렇지 못하다는 통념이 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인 경우가 많다. 대통령은 여소야대 상황에서 국민의 지지율까지 떨어지면 레임덕으로 전락하고 때로는 독재자로 돌변한다. 대통령제의 비대한 비서실은 장관의 역량 발휘를 가로막는다. 대통령제의 장관은 임기가 매우 짧을뿐더러 임기 중에 터득한 경험도 다음 정부로 이어져 축적되지 않는다. 여기에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정책 뒤집기를 반복하면, 정부 신뢰도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직선 대통령이 더 민주적’이라는 통념이 있다. 이 통념은 대통령의 직접 선출이 민주적 정당성을 보장한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이 가정은 일관된 경험적 지지를 얻지 못했다. 민주적 정당성은 절차의 특징(직선)이 아니라 그 절차가 정치체제 전반에 미치는 효과에 의해 결정된다. 대통령 권력은 흔히 정당과 정치의 대통령제화를 초래하고, 국회를 대권 쟁취의 전초기지로 변질시킨다. 그리하여 진영 간에 사생결단의 망국적 공직 쟁탈전이 벌어진다.

대통령제는 군주제의 유산

혹자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문제를 감사원 등의 소속을 국회로 이관하고 연방적 지방분권을 추진하면 대통령의 전횡을 막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물론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줄이고 강력한 지방분권을 추진하면 대통령제의 위험성은 다소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설혹 이런 고난도의 분권화 개혁이 성공할지라도, 대통령제 위험의 근원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나라 감사원보다 더 큰 권한을 갖는 미국 연방회계감사원(GAO)은 연방의회 소속이다. 미국은 강력한 지역대표형 상원을 갖고 있다. 예산편성권은 연방의회의 권한이다. 미국 대통령은 심지어 법률안제출권과 개헌발의권도 없다. 이런 미국에서 닉슨 행정부 때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졌다. 트럼프 집권 이후 미국은 그동안 간신히 지켜온 ‘대통령제 위험 예외국가’라는 명성마저 상실했다.

대통령제는 아직 모든 나라가 왕에 의해 지배되던 1787년 미국 제헌의회 참여자들에 의해 창안되었다. 이들은 뛰어난 재능과 덕성을 갖춘 인물들이었으나 향후 진행될 정부의 변화를 충분히 예견하지 못했고, 공화국 헌법에 관한 지식도 충분치 못했다. 이들이 고안한 공화국 행정부는 선출된 왕, 곧 대통령이었다.

대통령제는 군주제의 유산이다. 기원전 11세기 사무엘은 왕을 세워달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결국 “너희가 그의 노예가 될 것”이라고 엄중히 경고했다. 그동안 미국을 모방해 대통령제를 채택한 국가들은 거의 모두 독재화와 체제위기를 겪었다. 트럼프가 정계에 등장하기 십여 년 전 아직 미국이 ‘대통령제 위험 예외국가’로 인정받던 때 로버트 달은 대통령제 확산의 안타까움을 이렇게 에둘러 표현했다. “만일 미국 제헌회의가 30년 뒤 소집되었다면 내각제가 채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당시 입헌군주국인 영국에서 권력이 왕에게서 총리와 내각으로 빠르게 이동하는 현상을 간파하지 못했다. 영국의 내각제는 1810년경에 자리를 잡았다.

▲용산 대통령실 전경. ⓒ연합뉴스

(이 연재는 공공선 거버넌스(원장 강치원)에서 기획한 것입니다. 편집자)

[안성호 대전대 석좌교수, 전 한국행정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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