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한 대화의 시작 ‘그르륵갉’[언어의 업데이트]
계절은 빛으로 물든다. 연둣빛 봄, 주황빛 가을, 하얀빛 겨울. 그러나 여름만큼은 시각적 자극보다 청각적 자극이 더 선명하다. 높은 습도가 소리에 울림을 만들고 여름의 소리들은 그 울림을 타고 마음까지 울렁이게 한다. 쩌렁쩌렁 매미 소리, 장맛비가 창문과 바닥을 때리는 소리, 여름 바람이 나뭇잎을 쓰다듬는 소리, 파도 소리와 모래 밟는 소리… 그리고 카페도 술집도 모두 닫은 늦은 밤, 편의점 의자에 앉아 맥주 캔을 따고, 플라스틱 의자를 ‘그르륵갉’ 끌면서 시작되는 나지막한 목소리.
‘그르륵갉’은 편의점 앞 테이블에서 진지한 대화를 위해 상대방 쪽으로 의자를 조금 더 끌어당길 때 나는 소리로 ‘편의점 의자’이자 ‘진지한 대화’를 뜻한다. 앉기만 하면 나도 모르게 고민과 비밀을 털어놓게 된다는 ‘진실의 의자’로 불리던 편의점 의자가 ‘그르륵갉’이란 예명과 함께 ‘대화’라는 새로운 차원으로 의미를 확장했다. “우리 ‘그르륵갉’ 할까?”는 “우리 진지한 대화 할까?”를 뜻한다.
‘그르륵갉’은 일상 속 평범한 사물이 사실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양혜규 작가는 <평상의 조건>(2001)에서 거리에서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든 동네의 ‘평상’을 사진으로 남겼다. 이 작업은 우리가 흔히 마주하는 사물이 특정한 삶의 방식을 품고 있음을 보여준다. 작가에게 평상은 안과 밖을 연결하고 사람을 모아 이야기를 나누게 하는 포터블 한 마루다. 오늘날 ‘그르륵갉’ 소리를 내며 진지한 대화를 소환하는 편의점 의자는 현대인에게 ‘대화’와 ‘의자’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상징물이다.
지금 최첨단 기술은 ‘대화’를 주목한다. AI가 일상 기술로 스며든 데에는 CHAT GPT가 ‘CHAT 대화’의 방식으로 서비스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소통은 온라인상에서 이루어지고, 가전 기기가 ‘AI 공감 지능’을 탑재한 시대. 하루 중 가장 많은 대화를 디바이스와 나누는 게 낯설지 않은 시대지만, 인공이나 온라인으로 대체될 수 없는 대화와 공감의 질감이 있다.
장소는 대화의 맥락을 만든다. 막차를 기다리는 버스정류장에서 나누는 이야기, 회사 옥상에서 동료와 나누는 이야기가 각별한 이유는 공간이 주는 장소적 뉘앙스 때문이다. ‘진지한’ 대화를 위해서는 끄덕거림, 눈 맞춤, 웃음소리가 필요한데 ‘그르륵갉’은 그걸 가능하게 하는 가장 최소한의 조건이자, 가장 최적의 환경을 제공한다.
‘의자’는 그 자체로 장소성을 지니는, 인간의 몸에 가까이 밀착해 있는 매력적 가구다. 우리가 주로 앉아 있는 의자가 우리 일상 풍경을 결정한다. 학생과 사무직 노동자에게 의자는 그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장소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보내는 특별한 순간에도 의자가 항상 함께한다. 비행기 좌석, 운동경기장 벤치, 콘서트장 의자는 비일상의 상징이다. 일상 속 풍경처럼 느껴지는 편의점 의자가 ‘그르륵갉’이 되는 순간 우리는 단숨에 ‘일상’에서 ‘비일상’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 의자에서 나눈 대화는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다. 편의점에서 새어 나오는 형광등 조명, 텅 빈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 소리, 반쯤 들뜬 상태로 오로지 내 이야기에 집중하는 상대를 마주하고 나누었던 대화는 ‘이야기’가 아닌 ‘감각’으로 기억에 남는다. 매끈한 소통은 넘쳐나지만 진지한 대화는 턱없이 부족한 요즘, 우리가 가장 매만지고 싶은 질감의 대화는 ‘그르륵갉’이다.
■정유라
2015년부터 빅데이터로 라이프스타일과 트렌드를 분석하는 일을 해오고 있다. <넥스트밸류>(공저), <말의 트렌드>(2022)를 썼다.
정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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