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라 국민의 정신병은 ‘이것’에서 오는가…50년간 잠들었던 거인의 책 [나쁜 책]
책 제목은 ‘지성과 반(反)지성’. 한 글자씩 눌러쓴 18편 글을 묶은 350쪽 분량의 산문집이었는데, 첫 출간 땐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을 국가에 납본(納本·신간서적 의무제출 제도)했을 때, 이 책은 금서로 지정됐습니다. 책에 담긴 ‘불온성’을 검열당국이 뒤늦게 감지했던 이유였습니다.
‘지성과 반지성’은 약 14년간 아무도 읽지 못하는 금서였습니다. 그리고 50년이 흐른 지금, 이 책에 ‘반지성주의’는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언급됐고, 반지성주의를 다룬 신간이 출간되는 등 한국사회를 설명하는 하나의 단어가 됩니다.
그 시작점에 명저 ‘지성과 반지성’이 자리합니다. 여전히 생명력이 약동하는 문장이 가득한 이 책은 어떤 책이었을까요. 오늘은 그 이야기를 나눠보려 합니다.
한국 문학출판계의 거성이 된 잡지로는 ‘문학과 지성(문지)’이 대표적입니다. 1970년 첫 창간 당시 멤버는 4명이었는데, 이들은 ‘4K(포케이)’로 불립니다(전부 ‘김 씨’ 성이었거든요). 김현 서울대 불문과 교수, 김치수 이화여대 불문과 교수, 김주연 숙명여대 독문과 교수, 김병익 동아일보 기자였습니다.
사이비 지식인, 어용 지식인을 비판하는 칼날 같은 문장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저자 김병익은 아래의 명문으로 시대를 해석합니다. 첫 문장부터 읽어볼까요.
◎ “우리의 이 시대는 고민이 없다. 우리의 이 사회는 고민을 용납하지도 않으며 고민에 투신하기보다 그로부터 가능한 멀리 회피하기를 요구한다. 우리의 이 풍토는 고민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며 무엇을 고민하는가에 대해 고백하지 않으며 왜 고민해야 할 것인가에 관해 설명하지 않는다. 우리는 무념(無念)하기를 요구하는 세계 속에 살고 있다. 니체의 이른 바 ‘피로 쓴 글’은 조소와 함께 내동댕이쳐진다.” (44~45쪽)
그러나 큰 인기를 얻은 이 책이 증쇄 후 3쇄(세 번째 인쇄)를 찍고 국가에 납본됐을 때, 뒤늦게 금서 조치가 내려집니다. 1쇄, 2쇄까지만 해도 담당 검열관이 이 책에 담긴 내용을 꼼꼼히 확인하지 못했거나, 이 책의 진의를 해석하지 못할 만큼 무지(無知)했기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다 문민정부가 들어섰던 1990년대에 해금(금서 조치 해제)되는데, 그 사이 대학생들이 암암리에 돌려보며 읽는 ‘전설의 책’ 중 한 권으로 남았습니다.
‘어용교수, 어용문인, 어용예술가, 어용학자, 어용언론인’이 바로 그들이었지요. 저자 김병익의 눈에 잘 나가는 지식인들은 그야말로 반(反)지성의 표본들이었습니다. 출세를 위해선 아무것도 비판하지 않는, 그런 무지성의 세상이 저자 김병익 평론가의 비판 지점이었습니다.
책에는 다섯 가지 실제 사례가 거론되는데, 저자 김병익 평론가가 시대로부터 채집했던 반지성주의의 추악한 현실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① 1971년 4월, 한 양극화 세미나 현장. 양극화 토론이 무르익으며 책임의 화살이 정부로 향했을 때, 전직 교수 C씨가 이런 요지로 발언했습니다. “비판하고 잘못을 지적하는 고민은 어렵지 않지만, 우리의 결정은 국가에 중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혹독한 비판보다 건설적인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지금으로 치면 귀족의 모자를 쓴 ‘폴리페서(polifessor)’가 진중한 이야기를 하는 학자들을 향해 “정부를 비판하지 말라”는 위험한 발언을 단상에서 내뱉은 것이었습니다.
② 이에 앞서 1971년 2월, 한 신문사의 논설위원은 신문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당시 엄혹했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그 논설위원은 ‘언론의 미래’에 대해 낙관적인 태도를 견지했는데, 그는 “어느 경우에나 국가 이익을 경시할 순 없습니다. 언론에 설사 그런 자유가 주어졌다고 해서 우리의 언론이 그걸 남용할 까닭은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언론사의 ‘요직’을 차지하고 앉았으면서 언론 자유를 제한하는, 앞뒤가 맞지 않는 망발이었습니다.
책의 비판은 이처럼 날것 그대로를 보여주면서, 그러나 품위 있는 어조로 계속됩니다.
◎ “이 담시(譚詩·‘오적’을 지칭)는 광가광언(狂歌狂言·미친 소리)이라고 생각되며… (김지하는) 함부로 붓재주를 놀리는 피해의식과 과대망상에 젖은 노이로제 환자였다고 ‘한다’. 그 작자는 무당의 불이 내렸거나 귀신잡기에 흘린 정신의 소유자….” (작은 따옴표는 인용자 주)
반공 혐의의 진위 여부를 떠나서, 신문의 논설위원이 ‘~카더라’의 화법을 쓴 것이지요. 저자 김병익은 황당한 심정으로 저 사설에 일침을 가합니다.
◎ “문제는 이 사설 필자의 의식수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광언광설’이 소위 유수의 신문을 통해 발표되는, 억지가 횡행하는 사회, 우리의 경우 최고의 지식계층으로 평점되고 있는 신문의 놀랄 만한 우직에 있는 것이다….”
그 견고함은, 그가 보여주는 사상과 논리의 단단함에서 옵니다.
우선 이 책은 지식과 지성을 구분합니다. 지식과 지성은 겉으로 보기엔 구분이 어려운 일란성 쌍둥이처럼 보이지만, 저자의 눈에 둘은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 “지식은, 목표를 이루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회의적 사고는 재빨리 팽개쳐 버린다. 반면 지성은, 비판적이고 창조적이며 정신의 명상적 측면이다. 지식이 포착하고 조작하며 재정리하고 조정한다면, 지성은 음미하고 사색하며 회의하고 논리화하며 비판하고 상상한다.”
현실의 수면 아래로 잠수해 지(知)의 뿌리를 캐내려는 저자 김병익 평론가의 문장은 50년이 흘렀음에도 아직 유효합니다.
실용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지식인은 지성과 사유를 멀리하기 때문인데, 이때 지식인은 지식인이 아니라 차라리 ‘지식기능인’에 가깝습니다. 사유없는 지식은 지성의 퇴화로 이어지지요.
◎ “지성인의 면모를 한 지식인의 이 공작(지성의 퇴화)은 상당히 설득력 있고 교묘하게 조작되며 소리 없이 침윤한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정당하게 보이며 전체를 통찰하기에는 아직 부족한 지성인을 격려하는 인상을 주면서 ‘지성의 와해’에 적극적으로 작용한다.”
가짜가 진짜를 몰아내는 굴곡된 인과가 결코 넘을 수 없는 제방을 쌓고 우리 삶을 둘러버렸습니다. 그 풍경은 1970년대뿐만이 아니라 50년이 지난 지금도 별로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저자 김병익도 그러한 사실을 ‘지성과 반지성’에서 첨예한 문장으로 밝혔습니다.)
그 책은, 바로 1963년 집필되어 이듬해 1964년 미국 퓰리처상을 수상한, 리처드 호프스태터의 ‘미국의 반지성주의(원제: Anti-Intellectualism in American Life)’였습니다.
좀 더 깊게 들어가볼까요.
왜냐하면, 에그헷은 1952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상대진영 후보가 많은 지지를 얻고 있다는 말에, 반대 진영 지지자가 “에그헷들은 모두 그(상대 후보)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런 에그헷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냐?”고 말하면서 퍼진 단어였기 때문이었습니다다.
쉽게 말해 에그헷은 ‘잘난 척하는 지성인’을 조롱하는 단어였는데, 상대를 향한 혐오감(반지성주의)이 심각하고도 위험한 국민적 결함임을 호프스태터는 간파했습니다.
호프스태터의 눈에, 1950년대 미국은 이성적 사고가 경시되고 실용성만이 강조됐던 세상이었습니다. 이건 프로테스탄티즘의 영향을 받은 미국식 가치였는데, 이 가치는 이미 세계에서 하나의 표준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 세상에서는 ‘자수성가와 경제적 성공’만이 최고의 가치로 여겨지곤 합니다. 이를 위해 ‘먼 미래’엔 뭔가를 성취해야 한다는 목표의식이 사람들 마음에 깊은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런데 대개 이 과정에서 이른바 ‘젠틀맨들’, 즉 우리 말로 하자면 이성적 사고력을 갖춘 ‘선비’ 계층은 주류 정치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개혁가는 실패하고, 학문적 성취에 매진한 전문가들도 실용이 아니란 이유로 격하됐습니다. 그게 우리가 사는 풍경입니다.
그 결과, 지성인은 대중으로부터 격리되었고 시간이 지나며 존경과 관심은커녕 경멸과 불신의 대상으로 전락했습니다. 지성인은 스스로 소외의 길을 택해야 했는데, 이 때문에 지성의 자리는 반지성으로 대체되었습니다. 리처드 호프스태터의 시대, 저자 김병익 평론가의 시대도, 따지고 보면 모두 괴물의 세상을 살아가는 지성인들이 처한 위치였습니다.
호프스태터의 이 책은 2017년 우리나라 출판사 문학동네의 임프린트 출판사 교유서가에서 번역 출간돼 독서가 어렵지 않습니다. 호프스태터의 이 책 한 문장을 옮겨적어 봅니다.
◎ “내가 ‘반지성적’이라고 일컫는 태도나 사고에 공통되는 감정은 정신적 삶과 그것을 대표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의심이며, 또한 그러한 삶의 가치를 언제나 얕보려는 경향이다.” (25쪽)
‘지성과 반지성’은 1987년에 들어서면서 결국 금서에서 해제됩니다.
리처드 호프스태터의 ‘미국의 반지성주의’가 2017년 출간됐는데, 이는 개정판이 아니라 초역이었습니다. 그만큼 한국에서도 반지성주의가 시대의 화두로 자리를 잡았다는 의미겠지요.
우치다 다쓰루 ‘반지성주의를 말하다: 우리는 왜 퇴행하고 있는가’, 토마스 만 ‘예술과 정치: 반지성주의를 경계하며’, 마이클 셔머 ‘스켑틱: 회의주의자의 사고법’, 이라영 ‘타락한 저항: 지배하는 피해자, 우리 안의 반지성주의’, 모리모토 안리 ‘반지성주의: 미국이 낳은 열병의 정체’, 수전 제이코비 ‘반지성주의 시대: 거짓 문화에 빠진 미국, 건국기에서 트럼프까지’, 강준만 ‘반지성주의 : 우리의 자화상’ 등의 반지성주의 관련 서적이 출간됐습니다(아래 사진 윗줄 왼쪽부터 시계방향).
많은 분들이 기억하시겠지만 윤석열 대통령 취임연설(2022년 5월 10일)에서 ‘반지성주의’란 단어가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여의도와 상아탑만이 아닙니다. 지성의 준거점이어야 할 시민들이 합리와 이성의 자세를 망각하고 있습니다. 상대 진영과 함께 생각을 조합하기는커녕 서로를 폄하하는 일이 보통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반지성’으로 매도하는 일에 익숙합니다. 토론은 진즉에 불가능하고, 자기 진영의 맹신만이 절대적 가치로 남았으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불의까지 포옹하는 일도 당연시됩니다. 호프스태터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서로가 서로에게 ‘에그헷’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한국의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 in Korean Life)’가 아니고 무엇일까요. 우리가 지금 보고 있고 듣고 있는 균열의 비명은, 반지성주의가 전(全) 사회의 상석에 앉아 만들어낸 열매에 가깝다는 생각이 드는 건 저뿐일까요.
책 ‘지성과 반지성’은 저 상석에서 우리를 느긋하게 바라보는, 반지성주의의 주체가 과연 누구인지를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 [나쁜 책, 시즌2]를 기다려주신 분들께 송구한 마음 전합니다. 업무로 바빠서, 또 심적으로 지쳐서 ‘매주 연재’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내내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고개 숙여 사과드립니다.
아울러 한 가지 더 드리고자 하는 아쉬운 말씀은, [나쁜 책] 연재는 이번 회차로 종료합니다. 작년 7월 15일 옌롄커 ‘딩씨 마을의 꿈’ 편을 시작으로 꼭 1년이 지났습니다. 관성에 젖은 글쓰기 대신에 스스로를 갱신하고 확장하여, 새롭고 신선한 주제로 찾아뵙는 것이 낫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짧고도 길었던 여정에 동행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좋은 문학이란 불안한 현실의 첨예한 모순을 빼어난 상징과 은유로 고발하면서, 동시에 소설 그 자체만으로도 인간의 숙명을 압축하는 글이 아니던가요. 한 시대를 작동시키는 정신의 심장을 차가운 메스로 도려내면서, 모든 시대에 살갗에 접촉하며 불에 덴 듯한 뜨거움을 주는 문학이야말로 참된 문학일 것입니다.” (『나쁜 책』, 글항아리,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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