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랩] '가브리엘', 타인의 삶에서도 빛난 박보검의 퍼스널리티
[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배우는 매 작품마다 캐릭터라는 가면을 쓴다. 감독이나 작가나 디자인한 가면을 쓴 배우는 타인의 삶을 연기하며 대중과 교감한다. '나'를 지우고 '캐릭터'로 사는 것, 이건 배우의 숙명이다. 이 역할극을 영화나 드라마가 아닌 예능 프로그램에서 볼 기회가 생겼다. JTBC에서 방영되고 있는 '마이 네임 이즈 가브리엘'(이하 '가브리엘')이다.
'가브리엘'은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세계 80억 인구 중 한 명의 이름으로 72시간 동안 '실제 그 사람'의 삶을 살아가는 관찰 리얼리티 예능이다.
'그 사람'을 지칭하는 대명사로 '가브리엘'이라는 이름을 쓴 이유는 무엇일까.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사람, 영웅, 힘'이라는 뜻으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등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들에서 주로 하느님의 전령(傳令)으로 전해지는 대천사이다. 종교적 의미 부여라기보다는 성스러운 타인의 고귀한 삶을 체험한다는 의미를 담은 이름으로 해석된다.
방송의 포문을 연 가브리엘은 박보검이었다. 타인의 삶을 연기하는 것이 숙명인 배우이기에 프로그램에 콘셉트에 잘 부합하는 인물처럼 여겨졌다.
박보검은 아일랜드 더블린으로 건너가 합창단 램파츠의 단장 '루리'로 72시간을 살았다. 작품이 아닌 현실에서 누군가의 삶을 빌려 사는 건 흔치 않은 경험이다. 배우라 할지라도 이입과 적응이 쉽지 않은 도전이다.
"그의 삶에 누가 되지 않겠다"는 각오로 임한 박보검은 특유의 친화력과 다정함, 예의와 배려로 '루리'의 삶에 빠르게 침투했고, 젖어들었다.
◆ '지휘자 루리'에도 투영된 박보검의 무해함
더블린으로 날아간 박보검은 프로그램의 콘셉트에 맞게 철저히 '루리'의 삶을 살고자 했다.
프로그램의 장르는 예능이지만 박보검이라는 필터를 거치자 예능이 아닌 다큐멘터리가 됐고, 코미디가 아닌 드라마가 됐다.
그도 그럴 것이 '루리 보검'에게는 자연스레 박보검의 아이덴티티와 퍼스널리티가 투영됐다. '루리 보검'의 72시간을 담은 세 편의 에피소드에서는 '보검인 듯, 보검 아닌, 보검 같은 루리'를 만날 수 있었다.
#1. 램파츠의 연습실. 단장 루리 보검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보면대 앞에 서서 자리한 멤버들을 쭉 둘러봤다. 어딘가 어색해 보인다. 단원들은 루리를 잘 안다는 듯 행동했지만, 루리는 그런 단원들이 낯설기만 하다. 그 어색함과 답답함을 극복하지 못한 루리 보검은 멤버들에게 자기소개를 부탁했다. 루리 보검은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단원들을 하나하나 아이컨택 하며 이름과 얼굴을 익혀나갔다. 낯설지 않은 모습이었다. 지난 6월 '원더랜드' 인터뷰 현장에서 본 그 모습이었다.
박보검은 인터뷰장에 들어선 기자들의 명함을 일일이 챙겼다. 그리고 자신의 탁자 위에 명함을 배열한 뒤 기자들과 눈을 맞춰 인사했다. 과거 한 차례라도 인터뷰를 나눴던 인연이 있는 기자에겐 안부를 물으며 '나는 당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알렸다. 배우가 출석 체크하듯 기자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생경한 풍경이었지만, 무려 5년 만에 나선 언론 인터뷰에서 수년 전 만난 기자의 얼굴을 기억하는 것도 놀랍게 느껴졌다. 스쳐 지나가는 인연일지라도 그 소중함을 아는 사람, 박보검은 그런 인물이었다.
#2. 대망의 성패트릭 데이 버스킹 공연을 앞둔 루리는 마지막 연습에 앞서 램파트 단원들의 출석을 체크했다. 이틀 전의 루리가 아니었다. 그는 48시간 만에 램파츠 단원 24명의 이름을 모두 외웠다. 한 명 한 명의 눈을 바라보며 직접 호명했다. 그 순간에 대해 박보검은 말했다.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는 건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마이 네임 이즈 가브리엘'은 기획 의도는 참신했으나 아쉬움도 적잖은 프로그램이다. 이를테면 대중이 궁금해하는 건 '인간 박보검'이지,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단장 루리 오 달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낯선 기획 앞에서 '과연 시청자들이 보고 싶을 것일까'에 대한 의구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물론 '보통의 삶'이 주는 특별한 감동이 있다. '유 퀴즈 온 더 블록'이나 '틈만 나면'과 같은 일반인 대상 예능이 주는 각본 없는 재미와 감동은 평범한 사람들의 살아내는 비범한 하루에서 출발한다.
'가브리엘'의 애매함은 연예인과 일반인의 삶을 섞는다는 데서 비롯된다. 역할극과 진짜의 삶이 뒤섞일 때 드는 '가짜가 아닌가' 하는 자각은 순도 넘치는 감동을 일부 갉아먹는다. 대중은 누군가의 삶을 대신 사는 '루리 보검'이 아니라 '박보검'이 더 궁금하다.
이 기획의 불완전함을 채우는 것은 결국 인물이었다. 루리의 삶을 빌려, 그의 역할을 대신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인간 박보검'의 퍼스널리티는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재미였다.
◆ "보검 씨, 또 울어요?"…숱한 눈물의 의미
'가브리엘'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박보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몸에 밴 듯한 예의와 배려,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무해한 미소, 인격이 드러나는 정돈된 언어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박보검이었다. 미처 몰랐던 것은 그의 섬세하고 여린 내면이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박보검을 눈물을 여러 번 볼 수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눈물을 보인 건 김태호 PD와의 사전 인터뷰에서였다. '만약 연기자라는 직업을 선택하지 않았다면?'이라는 질문에 그는 눈시울을 붉혔다. 사람의 눈물은 아주 많은 비율로 '사연' 혹은 '사정'으로 해석된다.
늘 웃는 얼굴로 대중에게 '행복 바이러스'를 선사해 온 박보검에게도 '터놓지 못한 이야기가 있겠구나'라는 해석이 가능한 장면이었다. 물론 그는 이 눈물의 의미를 애써 설명하지 않았다. 13년의 연예계 생활을 돌이켜 봤을 때 떠오른 상처와 아픔이 있음을 짐작할 뿐이다. 박보검의 이 눈물은 해사한 미소보다 더 인간적으로 다가왔다.
또 다른 눈물은 루리의 부모님을 만나러 간 에피소드에서 나왔다. 세상에서 '나'라는 사람을 가장 잘 아는 존재가 부모이기에 이 이벤트는 '루리가 된 보검'을 인정받는 자리기도 했다. 그 어떤 자리보다 긴장했던 루리 보검은 은발의 두 노인의 정겨운 미소와 다정한 분위기에 스며들었다. 배우였던 두 사람이 극단에서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했으며, 가정을 이룬 가족의 역사를 들으며 박보검은 웃고 울었다.
가장 뜨거웠던 눈물은 램파츠와 이별하는 순간에 나왔다. 버스킹 공연을 마치고 멤버들과 술잔을 기울이던 박보검은 '마법 같은 순간'을 맞이했다. 팀원들은 '루리 보검'을 위해 즉석 아카펠라 공연을 준비했고, 프랭크 시나트라의 '컴 플라이 위드 미'(Come Fly With Me)를 선사했다. "나와 함께 날아봐요"라는 노랫말에 이르자, 그는 감격에 찬 눈물을 흘렸다.
박보검은 음악의 힘을 아는 사람이다. 어린 시절 한때 가수를 꿈꿨고, 대학에서 뮤지컬학을 전공했으며, 졸업 공연 때 연기가 아닌 음악감독을 맡지 않았던가. 그런 그에게 루리로서의 72시간은 음악의 마법과 인연의 힘 그리고 감정의 교감을 생생하게 체험하는 시간이었을지 모른다.
박보검은 최근 인터뷰에서 자신만의 특별한 능력으로 '공감 능력'을 꼽은 바 있다. 타인의 삶을 체험하고 온 박보검은 루리를 통해 자신을 돌이켜봤다. 그리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결론을 내렸다. 박보검답게.
"누군가가 만약 내 삶을 대신 산다면 '나는 잘 살아왔을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램파츠 단원들이 '루리가 내 인생을 바꿔줬다'라고 했을 때 나를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나(박보검)는 잘 살았나 싶었죠. 저도 루리처럼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인정받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잘 살아 보겠습니다."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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