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익선동 ‘줄행랑’을 아시나요 [청계천 옆 사진관]
안녕하세요. 여러분 줄행랑이라는 말 들어보셨죠? 도망간다는 말을 할 때 ‘줄행랑을 치다’라고 하잖아요. 행랑은 옛날 양반집의 하인들이 먹고 자던 조그만 방을 말하는데요 여기에 ‘줄’을 붙여 길게 이어진 행랑, 그러니까 하인이 아주 많은 부잣집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번 주 백년사진은 1924년 7월 9일자 동아일보 3면에 실린 사진입니다. 양반이 출타할 때 하인들이 끌었을 인력거가 하나 놓여 있습니다. 뒤로 커다란 한옥집이 보입니다. 익선동 줄행랑 사진입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 지난 주 백년사진에 실렸던 “청군 백군 머리띠는 언제 사라졌을까”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240706/125801646/1 에 대해 독자분이 보내 주신 메일이 있어 공유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과거 청백전이고, 일본은 홍백전입니다. 일본은 지금도 모든 게 홍백전입니다. 기원은 아시다시피 건페이 전쟁에서 왔습니다. 그럼 우리 청백전이 조선시대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고, 일제 강점기부터 있었을텐데, 언제부터, 왜 바뀌었는지 제가 알아봤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학교를 다닌 노인분들에게 물었더니 분명한 기억으로 그때는 홍백전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언제인지는 모르는데 해방되고 청백전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그럼 유추할 수 있는 것이 왜색 문화 척결이란 의미에서 바뀌었거나, 반공(反共) 차원에서 적색을 사용 못하게 하려고 흰색으로 바뀌었을 겁니다.“라는 내용입니다. 감사드립니다. 이 독자분의 메일로 인해 새로운 맥락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 이번 주 ‘익선동 줄행랑’ 사진에 대한 기사를 소개하겠습니다. 1924년 6월 25일자부터 1924년 8월 15일자까지 50일간 동아일보에서 연재되었던 “사진기사 – 일백동정(一百洞町) 일백명물(一百名物)” 기사 중 하나입니다. 우리 동네 명물 소개라는 코너입니다.
<익선동 줄행랑
正解者(정해자) 익선동 傍觀生(방관생)씨>
◇익선동에는 별로 명물이랄 것이 없습니다. 내외주점이 많고 밀매 음녀가 어지간하니 이것으로나 명물을 삼을런지? 그러나 내외주점으로는 청진동만 못하고 매음녀로는 내놓코라도 병목정 갈보에야 머리도 못들터이니 이것도 저것도 다 명물감이 못됩니다. 그러니 할 수 없이 행랑 많은 루동궁(樓洞宮)이나 들추어 보려합니다.
“익선동 줄행랑”이라하면 그 동리 사람은 어느 집 행랑인줄 다 안다고 합니다. 이 집은 지금부터 7,80년 전에 철종대왕의 백씨되는 곰배대군의 별명을 듣는 영평군(永平君이 홍판서의 집을 사고 든 때부터 루동궁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는데 지금 주인 조선귀족 후작 리해승 각하는 곰배대왕의 오대손이라고 합니다.
곰배대군의 후손으로 리해승 양반도 한때는 세력이 빨래줄 같았겠지요. 그러나 요새는 조선총독이라는 대감에게 세력을 빼앗기고는 영락하기가 가이 없답니다. 닥쳐오는 운명에야 임금의 형님이든 곰배대군의 후손인들 어찌하겠습니까. 남종 여종이 드나들던 행랑방에는 인연도 없는 뭇사람의 차지한 바가 되었고 오직 빗물이 고여 있는 앞마당에 놓인 인력거 한 채가 그래도 후작댁의 체면을 보존하는 듯합니다.
정해자(正解者)라는 원래 문제나 퀴즈 따위를 제대로 푼 사람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기사를 쓴 시민이라는 의미입니다. 방관생 선생님이라는 분이 이날 신문에서 익선동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근대뉴스(www.19c.co.kr)를 운영하는 송종훈 선생님의 해석으로는 방관생이라는 이름은 실제 이름이 아니고 익명일 수 있습니다. 세상 일에 관여하지 않고 방관(傍觀)하는 서생(書生)이라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익선동에는 술집과 사창가가 있었는데 청진동이나 병목정(지금의 쌍림동 부근이라고 합니다)에 비해 규모가 작아 내세울게 아니라 그나마 스토리를 갖고 있는 ‘익선동 줄행랑’을 소개한다고 운을 떼고 있습니다.
익선동에는 루동궁(樓洞宮)이라고 하는 큰 한옥이 있었는데 이 집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철종의 큰형인 영평군이 살던 집인데 지금은 영평군의 5대 손인 조선귀족 후작 ‘이해승’의 집입니다. 한때 권력을 누렸는데 일본의 조선총독에게 세력을 빼앗기고 보잘 것 없어졌다고 합니다. 행랑채에 있던 하인들도 이제는 다 떠나고 다른 사람들이 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빗물이 고여도 닦을 사람이 없는 인력거 한 대만이 이 한옥집이 옛날 권력자의 집이라는 것을 보여줄 뿐이라는 내용입니다.
전체적인 글의 분위기가 이해승이라고 하는 양반의 쇠락을 비꼬는 듯 합니다. 이해승과 그가 살던 루동궁이란 장소가 어떤 곳인지 좀 더 알아보기 위해 데이터베이스를 찾아보았습니다.
1974년 9월 20일자 동아일보에 “한양도읍 이후 살펴본 동네 명칭의 변화”라는 시리즈에 익선동에 대한 소개가 있습니다.
사실(史実)속의 우리동네- 한양도읍(漢陽都邑)이후 살펴본 동명연혁(洞名沿革)]
<30> 익선洞 - 강화도령(江華道令) 철종(哲宗)때의 ‘익랑골’을 개명(改名)
익선동(益善洞)은 현재 행정동인 종로구 권농동(勸農洞)관할에 속해있는 법정동 이름이다. 익선동은 1914년 일제총독부가 이른바 경성부제(京城府制)를 실시할 때 궁동(宮洞) 익동(益洞)돈 녕동(敦寧洞)의 일원과 니동(泥洞) 한동(漢洞)등의 일부를 합하여 만든 새 동네다.
옛적부터 전해 내려오는 동네이름은 대부분 그렇게 이름을 붙였을만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일부 동네이름은 후세에 와서 지나치게 미화(美化)가 된 나머지당초의 동명(洞名)의미를 상실해버린 경우도 있다. 익선洞이 바로 그와 같은 예다.
익선(益善)이란 글자그대로「더욱 착하다」또는「더욱 잘한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또 옛날 중국의「楚」「漢」시대의 명장 韓信은 漢高祖가『그대는 군사를 얼마나 거느리면 잘싸울수 있겠는가』고 물었을때 자신있게「다다익선(多多益善)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즉『군사가 많을수록 좋다』는 뜻으로 한 명언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익선(益善)洞은 그러한 군사를 잘 쓴다든지 또한 모든 일을 더욱 잘하고 더욱 착하게한다는 등의 의미와는 전혀 관계없이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해진다.
「益善」이란 이름은 이 지역에「익랑골」이라는 동네가있었던데서 비롯됐다고한다.「익랑골」의 유래는 바로 이곳에 李씨조선의 제25대 哲宗의 장형(長兄)인 永平君이 거처하던 누동궁(樓洞宮)이란 궁궐이있어 그 궁궐주위에 익랑(翼廊)、즉 대문 좌우쪽으로 줄행랑이 늘어서 있었던 곳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불려왔다 한다.
李씨 조선 제24대 헌종(憲宗)이 승하(昇遐·임금이 세상을 떠남)한 다음 대를 이을 사자(嗣子)가 없어 全溪君(璜)의 제3대인 속칭「江華道令」으로 왕통을 계승케한 것이 철종왕(哲宗王)인데 그는 친아버지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의 묘(廟)도 이「누동궁」안에 모시고 장형인 영평균(永平君)을 살게 해 그후 永平君의 5대손인 이해승(李海昇)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이 궁에 거주하였다고 한다。
哲宗은 즉위와 함께 이곳에「누동궁」을 지었는데 그는「江華道令」으로 통칭될만큼 왕실의 분쟁이 심한중에 서울에도 있지 못하고 멀리 강화島로 들어가 농부생활을 하는등 고생을 했던터라 같이 고생하던 실형(實兄)을 위하고 또 친부모의 신위(神位)를 모셔 제사도 올릴수있게하기위해「누동궁」을 지었던 것으로 전해온다。
哲宗은 그건문양식도 특별히 공을들여 궁궐대문앞에 동서로 익랑(翼廊)을 광대하게 짓게하고 시종들이 살도록 했는데 그후부터 이지역은「익랑골」이라는 동네이름을 얻게 됐다。
그런데 이러한 연유에서 생긴「익랑골」이라는 동네이름은 어느사이엔가 익랑동(翼廊洞)에서 익동(益洞)으로까지 변천을 했으며 또 부근의 일부 지역은 역시「누동궁」이 있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궁동(宮洞)으로 불려졌다。
그후 일제 총독부가 동네를 폐합、새로운 행정구역을 정할 때 예전보다 더 좋은 이름을 붙인다는 뜻에서 익동(益洞)에 선(善)자 하나를 더 추가해 익선동(益善洞)이라는 새 동명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렇듯 역사적 배경을 지닌 동네이름이 후에 와서 전혀 의미가 다른 이름으로 바뀜에 따라 본래의 역사적 사실은 아득히 망각돼가고 있다는 것이 서운한 점이다。
두 기사를 종합해 보면, 서울 종로구에 있는 익선동이라는 동네 이름은, 행랑이 많아 마치 새의 날개를 펼친 것처럼 보이는 대궐같은 집(누동궁)에서 유래한 익랑이라는 동네 이름에서 ‘랑’이 빠지고 좀 더 좋다는 의미의 선(善)을 넣으면서 익선동으로 변했다는 설명이 가능합니다.
행랑이 많다는 것은 권력과 돈이 많은 누군가의 집이라는 의미인데 100년 전 익선동에 살던 주민의 이야기로는 동네 사람들은 그 집의 주인이 어떻게 변해 왔는지 다 알았다는 설명입니다. 홍판서 →영평군 →리해승(영평군의 5대 손)으로 변했는데 리해승과 관련한 검색을 해보니 “1910년 10월 16일 21세의 나이에 일본 정부로부터 후작(侯爵)작위를 받았고 일본의 통치에 적극 협력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일본 정부에 협조했던 왕족의 추락을 에둘러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줄행랑을 치다’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았습니다. “원래 하인들이 묵는 행랑이 길게 이어진 모습을 표현하는 말로, 도망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게 되었습니다. 이는 행랑이 길게 이어진 모습이 마치 꽁무니를 빼며 도망가는 모양과 비슷해서 생겨난 관용적 표현으로 해석됩니다. 또한, 권세가 있던 양반가가 몰락하면서 줄행랑을 버리고 도망가는 모습에서 유래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라는 설명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줄행랑이라는 표현이 100년 전 시작되었다는 것은 알 수 없지만 이해승의 집과 하인들의 도망과도 관계가 있을 것 같습니다.
검색을 통해 줄행랑을 치다에 대한 다른 해석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조항범 교수(충북대 국문과) 교수는 줄행랑이 갖는 의미를 행랑을 죽 이어서 쌓는 것을 보통 줄행랑을 치다라고 표현하는데 여기서 치다는 벽 따위를 둘러서 세우거나 쌓는다는 의미로 담을 치다와 같은 표현입니다. 텐트를 치다는 표현도 같은 어원일 것 같습니다. 행랑을 길게 치는 것이 줄행랑을 친다는 건데 마치 꽁무니를 뺀 채 줄달음을 치는 것과 비슷한 모양이이서 도망치다 = 줄행랑을 치다 로 관용적 의미가 생겨났다고 추정합니다.”
오늘은 100년 전 서울 익선동에 있던 행랑 사진으로 ‘줄행랑’의 의미를 유추해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점이 보이셨나요? 주말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누구나 스마트폰 카메라로 가족과 풍경을 멋지게 찍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사진이 흔해진 시대에, 우리 사진의 원형을 찾아가 봅니다. 사진기자가 100년 전 신문에 실렸던 흑백사진을 매주 한 장씩 골라 소개하는데 여기에 독자 여러분의 상상력이 더해지면 사진의 맥락이 더 분명해질 거 같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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