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만 여성 유튜버’ 괴롭힌 한국 남성들의 눈부신 연대 [정지혜의 빨간약]
‘불법촬영범에게 훨씬 더 엄중한 처벌을 하는 사회였다면. 교제 폭력 신고를 보복당할 두려움 없이 할 수 있고, 가해자가 제대로 처벌되는 사법 시스템을 갖췄다면. 성폭력 피해 여성의 행실을 성폭력 가해 남성의 행위보다 더 문제삼지 않는 공동체였다면. 남녀가 함께 찍힌 민감한 영상이 여성에게만 불균형적으로 높은 위험부담을 안기는 문화가 아니었다면.’
만약 그랬다면 이런 일까지 벌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직 우리는 이 모든 것이 희망사항일뿐인 여성혐오 사회에 살고 있음이 증명되고 말았다.
최근 유명 여성 크리에이터 1인이 수년에 걸쳐 당한 것으로 알려진 교제폭력, 성범죄, 피해 사실을 폭로하겠다는 협박 등은 그 면면이 매우 낯익으면서도 우리 사회에 큰 경종을 울린다. 이것이 더 이상 개인적 차원의 비극이 아님을 많은 이들이 알아채고 있다. 불운한 여성 1명의 피해, 악랄한 일부 남성의 일탈로 축소될 수 없는 성 불평등 사회의 구조적 문제라는 것이다.
1030만 구독자를 보유한 국내 최대 유튜버 중 1명인 쯔양(본명 박정원)이 전 남자친구이자 전 소속사 대표 A씨에게 4년간 지속적인 교제폭력과 협박을 당하고, 방송 정산금 최소 40억원을 뜯겼다고 밝혔다. 협박의 빌미는 ‘불법촬영 영상’이었다. 이 때문에 A씨가 일하던 술집에서 강제로 일하고, 유튜브 방송을 시작한 뒤에는 매일 맞으며 방송하는 와중에 불공정 계약, 광고 수익 미정산 등의 금전적 갈취가 심각했다고 주장했다.
혼자 견뎌보려 했지만 주변인에게까지 협박과 금전 피해가 확산하자 가만있을 수 없었다. 정산금청구, 전속계약해지, 상표출원이의, 강간, 유사강간, 상습폭행, 상습협박, 상습상해, 공갈, 강요, 성폭력처벌법위반 등의 혐의로 고소를 진행했다. 폭행 등을 입증할 수천 건의 녹취파일, 변호사 여러 명이 한 달 내내 고소장을 쓸 정도로 많은 증거가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사건은 불송치됐다. A씨의 자살로 인한 ‘공소권 없음’으로 형사 사건이 종결됐다.
쯔양이 유튜브 방송을 한 5년 중 4년은 A씨에게 시달린 시간이었다. 그 끝에는 가해자 사망으로 무산된 사법 절차, 회복될 길 없는 피해의 허망함이 남았다. 그러나 아픔을 뒤로 하고 ‘새로운 시작’을 위해 나아갔다. 지난 10일 쯔양이 1000만 구독자 달성을 기념해 국제구호 개발기구 월드비전에 2억원을 기부한 소식이 알려졌다.
끝까지 자신이 겪은 일이 알려지길 원치 않았다는 쯔양은 지난 11일 오전 개인 유튜브 채널 생방송을 통해 악몽 같았던 경험을 낱낱이 공개해야 했다. 원해서 한 게 아니었다. 전날 밤 유튜브 가로세로연구소가 올린 영상 ‘쯔양 과거 폭로 협박 뒷돈 (feat. 렉카연합)’ 속 내용의 전후 사정을 직접 밝히기 위함이었다. 가세연은 이 영상에서 쯔양이 “조회수를 올리기 위해 가짜뉴스를 퍼뜨리는 ‘렉카 연합’으로부터 술집에서 일했다는 과거 등을 빌미로 협박당해 돈을 갈취당했다”고 주장했다.
사이버렉카 유튜버들 이름과 함께 가세연이 폭로한 녹취록에는 남성 유튜버들이 쯔양을 협박해 돈을 뜯어내려한 정황이 담겼다. “이번 건은 터뜨리면 쯔양 은퇴해야 한다”, “(폭로보다) 금전적 이득을 취하는 게 낫다”, “쯔양 (소속사) 대표를 만나보겠다. 크게 하려면 현찰 2억원은 받아야 될 것 같다”, 그냥 엿 바꿔먹는게 낫지 않느냐“, “쯔양을 건드리는 걸로 해서 한 10억원 받을 수 있다” 등의 발언이다. 다음날 검찰은 이들 유튜버에 대한 수사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에 충격받은 사람들은 그동안 무심코 넘겼던 쯔양의 영상 속 자주 멍들어 있던 팔을 떠올렸다. “누군가에게 맞은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던 해외 팬들의 당시 영어 댓글이 뒤늦게 주목받았다. 교제폭력에 무감하고, 이를 공론화하거나 적절한 처벌을 예상하기 힘든 사회에 사는 한국인의 눈에는 같은 상처도 별 것 아닌듯 받아들여졌던 건 아닐까.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이런 맥락으로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는 일부 사람들의 성찰이 눈에 띄었다.
좀 더 근본적으로는 ‘1000만 유튜버’도 피해가지 못하는 여성 착취의 굴레를 통해 성별 계급의 굳건함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쯔양이 당한 일은 이 사회에 거대하게 살아있는 여성혐오 그 자체이며, 남성들이 여성을 옭아매 돈벌이하는 구조의 구체적 실행안을 종류별로 보여준다는 점에서다.
‘사귀던 중 남성 파트너에 폭행당함→이별 통보하자 불법촬영물로 협박당함→술집 강제 노동→유튜브 방송 수익 갈취 및 계속된 폭행→고소했으나 가해자 자살로 불송치→남성 유튜버 연합에 의한 재협박 및 금전 갈취→이들의 협박 사실 및 유명 여성 유튜버의 ‘과거’ 운운하는 콘텐츠로 수익을 노리는 또 다른 남성 유튜버들의 등장’에 이르는 촘촘한 그물을 보자. 어느 하나 남성의 여성 대상 폭력이 아닌 것이 없다.
5년전 세상을 경악케 한 ‘웹하드 카르텔’과도 닮은 지점이 있다. 웹하드 카르텔은 ‘웹하드 업체-헤비업로더-필터링 업체-디지털 장의 업체’가 한통속으로 가담해 피해자를 처음부터 끝까지 가해하고 속이며 500억원대의 수익을 올린 범죄 행각이다. 이번 사건의 경우 연루된 남성들 간 직접적인 연결고리는 없지만 다 같이 피해 여성의 목을 죄며 자신의 이득 챙기기에만 몰두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이번 사건에서 최초의 협박은 A씨가 찍은 불법촬영물 때문이고, 그것 때문에 강요받은 술집에서의 짧은 근무 사실은 새로운 협박의 빌미가 되는 ‘이중 족쇄’였다. A씨가 이를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N번방 때도 피해자를 협박해 성적 영상을 찍게 만들고 그걸로 다시 협박해서 또 찍게 만드는 비슷한 방식이었다. A씨의 노림수대로 쯔양의 이 ‘과거’는 사이버렉카 유튜버들의 귀에 들어갔고, N차 협박의 구실이 됐다. 여기에 가담해 금전적 이득을 취한 것으로 보이는 유튜버들은 평소 사회 정의를 위한 폭로와 ‘참교육’ 영상으로 인기를 누리던 남성들이란 점에서 여론의 배신감은 더욱 컸다.
능력 있고 잘 나가는 유명인 여성 한 명을 다수의 남성이 코너에 몰아넣고, 신체적·경제적 착취를 일삼으며 “건강한, 황금알 낳는 거위”에게 최대한의 이익을 뽑아먹을 궁리나 하는 것이 허용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정말 이들 남성의 개인적 문제로만 꼬리자르기 할 수 있나. 여성의 ‘과거’와 사생활, 성 관련 협박이 너무 잘 먹히는 사회이기에 이들의 악행은 순조롭게 계획되었고 별 탈 없이 수행되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A씨는 쯔양과 연인 시절 ‘보험용’으로 찍어뒀던 불법촬영물을 오랜 시간 톡톡히 활용했다. 남성 유튜버들은 피해자가 잊고 싶은 과거를 미끼 삼아 한 몫 크게 챙기려고 ‘연합’까지 만들어 단합해 압박 수위를 높였다. 이들은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사생활 폭로가 남성의 그것보다 훨씬 더 지탄받고 더 큰 타격을 입힌다는 것을 알았다. 여성의 피해 영상, 여성혐오 콘텐츠는 한국에서 처벌은 솜방망이인 반면 ‘돈은 크게 되는 시장’인 것을 알았다. 그 파급력을 여성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고, 가해자 처벌이나 피해 회복을 사법적으로 기대하기 힘든 탓에 무력한 심정으로 제안에 응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알았다. 이 모든 것을 알고 저지른 행태라는 점에서 더 큰 공분을 사는 대목이다.
이번 일을 남일로 치부할 수 없는 여성들의 분노는 이 사건 속 남성들을 키워낸 사회를 향해있기도 하다. 그들이 시도한 저질 공격들을 막아내기는커녕 유효타로 만들 것이 뻔한 사회, ‘잘난 여성의 추락’을 즐기며 여혐 콘텐츠를 소비하기에 바쁠 사회라는 것을 익히 아는 데서 오는 부글거림이다. ‘중립’과 ‘표현의 자유‘를 들먹이며 언제까지고 팔짱만 끼고 있는 플랫폼의 무책임함, 여전히 남성 편향적인 판결 일색의 사법 시스템, 어설프게 교제 폭력을 신고했다가 가벼운 처벌에 그치면 이후 더 깊은 지옥에 빠질 위험 등이 상존하는 것도 포함해서다.
◆여혐과 남혐, 무엇이 허구인가…다시 돌아보는 ‘집게손 광풍’
쯔양이 감당해야 했던 처참한 현실에 공감하며 연대와 지지를 보낸 여성들은 이 사회에 분명히 실재하는 여성혐오의 실체를 재확인하는 한편, 남성의 성기 크기를 조롱하는 손 모양이 용서할 수 없는 ‘남성혐오’가 되고 있는 현실의 의미 또한 되새겼다. 너무나 대조적인 실제 피해 앞에서 여혐과 남혐은 정말 ‘둘 다 똑같이 나쁜 것’인지 질문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오늘도 안전한 생존을 위해 믿을 구석 없이 스스로를 지켜야만 하는 한국 여성 앞에 놓인 몇 개의 암울한 뉴스로 그 대답을 대신하고자 한다. 최근 국제 학술지 ‘인간 행동과 컴퓨터’에 게재된 연구 결과에 따르면 한국 여성은 성적 이미지 유포 협박 등 ‘성적 착취’ 관련 피해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다른 나라에서 남성의 피해 응답률이 높았던 반면 한국은 유일하게 여성의 피해 응답률이 더 높았다.
쯔양 사건이 알려진 다음날 ‘아내에게 성인방송을 강요해 사망에 이르게 한 군인’에게는 징역 3년이 선고됐다. 30대 아내를 자택에 감금한 채 성관계 영상과 성인방송을 강요하고, 나체 사진을 유포하겠다며 협박한 끝에 피해자가 고통을 호소하며 유서를 남기고 극단적 선택을 한 사건이다. 검찰이 구형한 징역 7년에 한참 못 미치는 것은 물론 성 착취를 당하다 사망했는데도 “몫숨값 3년 쳐주는” 사회에 환멸을 느낀다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 다음 날에는 초등학생인 아들의 같은 반 친구를 수 차례 성폭행하고 성착취물 200여개를 제작한 40대 남성이 징역 8년을 선고받았다.
이런 뉴스들이 더 이상 놀랍지도 않은 사회에서 “집게손만 보면 의도가 있든 없든 남성이 차별받고 배제되는 공포가 느껴져 힘들기 때문에 ‘남혐’이다”는 일부 남성의 호소는 오히려 팀 킬 수준으로 보이기도 한다. 물론 ‘일부’가 아니라면 얘기가 다르지만.
정지혜 기자 wisdo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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