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류독감 대유행, 지금 시작돼도 이상하지 않다”
‘프리-팬데믹용’ 백신 준비해야…질병청 “2027년까지 백신 개발 체계 마련”
(시사저널=노진섭 의학전문기자)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 전 국장의 말이 일파만파 번지는 형국이다. 로버트 레드필드 전 미국 CDC 국장은 6월14일 TV 방송에서 "조류인플루엔자(AI·조류독감)가 일어날지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팬데믹이) 언제 일어나느냐의 문제"라고 경고했다. 코로나19 다음으로 인류에게 다가올 팬데믹은 조류인플루엔자이며 그 팬데믹 시기가 매우 근접했다는 의미다.
조류인플루엔자 팬데믹을 경고하는 배경에는 52%로 매우 높은 사망률이 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6월14일 조류인플루엔자 현황 자료를 보면 2003년부터 현재까지 23개국에서 889명이 감염됐고 463명이 사망했다. 감염자 두 명 중 한 명이 숨진 셈이다.
이런 감염병이 유행하면 재앙 수준일 텐데, 미국발 조류인플루엔자 팬데믹 설은 신빙성이 있을까. 이재갑 한림대강남성심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지금 조류인플루엔자 대유행이 시작돼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조류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조짐이 심상치 않다. 조류인플루엔자 팬데믹의 양상은 사망률에 따라 달라진다. 현재 사망률이 50% 수준이고 사람 사이에 전파될 때 10분의 1, 즉 5%로 낮아져도 세계는 혼란에 빠질 것이다. 코로나19는 초기에 3~10%였는데 얼마나 혼란스러웠나"라고 말했다. 질병관리청은 변종 조류인플루엔자가 유행할 경우 300일 안에 우리나라 인구의 약 42%가 감염되고 약 28만8000명의 중증 환자가 발생할 것으로 보고 있다.
사람 간 전파력만 획득하면 대재앙 시작
조류인플루엔자는 닭, 칠면조, 야생조류 등 여러 종류의 조류가 감염되는 전염성 호흡기 질환이다. 조류인플루엔자 바이러스(H5N1)는 주로 철새를 통해 이미 전 세계로 퍼졌다. 우리나라에서도 2003년 처음으로 이 바이러스가 발견됐다. 이 바이러스의 대륙 간 전파가 완료된 것이다.
게다가 종간 전파도 확인됐다. 조류에서만 돌던 이 바이러스가 포유류로 옮아간 사례가 여럿 있다. 스페인의 밍크, 미국의 바다표범, 페루와 칠레의 바다사자 등 최소 26종이 감염된 것으로 알려졌다. 2023년 여러 국가에서 고양이·개 같은 반려동물에서도 이 바이러스가 발견됐다. 세계동물보건기구(WOAH)는 2022년 이후에만 3개 대륙에 걸쳐 10개국에서 포유류가 조류인플루엔자에 걸리는 일이 발생했다고 밝혔다.
올해 3월에는 미국 텍사스와 미시간의 젖소에서 조류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검출됐다. 젖소 농장 근로자 4명도 조류인플루엔자에 감염됐다. 바이러스가 새-젖소-사람으로 전파된 첫 사례로 꼽힌다. 올해 6월까지 미국 내 12개 주 139개 농장에서 조류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발견됐다. 미국 CDC는 젖소들 사이에 조류인플루엔자가 유행하면 젖소 농장 근무자들이 감염될 위험이 있긴 하나, 일반 대중에게 전파될 위험성은 낮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바이러스가 포유류 간 전파 능력을 획득한 점이 문제다. 이는 사람 간 전파 능력도 곧 확보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재갑 교수는 "조류인플루엔자가 포유류에 적응한 것으로 보인다. 신종플루도 멕시코 돼지 농장에서 확산했듯이 이번에도 소에서 돼지를 거쳐 사람으로, 또는 소에서 바로 사람으로 전파할 수 있다. 아직 사람 간 전파는 없으나 그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조류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이미 사람에게도 넘어왔다. 그 첫 사례는 1997년 홍콩에서 나왔다. 당시 정체불명의 독감이 유행해 18명이 감염됐고 6명이 사망했다. 과학자들이 밝혀낸 원인은 조류인플루엔자 바이러스였다. 시장에서 닭을 도살해 판매하는 과정에서 바이러스가 사람에게 옮아간 것이다. WHO가 공개한 서태평양 지역의 현황만 봐도 2003년부터 2024년 5월까지 베트남(감염 129명·사망 65명), 캄보디아(감염 67명·사망 42명), 중국(감염 55명·사망 32명) 등 여러 나라에서 사람이 조류인플루엔자에 감염되고 사망하는 사례가 꾸준히 발생해 왔다.
H5N1과 같은 바이러스는 RNA 바이러스여서 변종이 일어날 확률이 매우 높다. 실제로 H9N2, H5N6, H7N7 등의 아형이 생겨 사람이 감염된 사례까지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도 알파·델타·오미크론 같은 변이를 빈번하게 일으키며 인간을 괴롭혔다. H5N1이 변이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전파되는 경우, 사스보다 위험하다는 것이 WHO의 경고다. 만일 소에서 여러 독감 바이러스가 섞이면 사람 간 전파력을 획득한 변이가 일어날 수 있다. 2009년 신종플루 팬데믹은 돼지에서 독감 바이러스가 섞인 변종이 탄생하면서 시작됐다.
미국·EU 등 초기 대응용 백신 비축 시작
가족 내에서 제한적으로 전파된 몇 가지 사례가 보고됐으나 지속적인 사람 간 전파는 확인되지 않았다. 조류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사람 간 전파력을 획득하면 팬데믹이 발생한다. 이 바이러스는 포유류 간 전파 능력을 갖췄고 사람을 감염시킨 지도 27년이나 됐다. 사람 간 전파가 가능한 변종이 출현해도 이상하지 않은 시점이다. 김우주 고대구로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1997년 홍콩에서 조류독감이 인체 감염을 일으킨 사례는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바이러스가 조류에서 종간 벽을 허물고 인간에게 넘어왔기 때문이다. 이후 27년 동안 조류 독감 바이러스는 개·고양이·물범 등 포유류로 꾸준히 넘어왔다. 올해는 젖소로부터 인간이 감염된 첫 사례까지 확인됐다. 또 호주를 제외한 모든 대륙에 바이러스가 퍼져 대륙 간 전파도 이뤄졌다. 그사이에 H5N1의 유전자에서 변화가 생겼고 최근 미국 젖소에서 발견된 바이러스는 2.3.4.4B 변이다. 이런 식으로 변이하면 사람 간 전파도 가능해진다"고 설명했다.
다행스럽게도 조류인플루엔자 팬데믹이 발생해도 코로나19보다는 낙관적이라는 전망도 제기된다. 팬데믹 초기에 백신과 치료제가 없었던 코로나19와 달리 조류인플루엔자는 백신과 치료제(항바이러스제)가 있기 때문이다. 손영래 질병관리청 감염병위기관리국장은 "조류인플루엔자와 코로나19의 차별점은 적어도 조류인플루엔자에 대해서는 항바이러스제와 후보 백신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새로운 조류인플루엔자와 기존의 백신 후보가 들어맞을지, 맞지 않을지는 예측하기 어려운 단계지만 만약 들어맞으면 코로나19 때보다 더 빠르게 대응할 수 있다"고 말했다.
외국 보건 당국은 조류인플루엔자 팬데믹 대비에 착수했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은 초기 대응용 H5N1형 백신을 비축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백신 기업(CSL시퀴러스)과 480만 회분의 백신 공급 계약을 체결했고 EU도 66만5000회분의 백신을 주문했다. 스텔라 키리아키데스 EU 보건 담당 집행위원은 "조류인플루엔자가 대중에게 전파될 위험은 낮지만 바이러스 접촉 위험이 큰 사람들을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다"며 백신 확보 이유를 설명했다.
또 미국 보건복지부(HHS)는 7월2일 백신 제조업체(모더나)에 조류인플루엔자 백신 개발 지원 명목으로 약 2442억원을 투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모더나는 이미 mRNA(메신저 리보핵산) 기술을 이용해 개발한 조류인플루엔자 백신을 테스트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미국은 수천억원을 들여 조류인플루엔자 팬데믹에 대비하는 것을 포함해 모든 감염병 팬데믹 대비에 수십조원을 쓰고 있다.
"초기 100일 안에 백신 생산한다"
우리나라도 백신을 만들 수 있는 기반 시설이 있다. 2016년에는 우리 보건 당국이 녹십자의 H5N1 백신 개발을 승인한 적도 있다. 그러나 정부가 백신을 비축하지는 않았다. 최소한 방역 요원이나 의료진을 위한 백신만이라도 비축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요청이다. 김우주 교수는 "프리-팬데믹(pre-pandemic)용 백신을 확보해야 한다. 팬데믹 직전에 사용할 백신이다. 300~400명을 대상으로 임상시험을 진행해 안전한지, 효과는 있는지를 미리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지영미 질병관리청장은 6월20일 열린 '인플루엔자 대유행 대비·대응계획' 심포지엄에서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은 조류인플루엔자 백신을 비축하고 있다. 우리도 예산이 확보되면 연간 7만5000도즈(dose·1회 접종분)의 백신을 비축할 것"이라고 말했다. 7만5000도즈는 정부가 백신 생산업체에 주문할 수 있는 최소 규모로, 팬데믹이 발생했을 때 보건·방역 대응 인력에게 접종할 수 있는 분량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우리 방역 당국은 백신 효능을 심사하고 승인할 노하우가 없었다. 미국 방역 당국의 결정을 좇는 정도여서 백신 도입과 접종 시기가 늦었다. 현재 국내에서 생산할 수 있는 백신은 유정란 유래 백신과 세포 배양 백신뿐이다. mRNA를 포함한 다양한 백신 플랫폼 개발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질병관리청은 최근 조류인플루엔자 확산 초기 100일 안에 백신을 생산하고 60일 내 백신 접종을 마치기 위한 체계를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2027년까지 우리나라에 없는 mRNA 백신 개발 체계를 갖춘다는 것이다. 질병관리청 관계자는 "우리 정부도 백신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팬데믹이 발생했을 때 유행하는 바이러스 변이형에 적합한 백신을 100일 이내에 개발할 수 있도록 하는 mRNA 백신 개발 플랫폼도 구축 중"이라고 밝혔다.
조류인플루엔자 유행에 대비할 때 특히 신경 써야 할 점은 어린아이들의 안전이다. 이재갑 교수는 "문제는 아이들이다. 코로나19가 고령자에게 위협이었다면 조류인플루엔자는 고령자뿐만 아니라 특히 어린이들에게 치명적이다. 조류인플루엔자는 소아 입원율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신종플루 때도 어린이 사망 사례가 많았다. 소아 의료가 붕괴한 상황에서 조류인플루엔자가 유행하면 매우 혼란스러울 것이다. 이와 관련한 대비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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