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워서, 내친김에 작곡했다…여름날 소년의 멜로디 [ESC]
신시사이저로 곡 만든 CF 감독
소리 내는 악기로 가능한 일
다양한 문화적 경험 중요해
지난해 아주 추운 겨울밤이었다. 오래 알고 지낸 한 감독님과 텔레비전 광고를 찍던 중이었다. 눈 얘기를 한참 했다. 오늘 밤엔 눈 엄청 올 것 같은데, 집에 어떻게 갈까 하는 이야기. 3년쯤 전에 눈 오던 날 같이 찍었던 광고 이야기. 그때 내 차는 눈길에 빠져 2시간인가 헤맸는데, 감독님의 에스유브이(SUV)가 눈 뚫고 가는 거 보고 부럽고 서러웠다는 이야기. 그날 새벽으로 넘어가는 촬영 말미쯤 감독님이 메시지를 하나 보내 주셨다. 겨울과 눈에 잘 어울리는 음악이니까 집에 가는 차 안에서 들으라며 보내준 음악, ‘윈터 트리’(Winter Tree).
성탄 전야, 외로워서 만든 곡
처음 보는 제목의 음악이라 “근데 이거 누구 음악이에요?”라고 물었는데 그가 약간 부끄러워하면서 말했다. “제 음악이에요.” 그날의 그 음악이 기억난다. 눈도 오고 있었고, 새벽이라 도로 위에 차는 없었다. 삐걱거리는 와이퍼를 리듬 삼아 오보에, 클라리넷, 플루트, 바순, 그리고 장작 타는 소리가 어울리는 따뜻한 음악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 또 메시지가 왔다. 여름이라 여름에 어울리는 음악을 만들었는데, 들으면서 시원하게 보내라는 내용. 문득 궁금해졌다. 취미로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신곡 발표 기념으로 인터뷰 한번 하시죠. 감독님.”
그렇게 해서 유대얼 감독에게 던진 첫 질문. “어쩌다 작곡을 할 생각을 했어요?” 사실 보통 사람이 음악을 만든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서 뭔가 대단한 계기가 있었기를 바랐는데 답변은 예상과 좀 달랐다. “‘윈터 트리’를 만든 날은 2020년 겨울, 크리스마스이브였어요. 외로웠죠.” 조감독도 모두 퇴근한 성탄 전야. 당시 총각이었던 유 감독은 외롭고 할 일이 없었단다. 어서 이 밤이 지나가기만을 바라며 시간을 때우고 있었는데, 오래전 사놓고 잊고 있던 신시사이저(피아노뿐만 아니라 현악기·관악기 등 거의 모든 악기의 소리를 재현할 수 있는 건반)가 눈에 들어왔다. 그날 모니터에 띄워둔 건 장작이 타고 있는 영상이었다. 이걸 음악으로 만들어보고 싶었다고. 기본 멜로디를 하나 완성하고, 왠지 이 멜로디엔 목관악기들이 어울릴 것 같아 그 위에 악기들을 차례로 하나씩 쌓는 형태로 작업을 했단다. 8시간 정도 걸렸는데, 아주 재미있는 놀이였다고.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영상디자인을 전공한 유 감독은 주변에 음악 하는 친구들이 꽤 있었는데, 친구들에게 들려줬더니 ‘녹음’ 한번 하자고 해서 곡이 나왔단다.
하지만 누구나 곡을 만들 수 있는 건 아니다. 음악은 소리를 다루는 취미여서 건반이든, 바이올린이든 소리를 출력할 악기를 다룰 줄 알아야 하는 ‘진입장벽’이 있다. 그래서 악기는 어떻게 배우게 되었냐고 물었다. 이에 그는 집에 아이가 있는 부모들은 한번 생각해볼 만 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음악을 좋아하셨어요.” 어머니는 첼로를 다룰 줄 아셨는데, 첼로에 미련이 좀 있으셨던 것 같고, 아버지는 밴드를 잠깐 하셨단다. 그리고 그의 쌍둥이 형은 대한민국 4대 남성 보컬인 나얼이다. 음악을 사랑하는 집안의 일원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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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걸 찾아내는 아이들
그는 바이올린 교습소를 다녔는데 중학교 1학년 때쯤, 어머니께서 물으시더란다. “바이올린을 전공까지 공부시키기에는 부담스러운데 너는 어떡했으면 좋겠니? 정말 원하면 시켜줄게.” 중학교 1학년 정도면 어른 이야기의 행간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악기를 놓는 시기쯤에 바이올린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는 악기를 다룰 수 없는 삶이 무료하고 따분했다고 한다. 교회 중창단에서 노래도 부르고 건반도 연주하면서 취미로 음악과 놀았는데, 그 시간이 지금의 삶과 연결된지도 모르겠다고. 형태는 다르지만 예술의 재미를 어려서 아는 건 즐겁고 중요한 일인 것 같다는 그의 이야기. “비주얼만 해도 일정한 형태를 갖는 데 반해, 음악은 형태 자체가 무한한 것 같아요. 상상 속에서 음악과 놀았던 어린 시절이 지금의 내 삶과 무관한 것 같진 않아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며칠 전 있었던 둘째 아이의 피아노 콩쿠르를 떠올렸다. 초등학생인 큰애와 작은애는 함께 농구 클럽과 피아노 교습소에 다닌다. 피아노 선생님이 두 아이 다 콩쿠르에 나가보는 게 어떻겠냐고 하셨다. 큰애는 콩쿠르 준비를 하면 농구대회 연습을 할 수 없으니 참가하지 않겠다고 했다. 작은애는 농구대회 연습을 하면 피아노 콩쿠르를 나갈 수 없으니 콩쿠르 준비 기간 동안 농구 연습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같은 집에서 크는 아이들이 이렇게나 다른가’ 하고 생각하면서, 작은애의 피아노 연주를 들었다. 아이에게 제목이 뭐냐고 물었는데, 영어로 쓰여 있어서 제목은 모르겠다고 했던 그 어떤 곡.
사람들이 자기가 치는 피아노 소리에 집중한다는 사실에 아이는 꽤 긴장했는데 “무대 체질”이라는 피아노 선생님의 말씀처럼 아이는 실수 없이 꽤 듣기 좋은 소리를 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걸 찾아내고 해나가는 과정이 대견하다는 생각을 하며 문화적으로 더 많은 경험을 하는 아이들의 상상력이 어른인 우리보다 뛰어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작곡가 유대얼’은 본인의 두번째 음악인 ‘리코더의 여름’을 설명하면서 내 생각에 동의해줬다. 자기가 어렸던 시절은 아무리 놀아도 지치지 않고 에너지와 상상력이 넘쳤던 때였다고. 그때 여름엔 아무리 뛰어놀아도 덥다는 생각도 별로 안 했던 것 같다고. 파란 하늘과 구름이 뭉게뭉게 핀 어린 여름날의 아이를 상상했더니 리코더가 떠올랐다고. 취미로 만들어서 부끄럽다고 했지만 혹시 듣고 싶은 분들을 위해 두 곡을 링크(‘윈터 트리’, ‘리코더의 여름’)로 소개한다. 만들면서 너무 즐거웠다는 음악이라는 취미는 사실 듣는 사람의 취미이기도 하니까.
글·사진 허진웅 이노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낚시든, 악기든, 오토바이든, 세차든, ‘너 좋아하는 게 뭐야?’ 라고 물었을 때 무언가 한가지 서슴없이 대답할 수 있는 삶이야말로 좋은 삶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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