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돌진해도 막아주도록 인도에 세워둔 기둥…근데 그거 뭐지? [그거사전]

홍성윤 기자(sobnet@mk.co.kr) 2024. 7. 13.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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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사전 - 26] 인도에 줄줄이 설치된 철제 기둥 ‘그거’

“그거 있잖아, 그거.” 일상에서 흔히 접하지만 이름을 몰라 ‘그거’라고 부르는 사물의 이름과 역사를 소개합니다. 가장 하찮은 물건도 꽤나 떠들썩한 등장과, 야심찬 발명과, 당대를 풍미한 문화적 코드와, 간절한 필요에 의해 태어납니다. [그거사전]은 그 흔적을 따라가는 대체로 즐겁고, 가끔은 지적이고, 때론 유머러스한 여정을 지향합니다.
영국 런던의 한 거리. 아주 볼라드로 도배를 해놨다. [사진 출처=Ben Wicks, unsplash]
명사. 1. 볼라드, 길말뚝 2. (法) 자동차 진입억제용 말뚝 【예문】스마트폰 게임에 심취해 길을 걷다가 볼라드를 걷어차고 말았다. 아니, 볼라드가 내 정강이를 걷어찼다.

잘 키운 볼라드, 열 트럭 안 무섭다. [사진 출처=인터넷 커뮤니티]
볼라드(bollard)다. 국립국어원에서는 길말뚝으로 순화할 것을 권장하고 있지만 아직도 볼라드라는 용어로 많이 쓰인다. 차량이 인도로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차도와 인도의 경계면에 세워둔 말뚝을 뜻한다. 그래서 법률상으로는 자동차 진입억제용 말뚝이라고 지칭한다. 콘크리트나 스테인리스 스틸, 알루미늄, 특수고무 등으로 만든다. 말뚝처럼 생긴 I자형 볼라드를 많이 쓰지만, U자를 뒤집어 놓은 것처럼 생긴 볼라드도 있다. 아예 고정형으로 박아두거나, 필요에 따라 뽑거나 바닥 밑으로 내려갈 수 있게 만들기도 한다.

원래 볼라드는 배를 매어 두기 위해 부둣가나 잔교 등 계류 시설에 세워 놓은 말뚝, 계주(繫柱)·계선주(繫船柱)를 뜻하는 말이다. 영미권에서는 부둣가의 볼라드와 구분하기 위해 도로상의 볼라드를 트래픽 볼라드, 스트리트 볼라드라고 부르기도 한다. 볼라드는 차량과 보행자의 공간을 분리해 안전사고를 예방하고 통행을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

부둣가에 설치한 계선주. 볼라드는 항구에 접안한 선박이 파도와 바람에 영향을 받아 흔들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부두에 밧줄로 단단히 고정하는 데 쓴다. 이 과정을 줄잡이업(line handling)이라고 한다. 국내 선박·항만 현장에서는 볼라드보다는 비트(bitt)라고 명기하는 경우가 많다. [사진 출처=Bruno Hervas, unsplash]
볼라드는 범죄 예방 효과도 있다. 한국에서는 차도와 인도의 경계에 설치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해외에선 공공기관이나 상업시설의 건물 출입구 앞에 볼라드가 불쑥 올라와 있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는 SUV나 픽업트럭 등 대형 차량으로 건물에 돌진, 문이나 벽을 부수고 침입해 물건을 훔쳐 가는 ‘램 레이드(ram-raiding)’ 범죄를 막기 위한 볼라드다. 2010년대 이후 유럽에서 트럭을 활용한 차량 돌진 테러가 기승을 부리자, 주요 도시 곳곳에서 볼라드를 앞다퉈 설치하기도 했다.
기존의 램 레이드 문법을 모조리 파괴한 램 레이드. 대형 차량이 아닌 일반 승용차로, 백화점·보석상도 아닌 작은 마트에 돌진한 소시민적인 램 레이드다. 대체 왜. 2020년대 들어 뉴질랜드에서는 램 레이드 범죄가 폭증했는데, 2022년 한 해에만 516건의 램 레이드 범죄가 발생했다. [사진 출처=인터넷 커뮤니티]
통상적인 관급 공사, 조달청 기준(2021년)으로 설치 비용까지 포함해 개당 15만~40만원대 제품이 많이 쓰인다. 필요에 따라 땅 속으로 하강·상승하는 자동 볼라드도 있는데 가격이 비싼 편이다. 주요 공공시설·보안시설이나 호텔·백화점 등에서 제한적으로 사용하는데, 이탈리아 수입 제품의 경우 개당 1000만원을 웃돌기도 한다.

볼라드는 보행자의 안전을 위해 설치하는 장치이지만, 단단한 재질의 말뚝이 시야보다 낮게 설치돼 있다 보니 멍하니 길을 걷던 보행자에게 시퍼런 정강이 멍을 안겨주기도 한다. 시각장애인에는 예상하지 못하게 튀어나와 보행을 방해하는 장애물이기도 하다.

특히 보행안전 및 편의 증진에 관한 법률과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 등에서 제시하고 있는 설치 기준을 제대로 준수하지 않고 설치한 경우가 잦은 것도 문제다. 법률 시행규칙에 따르면 볼라드는 반사 도료·발광 테이프 등을 사용해 쉽게 식별할 수 있어야 하며, 보행자의 안전을 고려해 높이 80~100㎝·지름 10~20㎝ 규격에 맞춰 제작해야 하고, 말뚝 30㎝ 앞쪽에 시각장애인용 점형(점자)블록을 설치해야 한다. 하지만 거리를 잘 관찰해보면, 규칙을 지키지 않은 경우가 태반이다. 2021년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중앙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서울시 마포구·서대문구·용산구·은평구·중구 등 서부도로사업소 관할 교차로 646개소에서 볼라드 584개 중 올바르게 설치된 사례는 66개, 11.3%에 그쳤다. 볼라드 전면의 점자블록이 설치된 경우도 28.3%에 불과했다. 점자블록이 파손된 채 방치되거나 횡단보도의 장소 변경 등으로 엉뚱한 곳에 설치된 사례도 있었다. 뭐든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안 하느니만 못한 법이다.

볼라드 등 공공 시설물은 보행자의 안전을 고려하되 교통 약자의 보행 편의도 고려해야 한다. [사진 출처=서울특별시 유니버설디자인센터]
볼라드 말고 인도와 차도를 구분하는 금속 울타리 ‘그거’는 방호울타리다. 가드레일·안전펜스라고도 한다. 현행법상 방호울타리는 차량용과 보행자용으로 나뉘는데 이 둘은 이름만 같을 뿐 목적과 성능에서 확연히 차이가 난다. 차량용은 차량이 도로 밖이나 중앙선 너머·인도 등을 침범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사고 위험 구간·철도 인접 도로·고속도로 등에 설치한다. 차량 충돌 시험을 거쳐 일정한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반면 보행자용은 무단 횡단이나 자전거 전도(顚度) 사고를 막기 위한 용도다. 충돌 시험도 거치지 않아도 설치할 수 있다. ‘방호’ 울타리 혹은 ‘안전’ 펜스라고 부르고 있지만, 급발진이나 운전 미숙 등의 이유로 차량이 인도로 돌진할 경우 보행자를 방호할 수도 안전을 담보할 수도 없다는 얘기다. 명확한 교체 주기나 파손 시 보수에 관련한 법 기준도 미비하다. 현재로서는 인명 사고가 발생한 장소에만 사후약방문 식으로 방호울타리 강도를 높이거나 차량용으로 교체·보강하는 조치에 그친다.

그렇다고 도심의 모든 인도에 차량용 방호울타리를 설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투박한 외관이 도시 미관을 해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로 보더라도, 설치 장소의 특성이나 비상식적인 사고의 발생 확률을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안전성만 강화하는 방식은 예산과 실효성 측면에서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지난 7월 2일 오전 전날 대형 교통사고가 발생한 서울 시청역 인근 교차로 인도에 사고 여파로 파편이 흩어져 있다. 차량이 충격한 인도 위 펜스·가드레일이 모조리 파손됐다. [사진 출처=연합뉴스]
세상에 완전한 안전은 없다. 국제표준기관인 ISO와 IEC가 공동 작성한 안전관리 관련 지침 ISO/IEC GUIDE 51에서는 안전(safe·安全)을 ‘허용(수용)할 수 없는 위험성이 없는 상태(freedom from risk which is not tolerable)’로 규정하고 있다. 즉 허용 가능한 수준까지 위험성을 낮추면, 설령 ‘제로 리스크’가 아니더라도 안전한 상태로 본다는 얘기다. 대기권을 뚫고 낙하한 운석에 맞아 사망하는 매우 희박한 상황을 가정해 안전 여부를 판단하거나 대비책을 세워놓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안심(安心)의 영역으로 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안전이 객관적·과학적·정량적이라면 안심은 주관적이다. ‘안전하다고 느끼는 것’ ‘걱정을 떨치고 마음을 편히 먹는 것’을 의미하는 안심은 마음의 문제다. 밤에 선풍기를 틀고 자면 질식해 죽는다는 괴담은 과학적인 안전 상식과 대중이 느끼는 안심이 괴리된 대표적 사례다.

그럼 자동차는 어떨까. 2023년 기준 국내 교통사고 사망자는 2551명이다. 1991년 1만3229명, 2013년 5092명에 비교해보면 많이 감소한 수치이지만, 결코 적은 숫자는 아니다. 고속으로 움직이는 고중량의 쇳덩어리, 자동차는 그 자체로 위험한 장치이며 교통사고 사망자 수도 그 위험성을 방증한다. 리스크는 분명히 높지만 현대 사회에서 차량의 보편성과 편의성·혜택이 그 위험성을 상회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안심하고 기꺼이 이용’ 한다.

다수의 인명 피해가 발생한 대형 교통사고는 자동차에 대한 보편적 안심의 수준을 후퇴시킨다. 사람들은 횡단보도에서 좌우를 더 살피고, 찻길에서 멀리 떨어져 걷는다. 평소 학교를 마치고 걸어서 하교하던 아이에게 “데리러 갈 테니 혼자 오지 말고 기다리라”라고 몇 번이고 연락을 남긴다. 이 같은 상황에 이르면, 완전한 안전은 없다는 말은 현실에 가닿지 않는 수사에 불과하다. 객관적인 안전과 주관적인 안심을 어느 정도 합치시키기 위해서는 대중이 납득할 수 있는 절충점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 최소한의 안전 기준에도 미치지 못한 방호울타리 취약 지역을 찾아 개선하고, 볼라드 등 보행 안전 시설물에 대한 기준도 더 명확하고 엄격하게 만들어 지속적으로 점검하는 등 일상의 안전을 담보하는 공공 영역의 변화가 절실한 이유다.

지난 4일 오전 서울 중구 시청역 인근 역주행 사고 현장에서 한 추모객이 술잔 아홉개에 술을 따르고 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사진 출처=연합뉴스]
  • 다음 편 예고 : 운동화 끈 끝에 ‘그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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