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 이전 대신 무상급식? 인도네시아의 불붙은 재정 논쟁[딥다이브]

한애란 기자 2024. 7. 13. 10:0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학생 무상급식을 도입하는 정책 때문에 요즘 아주 시끄러운 나라가 있습니다. 바로 10월 차기 대통령 취임을 앞둔 인도네시아인데요. 자라나는 아이들 밥 먹이자는 게 뭐 그리 논쟁거리냐고요? 하지만 먹여야 할 아이들 수가 8000만명이 넘는다면 얘기가 좀 다르겠죠.

인도네시아 차기 정부의 경제노선이 현 정부와는 크게 달라질 조짐인데요. 오늘은 인도네시아 무상급식 논쟁을 들여다보겠습니다.
인도네시아 경제부가 지난 2월 언론에 한 공립학교의 무상급식 시뮬레이션 현장을 공개했다. 실제 무상급식은 내년부터 단계적으로 도입될 전망이다.인도네시아 경제부
*이 기사는 12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https://www.donga.com/news/Newsletter

무상급식에 연 39조원 든다?

“무료 점심과 우유를 제공해 자궁에서부터 영양의 균등한 분배를 실현하겠습니다.”
지난 2월 인도네시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프라보워 수비안토 후보의 대표 공약은 무상급식이었습니다. 초·중·고 학생들에겐 무료 점심과 우유, 유아와 임신부에겐 영양 지원을 제공해 “인적 자원의 질을 향상시키겠다”는 목표이죠. 대상자는 총 8290만명. 전체 인구(2억7550만명)의 30%가 해당하는 엄청난 규모의 프로젝트입니다.

인도네시아는 일부 사립학교를 빼고는 학교 급식이 없죠. 집에서 먹을 걸 싸가야만 하는데요. 앞으론 학교에서 균형 잡힌 영양소의 밥까지 제공한다니. 학부모들이 환영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상급식 공약은 프라보워의 대선 승리를 이끈 핵심 공약 중 하나로 평가 받습니다.
프라보워 수미안토 인도네시아 대통령 당선자. 현재는 국방장관을 맡고 있다. AP 뉴시스
그런데 막상 무상급식 시행을 준비해야 할 시기가 다가오자 논란이 커집니다. 무엇보다 예산이 문제이지요. 프라보워 대선 캠프의 계획에 따르면 한 끼 급식에 필요한 비용은 1만5000루피아, 약 1300원입니다. 대상자 모두에게 밥을 먹이려면 460조 루피아(약 39조원)가 든다는 계산이 나오는데요. 인도네시아 올해 중앙정부 지출 예산이 2467.5조 루피아(약 210조원)이니까, 예산의 5분의 1을 쏟아부어야 실현 가능한 겁니다. 국가의 사회복지 예산(올해 497조 루피아)의 대부분을 무상급식에만 써야 할 판.

물론 당장 내년에 전면 무상급식이 시행되는 건 아닙니다. 재료 공급망이나 생산 시스템을 갖추는 데 시간이 걸리니까요. 단계적 무상급식 시행 계획은 10월에 프라보워 대통령이 취임한 뒤에나 나올 텐데요. 내년엔 소외된 변방 지역 학교부터 시행될 가능성이 큽니다. 지난달 현 정부의 스리 물야니 인드라와티 재무장관이 공개한 2025년 정부 예산안에서 무상급식에 배정된 내년 예산은 71조 루피아(약 6조원). 전체의 15% 정도만 밥을 먹일 수 있단 뜻이죠. 그래도 71조 루피아이면 올해 인도네시아 재무부(48.7조 루피아)와 교통부(38.6조 루피아) 예산보다도 훨씬 큰 겁니다.

건전 재정 아닌 다른 길

이런 막대한 예산이 들더라도 무상급식을 하긴 해야 하는 걸까요. 경제학자들의 문제제기가 이어집니다.

인도네시아대학의 거시경제 연구원인 테우쿠 리프키는 BBC에 이렇게 이야기하죠. “71조 루피아를 무료 식사에 할당하는 게 과연 적절합니까? 우리는 건강, 보육, 인프라 같은 여러 긴급한 과제가 있습니다.”

법률·예산연구센터 창립자 옌티 누르히다얏은 이렇게 지적합니다. “이 프로그램은 프라보워의 승리 확률을 높여줬기 때문에 실현돼야 할 겁니다. (무료 점심보다는) 사람들의 소득 증가를 지원하는 데 (예산을) 사용하는 게 더 낫죠.
지난 4월 중국에 방문했을 때 현지 학교의 급식시설을 둘러본 프라보워 당선자. 프라보워 공식 SNS 계정
무상급식은 인도네시아의 재정정책 기조가 달라질 거라는 신호입니다. 해외 투자자 입장에선 아주 예민한 부분이죠. 그동안 조코 위도도(줄여서 조코위) 행정부는 보수적인 재정정책을 펼쳐왔고, 덕분에 투자자 신뢰를 받을 수 있었는데요. 만약 국가부채 비율이 다시 높아지고, 재정적자가 확대된다면? 신흥국 채권 시장에선 큰 악재로 통할 겁니다. 지난 몇달 동안 인도네시아 루피아 환율이 뛰고(통화가치는 하락), 국채와 국영기업 회사채 금리가 오른(채권 가격 하락) 배경이기도 합니다. 투자자들은 프라보워 차기 대통령이 ‘조코위 2.0’이 되길 바랐는데, 지금 분위기상으로는 영 딴판이니까요.

최근 FT가 프라보워 당선자의 최측근인 하심 조조하디쿠수모 자문위원과 한 인터뷰는 이런 시장의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게 하는데요. 참고로 하심은 인도네시아의 재벌이자, 프라보워의 친동생입니다(프라보워의 풀네임이 프라보워 수비안토 조조하디쿠수모).

하심은 차기 정부가 지출을 늘리기 위해 정부부채를 국내총생산(GDP)의 50%까지 늘릴 거라고 밝혔습니다. 현재 39%인 부채 비율을 1년에 2%포인트씩 서서히 높여가겠다는 거죠. 하심은 FT에 “정부의 수입을 늘리면서 부채 수준도 높이는 게 목표”이며 “세계은행도 50%는 신중한 수준이라고 본다”고 설명했는데요. 선거 이후 프라보워 최측근이 정부부채를 늘리겠다는 계획을 공식적으로 밝힌 건 처음입니다.
2001년부터 2023년까지 인도네시아 정부부채 비율 추이. 2023년 기준 39%로 상당히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트레이딩이코노믹스

부채비율 50%에 예민한 이유

물론 이런 반응도 있을 겁니다. 부채비율 50%이면 엄청 양호한 거 아닌가? 우리나라는 지난해 이 비율이 50%를 넘어섰고요. 말레이시아(60.4%), 필리핀(60.9%), 태국(61%) 같은 동남아시아 국가도 50%를 한참 넘기니까 말이죠.

인도네시아는 정부부채에 유달리 엄격한 나라입니다. 2003년부터 정부부채 비율이 GDP의 60%를 넘지 못하도록 법으로 제한했을 정도이죠. 재정 적자가 GDP의 3%를 넘지 못하도록 하는 법도 있고요.

이렇게까지 강하게 규제하는 건 예전에 부채 때문에 워낙 크게 고생했기 때문입니다.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직후, 인도네시아는 통화가치가 급락하면서 정부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났죠. 정부부채 비율이 한때 85.4%까지 치솟았는데요. 당시 인도네시아는 국가부도 일보 직전 수준까지 갔고, 2001년엔 국가신용등급이 CCC(S&P 기준)까지 떨어졌습니다. 그랬던 나라가 지금은 부채비율 39%, 국가신용등급 BBB를 회복했죠.
지난 2월 조코위 대통령이 프라보워 당선자에게 4성 장군 견장을 달아주고 있다. AP 뉴시스
만약 인도네시아 부채비율이 다시 50%로 높아진다면 이는 2004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 될 겁니다. 50%라는 숫자가 편치 않은 이유입니다. 하지만 프라보워는 후보 시절 부채비율에 대해 “50%까진 문제없고, 우린 채무불이행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세계에서 존경받고 있다”고 얘기합니다. 현재 5% 수준인 경제성장률을 7~8%대로 끌어올리려면 부채비율이 더 높아져야 한다는 게 기본 입장이죠. 정부 지출 증가가 경기 부양으로 이어지는 ‘승수효과’를 노리는 겁니다.

이런 논리가 경제학적으로 틀린 건 아닙니다. 하지만 20년 전 재정위기를 기억하는 해외 투자자들에겐 마뜩잖을 수밖에 없죠. 그래서 프라보워 당선자 측이 이런 우려를 잠재우기 위해 꺼낸 카드가 있습니다. 바로 세수 증대 계획이죠.

인도네시아는 GDP 대비 세금 비율(조세부담률)이 10%밖에 되지 않는, 유난히 세금을 적게 걷는 나라이죠. 그만큼 세금 징수 시스템에 구멍이 많고, 탈세도 많기 때문입니다. 이 조세부담률을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와 비슷한 수준인 16%로 끌어올리겠다는 게 프라보워 당선자의 목표입니다(참고로 한국은 32%, 대체로 선진 복지국가일수록 높음).

그런데 세금을 더 많이 걷는다는 게 어디 말처럼 쉽나요. 과세 대상을 늘리기도, 세율을 높이기도 모두 어렵죠. 조코위 정부도 수년 전 비슷한 목표를 세웠지만, 조세부담률은 제자리걸음 중인데요.

그래서 프라보워 당선자 진영이 또 다른 옵션도 검토 중이라는 얘기가 계속 나옵니다. 보르네오 열대 정글에 들어설 누산타라(Nusantara) 건설 예산을 줄이는 거죠.

누산타라 천도는 10월 이후?

인도네시아가 정글 한복판에 새 수도를 건설 중이란 얘기는 들어보셨을 겁니다. 지반이 가라앉고 있는 현 수도 자카르타에서 벗어나, 1200㎞ 떨어진 보르네오섬 오지로 천도한다는 계획인데요. 이 새 수도 이름이 누산타라입니다.

수도 이전은 2019년 재선 직후부터 조코위 대통령이 필생의 역점사업으로 추진한 초대형 장기 프로젝트입니다. 총 건설비용 466조 루피아를 투입해 2045년까지 최종 완공한다는 계획인데요. 올해 누산타라에 가장 먼저 세워져 입주를 시작할 건물은 대통령궁이죠. 조코위 대통령은 79주년 독립기념일인 2024년 8월 17일에 맞춰 누산타라를 공식 수도로 선포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한국 기업도 여러 곳이 누산타라 건설 공사에 참여 중인데요.
지난 6월 5일 누산타라의 대통령궁 건설현장을 직접 찾았던 조코 위도도 대통령의 모습. AP 뉴시스
하지만 건설이 순조롭게 이뤄질지 의구심이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투자자를 끌어모으지 못했기 때문이죠. 구속력 있는 계약을 맺은 해외 투자자가 아직 한명도 없다는데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과연 대통령이 바뀌어도 프로젝트가 추진력을 잃지 않을지 누구도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그리고 프로젝트가 삐걱거리는 게 벌써부터 보입니다. 계획이 지연되기 시작했는데요. 지난 8일 조코위 대통령은 누산타라를 공식 수도로 선포하는 대통령령이 현장 상황에 따라 8월이 아닌 10월 이후에 발표될 수도 있다고 언론에 밝혔습니다. 즉, 후임 프라보워의 취임 이후로 일정이 미뤄질 수 있다는 얘기죠. 위도도 대통령은 이렇게 말합니다. “물은 준비됐나요? 전기는 준비됐나요? 우리는 준비되지 않은 것을 강요하고 싶지 않습니다. 현장에서의 진행 상황을 평가해야 합니다.”

불과 한 달 전 “7월에는 (새 대통령 집무실에) 물이 준비된다”고 장담했던 조코위 대통령의 말이 확 바뀐 게 예사롭지 않죠. 과연 10월에 취임하는 프라보워 당선자는 전 정부의 야심작 누산타라를 이어 받으려 할까요. 솔직히 그리 인기 있는 프로젝트도 아닌데 말이죠. 말레이시아 메이뱅크의 애널리스트 브라이언 리는 이렇게 지적합니다. “프라보워는 선거 이후 누산타라를 공개적으로 거의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야심 찬 지출계획이 많을 땐 우선순위를 정해야 합니다.”

대선 후보 시절 ‘조코위 정책 계승’을 약속하며 표를 끌어모았던 프라보워 당선인. 하지만 벌써부터 분위기는 심상찮은데요. 10월 취임식 이후엔 또 얼마나 많은 뉴스거리를 만들어낼지, 지켜봐야겠습니다. By.딥다이브

인도네시아 경제를 다룬 딥다이브만 벌써 세번째인데요(2023년 6월 인니 니켈 편, 2024년 2월 인니 대선 편 참고). 풍부한 자원과 거대한 인구로 한국 기업과 투자자의 관심을 끄는 나라이기 때문이겠죠. 주요 내용을 요약해드리자면.

-10월 새 대통령 취임을 앞두고 인도네시아에선 무상급식을 둘러싼 논쟁이 한창입니다. 프라보워 당선인의 핵심 공약인 무상급식의 단계적 시행을 위해 내년에만 6조원의 예산이 책정됐는데요. 계획대로 8290만명에게 무료 점심을 제공하려면 1년에 39조원이 필요합니다.

-이 돈을 어디서 끌어올까요? 아마 정부가 빚을 낼 가능성이 커보입니다. 프라보워의 친동생은 최근 FT 인터뷰에서 39%인 정부부채 비율을 50%까지 높인다는 계획을 밝혔습니다. 건전재정으로 금융시장 신뢰를 회복했던 조코위 정부와는 정반대 행보입니다.

-조코위의 야심작 수도 이전 프로젝트도 흔들릴지 모릅니다. 누산타라를 새 수도로 천명하는 대통령령은 애초에 8월에 발표될 예정이었지만 이제 10월 이후가 될 수 있다고 얘기가 바뀌었습니다. 대통령과 함께 많은 게 달라질 듯합니다.

*이 기사는 12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https://www.donga.com/news/Newsletter

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Copyright © 동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