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시신 5구 차량에 싣고 다닌 잔혹한 연쇄살인범들 [정락인의 사건 속으로]

정락인 객원기자 2024. 7. 13. 09:3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잡히지 않았다면 계속 사람을 죽였을 것” 진술에 경악
2002 월드컵 열기에 묻혀 사건 잘 알려지지 않아

(시사저널=정락인 객원기자)

지금까지 드러난 연쇄살인범의 범죄 패턴을 분석해 보면 진화를 거듭하면서 과거에 비해 수법이 더욱 잔혹해지고 있다. 이들의 범행도 그랬다. 2001년 10월 경기도 용인의 한 골프장 클럽하우스 식당에 김경훈(29)이 취업한다. 5개월 후인 2002년 3월14일에는 허재필(23)이 입사하면서 용인 지역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연쇄살인의 서막이 오른다. 

내성적인 성격의 허씨는 다른 직원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이런 허씨에게 김씨가 살갑게 대하면서 둘은 급속도로 친해진다. 이때까지 두 사람의 삶은 완전히 달랐다. 경북 포항 출신의 김씨는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나 부유하게 자랐다. 남부럽지 않은 집안 환경이었지만 재수하면서 범죄의 늪에 빠진다. 그는 절도와 강도, 성범죄로 교도소를 들락거리며 전과 7범이 된다. 이후에도 김씨는 유흥에 빠져 지내며 범죄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택시로 위장한 채 여성 승객들 태워

경북 구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허씨는 김씨와는 완전히 다른 가정에서 자랐다. 8세 때 부모가 이혼해 계모 밑에서 성장하는 등 불우한 환경에서 유년 시절과 청소년기를 보냈다. 허씨는 전과는 없었지만 800만원의 카드빚 때문에 항상 허덕였다. 김씨는 허씨의 사정을 알고는 "돈 되는 일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할 수 있겠느냐"고 물으며 "크게 한탕 하자"고 범행을 제안한다. 허씨는 100만원도 안 되는 월급으로는 도저히 빚을 갚을 수 없다고 판단해 김씨의 제안을 수락한다. 둘은 머리를 맞대고 범행계획을 짰다. 우선 승용차로 여성을 납치한 후 돈을 빼앗고 살해하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같은 해 4월18일 김경훈은 단골로 다니던 미용실을 찾아갔다. 그는 업주이자 미용사인 이아무개씨(여·32)에게 "드라이브나 하자"며 자신의 EF쏘나타에 태운 후 영동고속도로 용인휴게소 주차장으로 데려갔다. 차를 세우고 트렁크를 열자 이곳에 숨어있던 허재필이 튀어나왔다. 두 사람은 이씨를 위협해 신용카드 2장과 현금 10만원을 빼앗은 후 목 졸라 살해한다. 시신은 골프장 인근 야산에 암매장했다. 

첫 범행에서 자신감을 얻은 이들은 좀 더 효과적인 범죄 방법을 찾았고, '유령 택시'를 이용해 여성을 태워 돈을 빼앗은 후 살해하는 수법을 고안했다. 김씨는 다음 범행 준비를 위해 4월24일 골프장에 사직서를 제출한다. 첫 범행 9일 후인 4월27일 두 사람은 택시에서 번호판과 택시지붕 위 갓등(택시 표시등)을 훔쳐 김씨의 승용차에 부착했다. 어두워지자 수원과 용인 일대를 돌아다니며 두 번째 범행 대상을 물색했다. 

이날 밤 11시쯤 수원시 팔달구 영통동 삼성전자 정문 앞에서 택시를 기다리던 피아노학원 강사 박아무개씨(여·29)를 태운다. 이들은 박씨를 용인시 신갈읍 오산천 주차장으로 끌고 가 마구 폭행한 후 현금 2만원과 신용카드를 빼앗았다. 김씨는 허씨를 망을 보라며 차량 밖으로 내보낸 후 박씨를 강제 추행한다. 이어 노끈으로 목 졸라 살해한 후 박씨의 신용카드로 현금 50만원을 인출했다. 다음 날인 4월28일 오전 허씨는 태연하게 자신이 일하던 골프장에 출근해 오후 3시까지 정상 근무한 후 사직서를 냈다.

범행은 그날 밤에도 이어졌다. 김경훈과 허재필은 이날 오후 9시쯤 두 번째 범행 장소에서 불과 2km 떨어진 용인시 기흥읍 영덕리 현대자동차서비스센터 앞길에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던 이아무개씨(여·20)를 태운다. 이씨는 대학 진학 대신 취업해 동생과 부모를 챙기던 사회 초년생이었다. 이날 야근한 후 택시를 기다리고 있다가 하필 범인들의 위장 택시를 타게 된다. 

이씨는 목적지와는 달리 경부고속도로 하행선을 달리자 항의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범인들은 이씨를 오산 나들목 부근 갓길로 끌고 가 현금과 카드를 빼앗은 후 같은 방법으로 살해하고 그의 카드를 이용해 현금 190만원을 빼냈다. 피해 여성들은 택시등만 보고 의심 없이 승용차에 올랐다. 특히 밤 시간대여서 택시의 진위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가 참변을 당했다. 범인들은 두 여성의 시신은 유기하지 않고 트렁크에 싣고 다녔다.

세 차례의 범행이 쉽게 이뤄지자 범인들은 더욱 대담해진다. 이전까지는 돈만 빼앗다가 "재미도 보자"며 이씨를 살해한 지 8시간 만에 네 번째 범행에 나선다. 이번에는 택시등을 떼고 '야타족'으로 변신한다. 4월29일 새벽 5시쯤 수원시 매탄동 번화가에서 승용차를 정차해 놓고 범행 대상을 물색하다 나이트클럽에서 나오는 의류매장 직원들인 안아무개씨(22), 정아무개씨(23), 강아무개씨(27) 등 3명의 여성을 발견한다. 

범인들은 안씨 일행에게 "같이 술이나 한잔하자"며 접근했고, 이들은 아무 의심 없이 승용차에 올랐다. 그런데 곧바로 범죄 본색을 드러내지 않았고, 무려 17시간 동안이나 여주와 이천 등지를 돌아다녔다. 그러다 영동고속도로 용인휴게소 인근 갓길에 차를 세우고 순식간에 강도로 돌변했다. 여성들을 위협해 현금 12만원을 빼앗았다. 이들의 범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안씨 등 2명을 일행이 보는 앞에서 성폭행한다. 여성이 3명으로 숫자가 더 많았지만 건장한 남성 2명을 당해낼 수 없었다. 

범인들은 여성들을 차례로 살해했다. 이 중 한 명은 양가 상견례를 마치고 결혼을 앞둔 예비 신부였다. 이들의 시신은 차량 뒷좌석에 쌓아놓았다.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범인들은 트렁크에 있던 시신까지 뒷좌석으로 옮겨왔다. 이렇게 해서 차량에는 모두 5구의 시신이 있었다. 김씨와 허씨가 20대 여성 5명을 살해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47시간, 만 이틀도 걸리지 않았다. 사흘 동안 이들의 살인행각에 5명의 여성이 희생됐지만 범행 후 두 사람이 손에 쥔 것은 300만원도 채 되지 않았다. 

범인들이 범행에 사용한 승용차 안에서 삽 등 범행도구가 무더기로 나왔다. ⓒKBS 뉴스 화면 캡처

차 뒷좌석에 사체 3구 겹겹이 쌓아놓기도

범인들은 1차 피해자인 미용실 업주 이씨 사건을 수사하던 경찰의 추적을 받는다. 이씨가 이틀이 지나도록 귀가하지 않고 연락이 두절되자 남편이 경찰에 가출인 신고를 접수한다. 경찰은 이씨의 금융기록을 조사하다가 고속도로 휴게소 자동화기기(ATM)에서 한 남성이 이씨의 카드로 12회에 걸쳐 286만원을 인출한 것을 확인한다. ATM기에 설치된 폐쇄회로(CC)TV에는 '뉴욕 양키스' 야구 모자를 쓴 남성이 찍혔으나 화질이 흐려 얼굴 식별이 불가능했다.  

범인들은 피해자들의 시신을 승용차에 그대로 방치한 채 다섯 번째 범행을 준비했다. 경찰에 꼬리가 잡힐 수 있으니 번호판을 바꿔 달기로 했다. 이번에도 훔친 번호판을 쓸 작정이었다. 4월30일 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용인시 기흥읍 삼성반도체 주차장에 김경훈과 허재필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들은 주차장에 세워져 있던 현대 엘란트라 승용차에 다가가 허씨가 망을 보고, 김씨는 번호판을 떼어내기 시작한다. 

이 모습은 사설 경비업체 CCTV에 포착됐고, 얼마 후 7명의 직원이 현장에 출동한다. 이들은 김씨와 허씨를 에워싸면서 격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약 20분간 서로 뒤섞여 싸웠으나 숫자에 밀린 범인들은 결국 제압된다. 얼마 후 신고를 받고 용인경찰서 고매파출소 소속 이아무개 순경이 현장으로 출동한다. 사건 발생 시 2명 이상의 경찰관이 출동해야 함에도 인력 부족으로 1명만 사건 현장에 도착했다. 이 순경은 범인들에게 수갑도 채우지 않고 순찰차에 태우고는 이들이 몰던 차를 확인하러 갔다. 그사이 범인들은 키가 꽂혀 있던 순찰차를 몰고 그대로 달아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펼쳐진다. 

당황한 이 순경은 경비업체 직원들과 함께 이들의 경비차량을 타고 100여m를 뒤쫓아가 순찰차를 가로막고 범인들과 격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허재필은 제압해 체포했으나 김경훈은 야산으로 도주한다. 이 순경은 김씨를 놓친 사실을 경찰서에 보고하지 않고 허재필만 파출소로 연행한다. 처음에는 번호판을 훔치는 잡범쯤으로 생각해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이다. 

그러다 약 1시간 후 주차장에 세워져 있던 김경훈의 승용차에서 여성 사체 5구가 발견되자 경악한다. 모두 손과 발이 묶인 채 목 졸려 숨진 처참한 모습이었다. 차 안에서는 또 범행에 사용된 삽과 괭이, 노끈과 여러 장의 신용카드, 현금과 수표 60여만원 등도 함께 발견됐다. 이때서야 이 순경은 부랴부랴 유선으로 김씨의 도주 신고를 했고, 팩시밀리 문건으로 정식 보고한 것은 도주한 지 약 2시간 후인 5월1일 새벽 3시13분이다.

검거된 허재필이 경찰에서 조사를 받고 있다. ⓒKBS 뉴스 화면 캡처

경찰 수사망 좁혀오자 주범은 자살

경찰은 이때부터 인근 검문소와 고속도로 톨게이트에 대한 검문검색을 시작했다. 이 같은 경찰의 늑장대응으로 김씨는 유유히 현장을 벗어난 후 고향인 포항에 있는 동생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날 오전 7시쯤 김씨의 동생과 어머니가 승용차를 타고 용인으로 출발해 낮 1시쯤 김씨와 합류해 함께 포항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동생의 카드로 600만원을 인출해 도피 자금을 확보하고 용인에 있는 동거녀에게 전화까지 했다. 김경훈은 장기 도피를 위해 포항 상대동 주택가에 보증금 30만원에 월세 13만원짜리 방을 얻어 은신처를 마련하고, 동생과 함께 잠적했다. 

경찰은 현상금 500만원을 내걸고 김씨를 추적하며 수사망을 좁혀갔다. 동거녀와 통화한 내역을 확인해 발신지인 포항으로 형사대를 급파했다. 김씨의 동생은 경비업체 직원들과 격투를 벌이다 다친 형을 위해 약을 사려고 외출했다가 검문 중인 경찰에 붙잡힌다. 오후 4시15분쯤 경찰은 김씨 동생을 통해 그의 소재를 파악하고 은신처를 급습한다. 급히 다락방으로 달아난 김씨는 흉기로 자해했다. 경찰이 급히 병원으로 옮겼지만 과다 출혈로 숨졌다. 은신처에서는 김씨의 유서가 나왔는데, 그의 동생은 "형이 아침 신문을 보고 유서를 썼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김경훈이 자살한 것을 숨긴 채 허재필을 상대로 범행을 집중 추궁했다. 허씨에게 '왜 여성들을 살해한 후 사체를 차에 싣고 다녔느냐'고 묻자 "신고할 것 같아서 죽였고, 나중에 멀리 떨어진 지역에 한꺼번에 묻으려고 했다"고 진술했다. '사체를 싣고 다니면서 무섭지도 않았냐'는 질문에는 "아무렇지 않았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허씨는 자필 진술서를 통해 "잡히지 않았다면 계속 사람을 죽였을 것"이라고 밝혔다. 강도살인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된 허씨는 재판에서 사형이 확정된 후 미집행 미결수로 현재까지 수감 중이다. 이 사건은 상당히 충격적이었지만, 당시 2002년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그 열기에 묻히면서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Copyright © 시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