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납치된 10대 소녀의 반전…“죽은 줄 알았던 동생 찾았어요” [사색(史色)]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 2024. 7. 13.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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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75] “제 남동생에게는 푸른 멍이 있습니다. 당신도 같은 부위에 멍이 있나요. 부디 대답해주세요.”

편지에는 절절함이 묻어납니다. 전쟁통에 잃어버린 동생과 비슷한 사람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였습니다. 3년 전에 죽었다고 여겨진 소중한 가족을 다시 찾을 수 있다는 생각에 그녀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지요.

적군의 나라까지 끌려와서 들은 소식이기에 반가움은 배가 됩니다. 임진왜란이 막 끝난 시기, 장소는 일본이었습니다. 왜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의 10대 소녀 오다 쥬리아의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이산가족만큼이나 동생에 대한 그리움이 편지 밖으로 전해지지요.

“동생아 우리는 헤어지지 말자.” 영국 화가 토마스 케닝턴의 1885년 작품 ‘고아들’.
쥬리아는 일본의 그리스도교로서 평생을 신앙인으로 살았다고 전해지는 인물입니다. 성인품에 오르진 못했지만 배교의 압박 속에서도 믿음을 지킨 것으로 명성이 자자합니다. 그녀가 순교했다고 전해지는 장소에서는 그녀는 민속신으로서 추앙받고 있습니다.

조선의 전쟁 고아에서, 일본의 한 마을의 신이 되기까지. 전쟁이 만든 기구한 여인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전쟁의 패자와 승자를 기록하는만큼이나, 민중의 기구한 삶을 기억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비극은 때론 전쟁을 예방하는 가장 중요한 단초기 때문입니다.

임진왜란으로 생긴 수 많은 고아들
“이 소녀를 우리가 데려간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선봉장은 고니시 유키나가였습니다. 그가 평양성을 공격할 때, 수 많은 조선의 백성들이 아비규환 속에서 도망가기 바빴습니다. 당연히 부모를 잃은 아주 어린 아이도 많았지요. 그 때였습니다. 고니시가 열살 쯤 되어보이는 고운 여자아이를 발견했던 건. 그녀 옆에는 남동생으로 보이는 한 아이와 몸종이 서로 손을 잡고 울고 있었지요.

“이 소녀를 우리가 데려간다.” 고니시 유키나가.
양민을 무참히 학살한 고니시의 군사였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 아이에게만큼은 연민이 일었습니다. 전쟁의 복판에서 가만히 동생의 손을 잡고 서 있는 여자아이가 풍기는 분위기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고니시는 가만히 생각합니다. “신의 뜻인가.”

고니시는 부하들을 시켜 그녀를 같이 데리고 가기로 결정합니다. 서양 가톨릭을 믿은 ‘기리스탄’(크리스천의 일본식 발음)이었던 그가 조선인 여자아이로부터 신의 뜻을 읽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포로인듯, 포로 아닌 동행이 시작된 셈이었지요.

고니시의 부대와 소녀는 함께였습니다. 결국 왜군이 패배해 본국으로 도망 칠때도, 소녀와 함께였지요. 함께 있던 남동생의 행방은 더 이상 알수 없게 되었지만, 고니시는 그녀를 결코 놓고가지 않았습니다. 그녀를 거의 수양딸처럼 생각했을 정도였지요. 이미 부모와 가족을 잃은 소녀에게도 선택지가 없었던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1592년 한반도에 상륙한 일본군.
조선 소녀에게 기독교를 권한 고니시
“함께 하나님을 믿어볼테냐.”

고니시가 일본 규슈 영지로 돌아갔을 때, 그는 소녀에게 가톨릭을 믿어볼 것을 권했습니다. 먼 타지로 끌려와 타향살이를 하던 소녀에게 신앙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새 삶을 살아가야 했던 소녀는 크게 고민하지 않고 승낙합니다. 고니시는 예수회 소속 모레혼 신부에게 소녀의 세례를 부탁합니다. 그녀가 ‘쥬리아’(율리아)라는 세례명을 받게 된 배경입니다. 거기에 오다라는 일본식 이름도 지어주지요(한국어 왔다, 혹은 없다라는 말에서 지어줬다는 설이 있습니다만 확인되지는 않았습니다).

서양의 기독교를 받아들인 일본인을 묘사한 그림. 포르투갈 의상을 입은 16세기 일본의 기리스탄들.
기구한 운명의 굴레는 그녀를 쉽사리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정치적 격변이 일어나면서였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였습니다. 임진왜란 패전 후 권력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일전이 벌어진 것이었지요.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와 새로운 권력으로 떠오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정면승부였습니다.

고니시가 의리파였기 때문일까요. 그는 죽은 히데요시의 아들 히에요리의 편에 섰습니다. 역사는 그러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을 들어줬지요. 패장이 된 고니시. 그는 전통적인 할복을 거부합니다. 크리스천에게 자살은 죄악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야스가 참수를 명하고, 한 승려가 그에게 염불을 외자, 그가 소리칩니다. “나는 기리스탄(그리스도인)이다. 어딜 불교의 것을 나에게 들이대느냐.” 고니시 가문의 몰락이었습니다. 오다 쥬리아의 시련도 예정돼 있는 듯 보였습니다.

임진왜란 후 일본의 지배자를 가리는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졌다.
일본 최강 권력자의 눈을 사로잡은 오다 쥬리아
“이 소녀가 앞으로 내 시중을 든다.”

그녀의 우아한 분위기가 다시 운명을 바꿨습니다. 일본을 평정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그녀에게 매력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오다 쥬리아가 이에야스의 눈에 들면서 그의 시중을 들게 됩니다. 일본의 최고 권력자들이 조선 출신 소녀를 휘하로 둔 셈이지요.

이에야스가 에도성에서 슨푸성으로 거처를 옮길 때에도 그녀도 동행합니다. 오다 쥬리아가 얼마나 이에야스의 신임을 얻었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지요. 서양 신부들이 본국에 보고한 보고서에는 “이에야스가 그녀를 총애하고 있다”(비스카이노 신부)는 기록이 있을 정도입니다.

“전 하느님의 뜻만 따릅니다.” 오다 쥬리아의 초상화.
그녀는 독실한 신앙인으로 주변의 존경을 샀습니다. 은이나 쌀, 그 밖의 물건들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며, ‘기리스탄’으로서 모범을 보였습니다. 권력의 지근거리에서 숱한 유혹이 있었음에도 그녀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지요. 너무 어린 나이에 전쟁의 포화 속에서 소중한 사람을 잃은 기억 때문이었을까요. 젊은 나이에도 그녀는 속세보다는 하나님의 영원한 뜻을 좇는 듯 보였습니다. 성당을 꾸준히 찾아 기도하면서 몸을 깨끗히 하곤 했습니다.
동생을 찾게 된 오다 쥬리아
“저...정말 제 동생이 맞을까요.”

슨푸성에서 신앙 활동에 매진하던 쥬리아에게 한 소식통의 연통이 도착합니다. 7살 터울인 둘째 남동생 김운낙이 일본에서 살고 있다는 연락이었습니다. 야마구치 지역의 지배자 모리 가문의 가신인 히라가 가문에서 조선인 출신의 청년이 일하고 있다는 내용. 그녀의 눈시울은 뜨겁게 달아올랐습니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던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터져 나와서였습니다.

두 사람은 수 차례 서신을 주고 받습니다. 마침내 오다 쥬리아는 확신합니다. “제 동생이 맞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동생 운낙에게 자신이 있는 슨푸성으로 와달라고 요청하지요. 전쟁의 포화 속에서 헤어진 남매가 무려 7년 만에 눈물겨운 상봉을 한 셈입니다. 그것도 이국 땅에서요. “부모님과 함께 피신했 줄 알았는데, 나와 마찬가지로 이 나라에 끌려왔을 줄이야.”

1609년 오다 쥬리아가 잃어버린 동생 김운낙에게 썼다고 전해지는 편지.
“쥬리아의 남동생에게 칼을 하사하라.”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늘 평정심을 유지하던 쥬리아가 기쁨의 감정을 여과없이 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이처럼 어쩔 줄 몰라 좋아하던 그녀의 표정을 보면서 이에야스도 놀랄 수밖에 없었지요. 일본의 최고 권력자인 이에야스는 직접 쥬리아의 동생인 운낙에게 고소데(의복)와 칼과 말을 하사하면서 환영의 뜻을 보냈습니다.

야마구치로 돌아온 운낙을 모리 가문은 성대하게 맞아줍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줄을 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여서였지요. 모리는 운낙에게 일본식 성(姓) ‘무라타’와 봉토를 부여합니다. 조선인 김운낙은 이제 일본 무사 무라타 야스미사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지요. 그의 누나 오다 쥬리아의 영향력 덕분이었습니다. 무라타 가문은 그 이후 하기 지역에 터를 잡고 살아갑니다. 쥬리아가 쓴 3편의 편지와 이에야스가 하사한 기모노도 소중히 보관하지요.

종교탄압이 불어닥친 일본
“더 이상 기독교를 믿어서는 안 된다.”

해피엔딩은 쥬리아의 사전에 없는 내용인가 봅니다. 다시 그녀에게 역경이 닥칩니다. 기리스탄이었던 오카모토 다이하치가 대형 사기 사건에 연루되면서 처형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에도 막부는 이를 명분삼아 금교령을 내리기에 이르렀지요.

누구도 서양식 하나님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엄명이었습니다. 예외는 없었습니다. 기독교 믿음을 강조하는 이들에겐 재산 몰수와 추방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신분의 고하를 막론했지요.

“우리에겐 천국이 기다리고 있노라.” 17세기 순교를 당하는 일본 기리스탄들.
이에야스의 총애를 받는 여인이라도 예외일 수는 없었습니다. 오다 쥬리아에게는 사형과도 같은 명이었지요. 잠시라도 배교를 선언해 화를 피하라는 이들에게 쥬리아는 당당히 외쳤습니다. “지상의 군주를 기쁘게 하기 위해 하늘의 신을 배반할 순 없네.” 이에야스도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유배를 명합니다. 1612년 4월의 일이었습니다.
유배지에서도 종교인으로 살아간 오다 쥬리아
“이것은 주님의 특별한 배려입니다.”

귀향가는 길에서 자갈길이 보였을 때 그녀는 잠시 멈춰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더니 맨발로 그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발에서 피가 맺히고 고통이 덮쳐왔지만, 그녀는 이것이 예수님이 걸어오신 길을 십분이라도 이해하는 방법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녀가 당도한 곳은 조그만 마을이었습니다. 작은 곳이었지만 그곳에서도 그녀는 하나님의 뜻을 좇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주변 사람을 도우는 삶이었습니다. 막부 조정에서 지속적으로 배교할 것을 요청했지만 그녀는 받아들이지 않았지요. ‘기리스탄’은 버릴 수 없는 정체성이었습니다. 결국 그녀가 더 먼 유배지 고즈시마로 떠나게 된 배경이었지요. 극소수의 어부만 사는 불모의 땅이었습니다.

“자 조용하게 미사를 올립시다.” 중세 일본에서 기도교 미사를 거행하는 모습.
육체적 괴로움이 가득할수록 그녀의 정신은 충만해져 갔습니다. 그녀에게 첫 세례를 준 모레혼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감정이 전해집니다. “저는 이 섬에 와서 매일 성서를 낭독하고 묵상하여 천주님의 위로를 받기 때문에 대단히 행복합니다. 이 섬을 갈바리아 산으로 생각하고 십자가 밑에서 죄를 통회하고 예수님과 함께 생명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녀의 경건한 삶에 감동한 선교사들이 그녀에게 직접 돈을 보냈다는 기록도 전해집니다. 1618년 신부 프란시스코 모랄레스가 마닐라의 이쿼가 총독에게 낸 서한에 담긴 내용입니다. “각하께서 줄리아님에게 보내신 은은 그 방면으로 가는 신부 편에 전달했습니다. 지금쯤은 아마 입수했으리라 믿습니다만, 너무 멀리 떨어진 곳인데다가 감시가 심해 아직 받았다는 기별을 받지 못했습니다.”

16세기 일본 기리스탄들이 읽었던 책.
전쟁 고아에서 민간 신앙의 신으로
그녀가 어찌나 경건하고 봉사적인 삶을 살았던지, 귀양간 곳에서는 그녀에게 기도를 드리는 신사까지 만들었을 정도입니다. 그녀에게 바치는 향은 특별히 십자가 모양이었다고 전해집니다. 독실한 신앙을 존중한다는 의미입니다.
시즈오카 현에는 ‘기리스탄의 등불’이라는 이름의 탑이 있다. 이 탑은 오다 쥬리아가 예배를 드린 걸로 이름나 있다. [사진출처=Halowand]
오다 쥬리아는 1620년 귀양에서 풀려난 것으로 전해집니다. 귀양에서 풀려났지만 기리스탄의 삶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사카, 나가사키 등지에서 천주교 신부들과 함께 선교하며 봉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일본의 천주교계가 그녀를 기리는 쥬리아제를 지내는 배경입니다. 조선의 포로에서 일본의 성녀가 되기까지. 종교에 대한 믿음을 서서히 잃어가는 우리에게도, 그녀의 이야기는 경건함을 갖게 합니다.

오다 쥬리아의 이야기를 담은 일본의 책.
<네줄요약>

ㅇ오다 쥬리아는 1592년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가 권력자들의 시녀로 살았다.

ㅇ그 과정에서 헤어진 동생을 만나기도 했다.

ㅇ기독교인이 된 오다 쥬리아는 평생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했다.

ㅇ민간 신앙 속에서 오다 쥬리아는 신으로 모셔지기도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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