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계 호주소녀 ‘하니’ 도쿄돔서 일 국민가요 부르다…이것이 K팝!
뉴진스의 도쿄돔 팬 미팅이 두고두고 화제다. 지난 6월26~27일 일본 도쿄돔에서 이틀 동안 열린 팬 미팅은 전 좌석 매진으로 9만명 넘는 팬을 모았으며 데뷔 후 최단기간 도쿄돔 입성이라는 기록까지 뉴진스에게 안겨주었다. 얼마 전에 민희진 대표와 하이브가 극단의 대치 상황까지 갔던 터라 더욱 주목받았던 뉴진스는 세간의 우려를 깔끔하게 털어냈다. 그리고 일본 내 인기를 더욱 굳건히 만드는 수확까지 얻었다. 칭찬 일색이었던 공연 중에서 가장 주목받은 순간은 일본 가수 마쓰다 세이코의 ‘푸른 산호초’를 하니가 부를 때였다. 한국의 걸그룹이 ‘쇼와시대’의 향수를 되살려냈다며 찬사가 이어졌다. 일본 팬들은 왜 이 무대에 이렇게 열광했고 우리는 왜 이런 현상에 주목하는가?
먼저 시대에 관한 정리부터 하고 넘어가자. 특정 시대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일단 학교에서 배우는 우리나라의 20세기는 대략 이런 흐름이다. 고통스러운 일제강점기로 시작해 한국전쟁이라는 최악의 비극을 겪었으나 한강의 기적을 이뤄내며 선진국의 기틀을 마련한 시대. 일본의 쇼와시대(연호로 1926~1989년)가 여기에 해당한다. 일본 역사상 이만큼 화려하게 마무리된 시대가 있었을까? 1985년 9월 플라자합의 이후 엔화 가치가 급격하게 상승하면서 부동산과 주식시장은 끝도 없이 오르기만 했고, 일본이 세계 최고의 부자 나라가 된 것 같은 분위기의 정점에서 쇼와시대가 저물기 때문이다. 그 후 축제도 환상도 끝나버렸다. 1991년부터 2002년까지 소위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는 장기 불황이 시작되었고 그 여파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어 ‘잃어버린 30년’이라는 표현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1980년에 발매된 ‘푸른 산호초’는 플라자합의보다 일찍 나왔으니 버블 경제와는 전혀 상관없다. 오히려 거품이 끼기 전, 일본이 진정으로 번성했던 쇼와시대 후기의 분위기를 담고 있다. 마쓰다 세이코는 세상 걱정 하나 없는 미소녀의 모습으로 무대에 서서 치맛자락 펄럭이며 한가로운 노래만 불렀다. 그의 히트곡 대부분은 청량하고 달콤한 멜로디에 설렘과 희망만이 가득한 노랫말을 지녔다.
“그대를 만날 때마다 모든 것을 잊어버려/ 나는 그저 들뜬 어린 소녀/ (중략) /맨살에 반짝반짝 산호초/ 단둘이 파도에 휩쓸려 가도 좋을 것 같아”
마쓰다 세이코를 스타로 만든 기획자 와카마쓰 무네오의 후일담에 따르면, 섹스 판타지 장르의 원작 소설을 각색해 만든 영화 ‘블루 라군’을 보고 제목부터 (블루 라군의 뜻인 푸른 산호초) 이미지까지 그대로 노래에 담아냈다고 한다. 80년대 할리우드 스타 브룩 실즈가 출연했던 이 영화를 무척 좋아했는지, 그는 노래뿐만 아니라 가수의 이미지 전체에 남태평양을 덧씌웠다고 고백했다. 실제 마쓰다 세이코는 무대에서 세일러복을 종종 입었고 하얀 원피스를 입고 푸른 바다를 누비는 티브이(TV) 광고를 찍기도 했다. 그리고 80년대는 일본에 리조트 건설 붐이 일고 국외여행이 급증한 시기이기도 하다. 남태평양 해변에서 연인과 뒹구는 나날처럼, 모든 것이 좋고 더 좋아질 것 같던 시대를 상징하는 일본의 국민가요가 ‘푸른 산호초’인 셈이다.
그 좋던 시절에 청춘을 보낸 일본인들은 끝 모를 불황의 시대를 겪으며 중년이 되었다. 그사이 일본과 한국의 입장도 뒤바뀌었다. 80년대 일본 대중문화를 동경하고 표절하던 우리나라는 이제 일본을 넘어 전세계에 대중문화를 전파하는 문화수출국이 되었다. 영화와 드라마는 물론이고 제이(J)팝과 케이(K)팝의 격차도 많이 벌어졌다. 그런 상황에서 뉴진스 하니가 도쿄돔에서 ‘푸른 산호초’를 다시 부른 것이다. 그저 노래만 부른 것이 아니라 의상과 안무는 물론 표정과 손짓까지 마쓰다 세이코를 되살려냈으니 일본 팬들이 열광할 수밖에. 그리고 우리 입장에서는 으쓱할 수밖에. 평소 친분이 있던 일본인 아사히신문의 오타 나루미 기자에게 이런 의견을 확인해보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일본 뉴진스 팬의 다수는 젊은 세대이며 이들은 일본에서 먼저 유행했던 시티팝 장르를 잘 소화한다는 점에서 뉴진스에게 호감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는 의견을 덧붙여주었다.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가 몇가지 더 있다. 이 현상은 우연이 아니라 민희진 대표에 의해 철저하게 기획된 공연의 결과다. 케이팝의 성공 뒤에 뛰어난 기획자가 있다는 또 하나의 증거.
하니의 출신도 의미심장하다. 그는 베트남 부모님을 가진 오스트레일리아(호주) 국민이다. 할아버지가 태권도 도장에서 일한 인연으로 태권도를 배웠고 어릴 때 한국에 놀러 와 경복궁에서 한복을 입어 본 적도 있다고 한다. 그 후 케이팝에 흠뻑 빠졌다가 뉴진스의 멤버가 되었으니 한류가 만든 한류스타인 셈.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오스트레일리아 국적의 베트남 소녀가 한국 걸그룹 멤버가 되어 도쿄돔에서 일본의 국민가요를 불렀다. 와우, 정말이지 문화에는 국경이 없다.
에스비에스 라디오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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