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 보아야 예쁘다…한올한올 그려낸 세밀한 식물 세상 [ESC]
뾰족한 색연필·붓으로 그리는 식물 세밀화…작가 취향·미감 반영
꽃·버섯·단호박 등 갖가지 소재…자연에서 직접 보고 사진 찍어 연구
몰입·집중할 수 있는 취미 “복잡한 마음 사라져…컬러 테라피 경험”
“시클라멘은 꽃잎이 뒤로 뒤집힌 구조가 독특한 식물이에요. 뒤집히며 접힌 꽃잎의 명암과 섬세한 결을 살려야 해요. 무엇보다 그 식물만의 느낌을 살리는 게 중요하죠.” 영국과 한국을 오가며 보태니컬 아티스트로 활동 중인 송은영(45, 활동명 미쉘) 작가가 말했다. 내 앞엔 그의 책 ‘기초 보태니컬 아트 컬러링북’의 ‘시클라멘’ 편이 펼쳐져 있다. 시클라멘은 짙은 자주색과 하얀색이 공존하는 다섯 갈래의 꽃잎으로, 불면 날아갈 듯 섬세한 모양새였다. 송씨는 “원래 스케치도 직접 해야 하는데, 그러면 2시간 내로 못 끝낸다”며 색칠만 할 수 있게 선이 그려진 종이를 내게 건넸다.
색칠만으로 2시간이 훌쩍
지난달 20일 서울 양천구 송 작가의 작업실에서 열린 보태니컬 아트 1일 수업에 참석했다. 선이 그려진 시클라멘 그림은 내 손바닥보다 약간 컸다. 내심 ‘스케치까지 해도 시간이 넉넉할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웬걸. 파버카스텔 수채색연필 미들퍼플핑크(색상표에 따른 제품코드 125호)로 강약을 조절하며 결을 그리는 1단계부터 난관이었다. 조금만 세게 그어도 선이 너무 진해져 맑고 얇은 느낌이 달아났다. 그렇다고 힘 조절에만 집중하면 결의 흐름이나 개수를 놓치기 일쑤였다. 결의 개수를 하나하나 세어가며 그렸다. “틈틈이 색연필 끝을 사포에 갈아서 뾰족하게 하는 것도 잊지 마세요.” 송 작가가 말했다. 이어 레드바이올렛(194호)으로 꽃잎의 진한 부분을 강조한 뒤 콜드그레이(233호)를 써서 명암을 깊게 했다. “선이나 색의 경계가 너무 뚜렷한 부분에는 화이트(101호)로 문질러 부드럽게 해주세요.” 그의 조언을 따르자 꽃잎의 여리여리함이 살아났다. 마지막으로 해바라기씨처럼 뾰족한 수술과 암술을 표현하고, 빼빼로 모양의 줄기까지 그리자 나만의 시클라멘이 피어났다. 어느새 2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미술은 ‘1’도 모르지만 디테일에 집착하는 성격 때문일까. 송 작가와 그의 제자들은 “처음치고는 잘했다”며 칭찬을 건넸다. 내가 작달막한 시클라멘을 겨우 그리는 동안, 수업을 들은 지 평균 6년이 넘은 5명의 숙련자들은 차조·단호박 등 종이를 가득 메우는 크기의 작품에 몰입하고 있었다.
‘예술’ 앞에 ‘식물학의’라는 수식어가 붙은 보태니컬 아트는 이름처럼 과학과 예술의 접점에 서 있다. 식물을 속속들이 관찰해 그리는 세밀화라는 점에서 도감 그림과 비슷하지만, 작가의 취향과 미감이 적극 반영된다는 점이 차이다. 사진 기술이 등장하기 전인 14~16세기 영국과 프랑스에서 식민지의 이색 식물을 그려 기록하던 것이 보태니컬 아트의 뿌리다. 국내에서는 유럽에 비해 인지도가 낮은 편이지만 점차 저변을 넓히고 있다. 한국보태니컬아트협동조합(KBAC)이 2015년에 설립됐고 초기에는 수업 공간이 백화점 문화센터 등에 한정돼 있었지만 2018년을 기점으로 작가가 작업실에서 여는 수업이 부쩍 늘어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시중에 나온 드로잉·컬러링 북을 활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자연 상태 여러 개체 비교하고 공통점을
어릴 적부터 식물에 대한 애정을 품고 있던 송 작가는 13년 전 직장을 그만두고 보태니컬 아트에 뛰어들어 현재 작가이자 선생님으로 바삐 살고 있다. 최근엔 식물로부터 배운 삶의 지혜를 담은 책 ‘식물이라는 세계’를 출간했고, 같은 이름으로 개인전도 열었다. 내년에는 프랑스에서 워크숍을 열 예정이다.
보태니컬 아트를 잘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색연필, 붓 어떤 도구를 쓰든 끝을 뾰족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송 작가가 힘주어 말했다. 수채화 붓도 0호에서 -3호로 아주 얇은 것이 주로 쓰인다. 농도 조절도 중요하다. 송 작가는 “색연필의 경우 종이가 팔레트이기에 얼마큼의 색을 올려야 하는지 미리 계산해야 한다”고 했다. 또 “수채화는 팔레트에서 색을 섞을 때 너무 탁해지지 않게 적정량의 물감을 쓰는 것, 그리고 붓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리려는 식물에 관한 공부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책이나 인터넷 검색을 통해 식물 정보를 취득할 수 있지만 가장 좋은 학습법은 ‘필드’에 나가 마음에 드는 식물을 찾는 것이다. 아파트 단지나 산, 하천부터 수목원까지 어디든 현장이 될 수 있다. “필드에 나가면 식물이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형태로 존재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여러 번 가서 보고, 여러 개체를 비교해봐야 합니다. 개체별 특이점과 전체적인 공통점을 추려서 그림을 그립니다.” 사진 촬영도 적극 활용된다. 송 작가는 “앞, 뒤, 옆, 줄기, 잎 등 최대한 다양한 각도와 거리에서 찍는 것이 좋다”고 했다. 식물 일부를 가져올 수 있는 경우엔 확대경을 사용해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도 공부가 된다.
다만 그림을 그릴 때는 실물보다는 주로 사진을 활용한다. 이날 수업에서 경험 많은 송 작가의 제자들은 모두 찍어둔 사진을 보면서 작업했다. 식물의 실물을 보고 그리는 건 더 어려운 일이다. “채집된 식물이 시시각각 시들어가며 변하기 때문”(송 작가)이다.
이날 작업실에서 만난 주부 여인경(37, 경기 광명시 하안동)씨는 2015년 보태니컬 아트를 시작했다. 아파트 단지 곳곳에 솟아오르던 ‘먹물버섯’과 사랑에 빠졌다. “처음엔 특이하고 예뻐서 봤는데, 몇 시간 만에 쑥 자라 변화하는 게 재밌었어요.” 여씨는 송 작가에게 배운 대로 버섯 뒤에 흰 종이를 대고 사진을 찍었다. 그다음 사진 위에 격자 선을 그려 구도와 비례를 설정했다. 여씨는 직접 찍은 사진 1천여장을 참고해 먹물버섯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과정을 담은 색연필화 ‘먹물버섯’을 5개월에 걸쳐 완성했다. 이 작품으로 2020년 환경부 국립생물자원관이 주관한 15회 자생동식물세밀화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보태니컬 아트 작가 조아나(34)씨는 2015년 취미로 보태니컬 아트를 시작했다가 직업으로 삼기에 이르렀다. 처음엔 식물보다 그림에 관심이 많았는데, 오래 관찰하기 위해 식물도 키우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또 긴 외출을 하고 나서 가장 먼저 식물 상태를 확인해요. 물이 필요하진 않은지, 이파리 상태는 어떤지 등을요.” 줄리아 페페, 아스파라거스 나누스, 수국, 올리브나무, 남천 등 10종류에 가까운 식물을 손수 키우며 계절에 대한 ‘해상도’가 높아졌다고. “보통 계절을 온도로 느꼈는데, 식물을 키운 뒤로는 씨앗을 심고 싹이 트고 자라는 등의 변화를 보며 느끼기도 해요. 봄이 오면 벚꽃만 보이는 게 아니라 산수유, 매화도 보이고요. 시간의 흐름, 환경의 변화에 민감해졌어요.” 조 작가는 2019년 열린 14회 자생동식물세밀화 공모전에 ‘손바닥선인장’을 출품해 최우수상을 받고, 2021년에는 식물과 세밀화에 대한 기록을 담은 책 ‘식물 좋아하세요?’를 출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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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 그리며 환경의 소중함 느끼길”
보태니컬 아트를 즐기는 이들은 식생의 변화를 금방 알아챈다. 그림을 그리려고 특정 식물을 관찰하고 찾다 보면 개체 수가 줄어드는 것도 한눈에 보인다. 먹물버섯 그림에 빠진 여인경씨도 “아파트 단지 공원에 데크를 설치하고 낙엽을 모두 수거하는 등 정비를 한 뒤로 버섯이 많이 없어졌다”며 아쉬워했다. 한국보태니컬아트협동조합이 지난 6월11~17일 네이버 카페 회원 86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중복 응답 허용)에서도 ‘보태니컬 아트를 배운 뒤 가장 큰 변화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자연에 대한 관심 증진’이라고 답한 응답자가 60.5%로 1위였다.
안종복(59) 한국보태니컬아트협동조합 대표는 “애초에 협동조합을 설립했을 때 작품을 통해 환경의 소중함을 일깨우려는 목적이 있었다”고 밝혔다. 조합은 지난 10일부터 서울 인사동 갤러리인사아트에서 ‘난초의 미학, 손끝에서 피어나다’ 전시를 열었다. 조합 이사장인 신소영 작가를 포함해 29명의 작가가 참여해 총 59점의 작품을 선보였다. 주제를 난으로 잡은 이유에 대해 안 대표는 “개발과 파괴로 인해 멸종위기에 처한 난 원종이 많다”며 “전시를 통해 난초과 식물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자연생태 보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다”고 설명했다. 한국보태니컬아트협동조합은 이와 비슷한 취지로 오는 10월에도 국립생태원과 협업해 난 전시회를 열 계획이다.
오롯한 몰입 경험도 보태니컬 아트의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보통 1시간을 완전히 집중하기는 어렵잖아요. 그런데 식물을 그리다 보면 2시간도 훌쩍 지나 있어요.” 조 작가가 말했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통역사 이자영(52, 서울 마포구)씨는 지난해부터 보태니컬 아트를 시작했다. “처음엔 못 그리면 어떡하나 고민이 컸는데, 막상 시작하면 집중하게 돼요. 잡념이 모두 사라져요.”
식물을 그리면서 힘든 마음을 다독이기도 한다. “제게 보태니컬 아트는 치유예요. 식물을 관찰하고 집중하면서 마음이 편안해져요. 식물 그리기에 집중하면서 힘들고 복잡한 마음이 사라지는 걸 느낍니다.” 주지영(50, 경기 의정부시)씨는 6년 전 심리적으로 힘든 상황에서 보태니컬 아트를 시작해 큰 위안을 얻었다고 했다. 서울 양천구에 사는 캐리커처 작가 박은정(52)씨는 보태니컬 아트의 화려한 색채에 매료됐고 미술의 기본기를 다지는 효과를 얻었다고 했다. “식물 세밀화는 형태를 똑같이 옮기는 작업이라 관찰이 생명이에요. 2017년부터 보태니컬 아트를 하며 길러놓은 관찰력 덕에 캐리커처를 할 때 특징과 형태를 잡는 게 빠르고 정확해졌어요.” 또 그는 “내가 느끼는 보태니컬 아트는‘컬러 테라피’”라며 “꽃을 그리며 빨강·노랑 등 화려한 색깔을 쓰다 보면 치유가 된다”고 덧붙였다.
조합은 설문에서 ‘보태니컬 아트를 통해 어떤 마음의 안정을 경험했냐’고 물었다. 이에 ‘자신감·자존감 향상’이라는 답이 47.7%로 가장 많았고, ‘집중력 향상’(36%), ‘긍정적인 감정 증가’(30.2%), ‘우울증, 불안증세 완화’(29.1%)가 뒤를 이었다. ‘어떤 사람에게 보태니컬 아트를 추천하고 싶으냐’는 질문도 있었는데, ‘마음의 안정을 원하는 사람’이 54.7%로 1위에 꼽혔다. ‘자연과 교감하고 싶은 사람’과 ‘예술적 취미를 찾는 사람’이 각각 39.5%로 공동 2위였다. 섬세하고 조용한 성격이 세밀화 그리기에 잘 어울릴 것 같지만, 반대 성격이라고 해서 즐길 수 없는 건 아니다. 송 작가는 “무척 급한 성격을 지닌 제자가 있었는데 그림을 그리며 점점 차분해지는 걸 보았다”며 마음을 정돈하고 싶은 이들에게도 보태니컬 아트를 권했다.
유해강 허프포스트코리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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