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소년 나쁜 어른 [주말을 여는 시]
허연 시인의 ‘슬픈 빙하시대4’
자본주의 제도권 속 보통 사람
나쁜 소년이 되고 싶은 몸부림
냉혹한 빙하시대 깨려는 시도
슬픈 빙하시대4
나에게 월급을 주는 빌딩 뒤에는 타임캡슐이 묻혀 있다. 콘돔이며 뭐 이런 것들이 묻혀 있단다. 기념이란다. 난 그래도 학생 때와 마찬가지로 끝까지 간 사람을 존경할 줄은 안다. 그나마 다행이다. 난 때로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기도 하고,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침묵하기도 한다. 따라서 나는 매우 실존적인 잡놈이다.
착각은 오류를 따지지 않는 법. 오늘도 나는 시내로 돈을 벌러간다. 돈벌러 온 놈들이 잔뜩 몰려 있는 곳으로 15년째. 시내는 세상의 중심이다. 물론 착각으로 판명날 게 뻔하다. 개구멍에라도 빛이 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 또 하루를 썩힌다. 욕을 내뱉으며 엘리베이터 앞에 선다.
가끔은 토할 것 같다. 돈 버는 곳에선 아무도 진실하지 않지만 아무도 무심하지 않다. 난 천성이 도 닦는 놈은 못 된다. 버릴 뿐이다.
밤마다 내가 사나운 백상아리가 되는 꿈을 꾼다.
허연
· 1991년 「현대시세계」 데뷔
· 시집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등 다수
· 현대문학상 등 수상
허연,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민음사, 2008.
대학을 다니던 1990년대 중반, 학과 선배가 허연의 「불온한 검은 피(세계사·1995년)」를 읽어 보라고 권했다. 나는 그 시집을 읽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당시 시단의 세개의 축이었던 리얼리즘 계통, 모더니즘 계통, 순수 서정시 계통과 상관없이 독자적인 시 세계를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폭발적인 언술에서 느껴지는 이미지의 힘. 어둠을 품은 자아가 분출하는 내면적 고백이 '강인한 어둠'이란 구절로 다가왔다. '강인한 어둠'은 어둠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패기 넘치는 정신이 빚은 우울을 동반한 카타르시스였다.
죽음을 인식하는 시인의 우울적 포즈도 단순히 우울로만 끝나지 않고, 세상을 날카롭게 직시하는 눈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그는 그 한권의 시집만을 남겨 두고 어느 날 독자의 곁을 떠나 버렸다. 그러다가 2000년대 중반부터 다시 등장해 잡지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시대의 조류에 절대 휩쓸리지 않을 것만 같은 젊은 시인, 허연이 10여년 만에 돌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시집 타이틀에 나온 대로 '나쁜 소년'은 누구일까.
그는 말한다. "오랫동안 시 앞에 가지 못했다. 예전만큼 사랑은 아프지 않았고, 배도 고프지 않았다. 비굴할 만큼 비굴해졌고, 오만할 만큼 오만해졌다(휴면기)." 그는 분명 과거의 '허연'을 그리워하고 있다. 과거의 시집 속 '허연'은 온몸을 던져 뜨겁게 사랑했고 배가 고팠다.
그런데 현재의 시집 속 '허연'은 비굴해졌고 오만해졌다. 더이상 시대의 아픔이 담긴 '검은 피'를 시에 옮길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일까. 허연이 오랫동안 시를 떠나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사랑이 아프지 않고 배가 고프지 않고 오만이라는 내부적 정황이 자리했기 때문일까.
'슬픈 빙하시대 4'에 나오는 화자는 자본주의 제도권을 상징하는 "빌딩" 안에 살고 있다. 그는 그곳에서 생활하는 사회인이다. 사회인으로서 "끝까지 간 사람을 존경할 줄"도 알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기도 하고,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침묵하기도" 한다.
이것은 화자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보통 사람임을 자백하는 언술이다. 적당히 비굴하게 또는 적당히 비굴하지 않게 살아가는 사회인. 허연이 한동안 시를 떠나 있었던 이유가 거기에 기인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는 그런 보통 사회인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향한 비판의식으로 "매우 실존적인 잡놈"을 탈피하고자 한다.
"매우 실존적인 잡놈"을 탈피해 '나쁜 소년'으로 거듭나려고 그는 어느 날 "아픈 표정 하나 없이" "하루 종일 삶의 방점을 찍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가끔 꼬리나 흔드는, 힘없는 수족관 속 도미 같은 "용서한 자의 자태(도미)"로 살아가는 허연이 '나쁜 소년'으로 거듭나기 위해 몸부림친다.
그는 끊임없이 '나쁜 소년'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한다. 그가 다시 바라본 세상은 예전에도 그랬지만 "늘 흙탕(장마 또는 눈물)"의 세계이고 '빙하시대'이다. 혼돈으로 상징되는 '흙탕'이거나 냉혹한 현실을 상징하는 '빙하시대'로 보인 것이다.
그런 날카로운 시각에도 그는 쉽게 '나쁜 소년'이 되지 못한다. 비겁하게 "싫은 일은 절반쯤만 하면서 살아"야 했고, "절반의 타협(탑(塔)-비루한 여행)"을 감행해야만 한다. '나쁜 소년'으로 용기 있게, 무모하게 살아갈 수 없게 만드는 그를 둘러싼 생태 환경. "회식과 실적과 고지서 같은 것들에/걷어차이는" 그를 환경은 내버려두지 않는다. "시인들도 모이면 아파트 이야기를(생태보고서 1)"하는 환경에서 그는 결코 '나쁜 소년'의 꿈을 이루지 못하게 될 것만 같다.
그렇다고 허연이 '나쁜 소년'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나쁜 소년이 서 있다)" 방법을 실천하기 때문이다. '푸른 유리 조각'이라는 잠재적 가능성을 품은 그는 '나쁜 소년'에서 '나쁜 어른'으로 진화했는지도 모른다.
이 시집에서 허연은 분명 '나쁜 소년'이 아니라 '나쁜 어른'의 시각으로 날카롭게 현실을 바라보고 있다. 염세주의나 허무주의적 시각에서 현대성과 자본주의에 갇힌 영혼들을 있는 그대로 표현했다. 고단하게 비겁하게 암울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동시대의 영혼들을 끌어안으려고 시집 속으로 소환한 것이다.
나는 허연이 굳이 '나쁜 소년'이 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저항이나 반항의 '나쁜 소년'은 첫 시집 「불온한 검은 피」로 충분히 보여줬다. 그러니 동시대의 아픔을 '나쁜 어른'의 시각으로 날카롭게 노래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나쁜'이라는 수식어는 진짜 나쁜 게 아니라 시라는 형식 안에서 허연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자기 고백 혹은 경향성이기 때문이다.
하린 시인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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