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알아버린 당신, 살인을 할까요[허진무의 호달달]
영화를 사랑하고, 특히 호러 영화를 사랑하는 기자가 ‘호달달’ 떨며 즐긴 명작들을 소개합니다. 격주 목요일에 찾아갑니다.
큐어
감독 구로사와 기요시
출연 야쿠쇼 고지, 하기와라 마사토, 우지키 츠요시, 나카가와 안나
상영시간 111분
타인을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한 적이 있다. 하지만 죽이진 않았다. 대부분의 인간이 살인하지 않고 타인과 더불어 살아간다. 그런데 인간을 제외한 다른 동물들은 동족(同族) 간에도 서로 죽인다. 어쩌면 인간은 진실한 살의를 외면하고 자연의 순리에 거스르며 사는 것은 아닐까.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큐어>(1997)는 왠지 더 이상 생각하면 위험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작품이다.
일본 도쿄에서 연이어 끔찍한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체포된 피의자들은 직업, 성별, 나이, 주소가 모두 달라 서로 아무 관계가 없었다. 유일한 공통점은 흉기로 상대의 목부터 가슴까지 엑스(X) 자를 긋는 방식으로 살해했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가족, 친구, 동료를 죽이고선 자신이 왜 살인을 저질렀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경시청 형사 타카베 켄이치(야쿠쇼 고지)는 사건을 수사하다 피의자들이 살인 직전에 마미야 쿠니히코(하기와라 마사토)라는 남자를 만났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마미야는 상대방에게 최면을 걸며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당신은 누구야?” 과거 마미야는 신경정신의학을 공부하던 대학생이었다. 마미야는 괴로움의 증상이 아니라 괴로움의 원인인 타인을 제거하는 치료법에 이르렀다. 타카베의 친구인 정신과 의사 사쿠마 마코토(우지키 츠요시)는 “최면에 빠트려도 기본적인 윤리관은 변하지 않아. 살인을 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살인하라고 암시를 걸 수는 없어”라고 설명한다. 그러니까 피의자들은 마미야의 최면에 강제로 살인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살인은 모두 진실한 행동이었다. 마미야의 최면은 나는 누구인지 직시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타카베의 아내는 정신병 환자다. 집에 돌아오면 늘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세탁기가 소음을 내며 돌아가고 있다. 타카베는 아내를 사랑하지만(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스트레스 때문에 밥을 거의 먹지 못한다. 마미야의 최면에 걸린 인간이 들여다본 자신의 내면은 공회전하는 통돌이 세탁기 같았을 것이다. 그들은 살인으로 세탁기 전원을 끈다. 계속되는 괴로운 공회전에서 벗어난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큐어>를 통해 관객에게 ‘당신도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척하면서 살지 않나요’라고 묻는 듯하다.
인간의 생명은 무엇보다 소중하고 타인을 죽여선 안 된다는 윤리는 인간이 사회 공동체를 이루면서 만들어낸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떤 사회든 살인을 가장 중대한 범죄로 처벌하는 이유는 살인이 공동체를 파괴하는 위협이기 때문이다. 마미야가 인간을 치료하는 방법은 타인의 집합인 사회의 절멸이었다. 살인의 전도사처럼 사회에 최면을 퍼뜨린다. 수많은 호러 영화의 시·청각적 공포를 뛰어넘어 새로운 차원의 공포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카메라를 고정한 ‘롱 숏’으로 살인 장면을 평범한 일상생활처럼 보여준다. 피사체를 가까이서 찍는 ‘클로즈업 숏’은 감정을 강조하고, 멀리서 찍는 ‘롱 숏’은 감정을 제거하는 촬영 기법이다. 카메라가 햇볕이 따뜻한 아침의 파출소를 비춘다. 선배 경찰관은 쓰레기 봉투를 버리고 후배는 구청에 접수할 서류를 준비하는 중이다. 그런데 갑자기 선배가 권총을 꺼내 후배의 머리를 쏜다. 피가 바닥에 번져간다. 선배는 태연하게 뒤통수를 벅벅 긁더니 책상에서 커터칼을 집어든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살인 장면들은 쓰레기를 버리는 일상을 찍은 것처럼 특별한 감정을 보여주지 않는다.
많은 호러 영화가 귀청을 때리는 소리로 심장 박동수를 올리지만 구로사와 기요시는 인색하다는 느낌마저 들 만큼 소리를 절제한다. 대신 바람이 부는 소리,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세탁기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려주며 음산한 분위기에 천천히 젖어가도록 연출한다. 가장 충격적인 장면에서 소리를 없애 더욱 강력한 충격을 주기도 한다. 어느날 집에 돌아온 타카베는 현관에서 목을 맨 아내의 시신을 발견하고 주저앉는다. 머리를 감싸쥐고 입을 벌리지만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다. 아무런 음악이나 효과음 없이 별안간 눈앞에 벌어진 이 장면은 세상 전체가 음소거된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큐어>는 <회로>(2001) <절규>(2006)와 함께 구로사와 기요시의 ‘종말 3부작’ 혹은 ‘절망 3부작’이라고 불린다. <회로>의 유령은 “죽음은 끝없는 고립”이라고, <절규>의 유령은 “나는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모두 죽어주세요”라고 외친다. 이 영화들에선 ‘전부 없애버리고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절망적인 욕망이 보인다. 옴진리교의 지하철 사린 가스 테러를 비롯해 각종 엽기적 살인사건이 벌어졌던 당시 일본 사회의 종말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큐어>는 1997년 당시 한국 정부의 일본 대중문화 규제 조치로 수입되지 못했다. 디지털 비디오 디스크(DVD)와 블루레이 디스크로 발매되거나 일부 영화제에서 드문드문 상영됐다. 25년이나 흐른 2022년에야 극장에서 정식 개봉했다. 지금은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거친 깨끗한 화질로 감상할 수 있다.
허진무 기자 imagin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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