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오페라 ‘카르멘’‘나비부인’…부민관 전성시대
‘半島 樂界에 획기적 공전의 장거(壯擧)’. 1940년 10월25일자 매일신보는 후지와라 가극단의 오페라 ‘카르멘’공연을 이렇게 소개했다.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 10월 오페라 공연이라니! 그것도 경성 시내 한복판인 부민관에서였다. 경성부청(현 서울시청) 바로 건너편이었다.
일본 음악계의 스타인 테너 후지와라 요시에(藤原義江·1898~1976)는 1940년 10월25일~27일 자기 이름을 딴 오페라단을 이끌고 내한, ‘카르멘’을 올렸다. 한해전인 1939년3월26일 후지와라 가극단 이름으로 처음 도쿄 히비야 공회당에서 올린 ‘카르멘’으로 대성공을 거뒀다. 후지와라 가극단은 일본 패전 이후에도 대표적 민간 오페라단으로 활약했다. 재일교포 테너 김영길(일본명 나가타 겐지로)과 훗날 서울대 음대에서 제자를 키워낸 베이스 이인영이 이 가극단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후지와라가 돈 호세 맡아
세르게이 슈와이코브스키가 지휘하는 하얼빈 교향악단이 연주를 맡기로 했으나 공연 직전 시노하라 마사오(篠原 正雄)가 이끄는 도쿄관현악단으로 바뀌었다. 일본에서 처음 오페라 ‘카르멘’을 부른 메조 소프라노 사토 요시코(佐藤 美子)가 카르멘을, 남자 주인공 돈 호세엔 후지와라가 나섰다. 1937년 박태현이 설립한 민간의 경성백조(白鳥)합창단이 합창을 맡았다. 가사도 프랑스어가 아니라 일어로 불렀다. 입장료는 4원50전, 3원50전, 2원30전으로 상당히 비쌌지만 2000석 극장은 가득찼다.
이 공연은 기이할 정도로 공연 리뷰나 소개 기사를 찾기 어렵다. 조선, 동아일보가 폐간된 이후였기 때문에 한글 민간지는 그렇다쳐도 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나 매일신보도 광고나 짤막한 단신보도 밖에 없어 공연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전모를 파악하기 쉽지 않다. 이때문인지 음악계에서조차 1940년’카르멘’이 공연됐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이 드물다. 일본인이 올린 공연 자체에 무관심한 국내 음악계 분위기도 한몫했을 것이다. ‘카르멘’뿐 아니다. 부민관에서 열린 음악회 목록도 허술하기는 마찬가지다. 부민관 음악회에 대한 심층 분석은 차치하고, 연구 자체가 드물다.
◇기생 연주로 개관한 부민관
‘50만원의 거액을 던져 태평통(通)에 건축중이던 부민관은 7일로써 준공이 되었다. 부민관의 자랑인 대 ‘홀’은 3000명의 관중을 수용하는 것으로서 무대에만 2만킬로와트의 조명을 설비했고, 그 밖에도 ‘풋라인’ ‘보더 라잇’ ‘써스펜션’ ‘스풋틀라잇’등등 각 조명 장치와 조광기(調光器)도 설치했다고 한다. 개관식은 11일 오전10시반에 성대히 거행하리라고 하며 그날부터 사흘동안 매일 오후6시부터 개관 피로(披露)로 기생과 예기의 무용을 상연시킬터이라는데 입장료는 50전, 35전, 20전을 받으리라 한다. 그리고 11일과 12일 이틀 동안은 오전10시부터 오후3시까지 일반에게 공개해서 내부를 구경시킨다고 한다.’(‘今日 조성된 부민관 10일부터 피로 연주’, 조선일보 1935년12월10일)
‘경성의 명물’이라던 부민관 개관에 대한 반응은 싸늘했다. 부민관 개관 기념 공연으로 경성부 예산 5000원을 들여 기생 연주회를 연다는 경성부 발표에 비판을 퍼부은 신문들이 시큰둥했기 때문이다.’오천여원 경비들여 하필왈 기생연주’(조선일보 1935년11월20일)를 비롯, ‘대체 ‘부민관 다 됐음네’하고 첫 인사하는 것이 겨우 기생들의 웃음을 사는 것인가?’(휴지통, 동아일보 1935년 12월8일)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경성전기 기부금으로 건립
부민관 건립 비용 50만원은 경성전기가 댔다. 경성전기는 비싼 전기요금과 전차, 버스 독점 운영으로 회사를 공영화하라는 비판 여론이 높아지자 공공사업 시설비로 100만원을 경성부에 기탁했다. 이 돈으로 부민 병원을 세우고 남은 50만원으로 부민관을 설립했다. 대지 1486평,연건평 1717평에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부민관은 냉난방시설까지 갖춘 현대식 초대형 공연장이었다. 고정석 1800석, 보조의자 200석에 입석 1500명까지 더하면 35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1920년 개관한 경성 공회당과 1929년 11월 대강당 확장 공사를 통해 800석으로 늘어난 종로 기독교청년회관(YMCA)을 압도하는 규모였다.
◇일제 후반 공연의 메카
부민관은 일제 후반 10년 음악, 연극, 무용 등 공연의 메카 역할을 했다. 하얼빈 교향악단(1939년3월)을 비롯, NHK 교향악단 전신이자 당시 일본 최고 수준인 신교향악단(1939년6월10일~11일, 1940년6월15일~16일, ‘악단의 충동 신향 내연’, 조선일보 1939년5월25일)과 만주 신경교향악단(1940년10월7일) 공연이 열렸다. 국내 첫 전막 오페라인 ‘나비부인’(1937년 5월26일~27일)과 후지와라 가극단의 ‘카르멘’이 잇달아 올라간 무대도 부민관이었다. 특히 미우라 다마키가 초초상을 부른 ‘나비부인’엔 조선인 테너 김영길과 조영은이 상대역 핀커튼을 맡아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일본 중앙(中央)교향악단, 미우라 다마키 합창단 등 오케스트라와 합창단까지 일본에서 건너왔다. 부민관 개관을 기다린 듯한 초대형 공연들이 이어졌다.
◇개관 5개월만에 출연한 조선인 음악가
화제를 낳은 대규모 음악회가 부민관에 몰리면서 조선 양악계가 ‘셋방살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위축되는 경향이 나타난 것도 사실이다. 이경분 교수 연구에 따르면, 부민관 대강당을 선점한 음악 공연은 일본측 프로그램이었다. 첫 음악 공연은 1935년 12월15일 오후2시 경성제대 악우회 교향관현악단의 제11회 정기연주회였고 같은 날 저녁 8시 일본 성악가 사토 요시코(佐藤 美子)독창회였다. 아마추어 악단인 경성제대 교향악단은 일본인 학생 위주였고, 그날 협연자 역시 일본인이었다.
조선인 음악가가 연주한 첫번째 ‘순수 양악연주회’는 개관 5개월이 지난 1936년 4월24일 열린 ‘계정식 현악4중주단 제1회 발표회’(桂氏 4중주단 제1회 연주회, 조선일보 1936년4월22일)로 보인다. 계정식(제1바이올린) 박태철(제2바이올린) 안성교(비올라) 김인식(첼로)으로 구성된 4중주단은 하이든 현악4중주 D장조 64-5 ‘종달새’로 시작, 모차르트 현악4중주로 마무리했다. 계정식 현악4중주단은 다음달인 5월15일 조선음악가협회 제1회 연주회가 주최한 부민관 공연에도 섰다.
◇양악계의 약진, 1938년
1938년은 조선 양악계가 약진한 해였다. 채선엽(5월5일) 정훈모(5월20일) 독창회를 비롯, 안병소(10월28일·11월15일) 바이올린 독주회, 이관옥(11월4일) 독창회, 경성현악4중주단 음악회(12월7일) 경성음악협회 제1회 연주회(12월5~6일) 등 그해 부민관 음악회 약 50회 중 20회를 넘어선다. 그 해 일본인을 포함한 외국인 공연은 우크라이나 출신 피아니스트이자 도쿄음악학교 교수인 레오 시로타(Leo Sirota) 정도였다. 상대적으로 조선인 음악가들의 존재감이 돋보였다. 하지만 1939년 이후 하얼빈 교향악단, 신교향악단, 신경 교향악단과 후지와라 가극단이 화제를 모으면서 조선인 음악가들의 비중이 약해졌다.
◇안방 내주고 셋방살이(?)하는 조선 음악계
이 때문에 평단에서도 불만이 터져나왔다.
’봄 씨-즌이 반을 넘어서도 겨우 최창은 독창회와 신인음악회가 있었을 뿐으로 앞으로도 부민관 ‘홀’은 외래 연주가로 독차지한 감이 있다. 그렇게 한산한 원인을 들자면 하나는 조선의 음악가들은 종래로 모두가 유아독존적 선생님들뿐이어서 어떤 집단적인 활동이란다거나 연구 같은 기특한 발분이 없는 탓이고 또 한 가지는 악단적으로 기력이 없느니만치 안개만치의 분위기나 티끌만치의 자극도 없이 지내는 서재파의 실력으로서는 도저히 청중의 공명을 얻을만한 자신을 잃고 만 점이다.그리고 또 한가지 거기 부언할 것은 리사이틀 형식으로서는 흥행상 큰 결손을 각오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비극이 덮쳐있기 때문이다.’(耳豪, ‘셋방살이 악단’, 매일신보 1940년 5월21일)
◇행랑 셋방살이, 걷어치고 나가라
평론가 이호의 지적대로, 1940년 3월 부민관 대강당 음악 공연은 경성보육학교 음악회뿐, 전문 음악인들의 공연은 아예 없다. 테너 후지와라 요시에, 경성 YMCA 음악회, 경성사범학교 음악회 등 일본인이 주도한 공연 뿐이다. 경성 YMCA는 당시 일본인이 이끌던 단체로 종로에 있던 조선 중앙 기독교청년회를 흡수, 통합한 단체다. 회관도 일본인 거리인 장곡천정(長谷川町)에 있었다. 경성사범학교 학생, 교사 대다수도 일본인이었다.
이호의 분석은 일면 타당하다. 개인 리사이틀로는 2000석 대극장을 채울 만한 청중을 끌어들이기 어려운데다, 대규모 교향악단이나 오페라단을 꾸릴 형편도 아니었다. 부민관 같은 번듯한 공연장이 있는데도’객’(客, 외래연주자)에게 안방을 내줄 수밖에 없다는 비판이었다. 이 글은 음악계에 호소 내지 당부로 끝난다.
‘안채를 객(客)에 맡기고 행랑 셋방살이를 감수하는 악단 제군! 날씨도 차차 더워온다. 셋방을 걷어치고 나가지 않으려는가!’
◇참고자료
이경분, 부민관을 통해 본 경성의 조선양악계: 태평양전쟁 이전까지, 경성의 소리문화와 음악공간, 서울역사편찬원, 2022
김은영,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음악공연양상 탐구-매일신보를 중심으로, 이화음악논집 24-1, 이화여대 음악연구소, 2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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