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기업 주도 경제성장… 성공과 실패 되돌아보다

김용출 2024. 7. 13.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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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대 이후 조직·제도 등 갖춰
일부 국가는 1인당 소득 20배 늘어
20세기 ‘물질적 빈곤’의 종식 평가
美·유럽 중심 성장 이룬 시장경제
대공황·극심한 불평등 우려 시각도
사회민주주의적 정책 평가도 눈길

20세기 경제사: 우리는 유토피아로 가고 있는가/ 브래드퍼드 들롱/ 홍기빈 옮김/ 생각의힘/ 3만7800원

“영국의 학자이자 성직자인 맬서스는 민주주의, 이성, 여성주의, 계몽주의, 혁명 등을 찬양하는 논고들을 읽을 때마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 심한 반감이 발동하여 18세기가 끝나는 시점에 저술한 책이 바로 ‘인구론’이었다.”
맬서스의 저주에서 처음으로 벗어나서 물질적 빈곤을 종식한 세기라고 평가받는 20세기의 성공과 실패를 경제적 맥락에서 살펴본 책이 나왔다. 대공황을 초래한 1929년 ‘검은 목요일’ 당시 뉴욕증권거래소. 출처 위키피디아
긴 코가 인상적인 맬서스는 책에서 인구의 자연적 증가는 기하급수적이지만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밖에 증가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과잉인구로 인한 식량부족은 필연적이며, 그로 인해 빈곤과 죄악이 많이 발생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했다.

지금에야 틀린 분석이자 전망이라는 게 분명해졌지만, 그래도 그의 주장은 1870년 이전까지는 비교적 들어맞았다는 평가다. 농경의 발견 이래 1만년 동안 기술이 인구 증가와 속도 경쟁에서 빈번히 패배하면서, 인간들은 힘겹게 살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870년대 이후 상황은 급변했다. 인류는 경제적 성장을 위한 조직과 연구를 위한 제도, 기술을 갖추었다. 많은 기업 연구소가 세워지고, 근대적 대기업이 잇따라 탄생했으며, 세계화를 통해 급속히 확산했다. 1870년 아일랜드 벨파스트의 하랜드울프 조선소에서 진수된 철강 선체의 증기 여객선 ‘RMS 오시애닉’은 이 시대의 한 상징이었다. 프로펠러로 움직이는 오시애닉은 승객 1000여명을 태우고서도 리버풀에서 뉴욕까지 한 달 이상 소요되던 항해를 9일 만에 주파했다.
미국 텍사스의 한 유전
‘유용한 인간 지식의 글로벌 가치 지수’의 증가율은 1870년 이전에는 연 0.45% 수준에 불과했지만, 1870년부터 2010년까지 연 2.1% 수준으로 높아졌다. 1870년 지수를 1로 설정하면 2010년은 21에 달해, 140년 동안 무려 21.5배나 폭증했다.

인류는 이런 기술과 기업 주도의 근대적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북대서양 일부 국가는 1인당 소득이 1870년에 비해 20배 이상 증가했다. 지독한 가난에 가둔 문을 열어젖힌 것이다. 하루 2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최극빈층 비중 역시 1870년에는 무려 70%에 달했지만, 이제는 9%가 되지 않는다.

20세기는 무엇보다도 경제 발전이 압도적으로 주도한 최초의 세기였다. 마침내 맬서스의 저주에서 처음으로 벗어나서 물질적 빈곤을 종식한 세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브래드퍼드 들롱/ 홍기빈 옮김/ 생각의힘/ 3만7800원
미국 클린턴 행정부 시절 재무부 차관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주도하기도 했던 저자는 책 ‘20세기 경제사: 우리는 유토피아로 가고 있는가’에서 우리가 발을 디딘 지층인 20세기의 성공과 실패를 경제적 맥락에서 들여다본다. 특히 단순히 세계가 어떻게 부유해졌는가를 설명하려고 하기보다는 유례없는 물질적 풍요를 바탕으로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성장을 지속하기 위해 어떤 시스템을 개발하고 시도했는지를 집중적으로 살펴본다.

저자는 먼저 20세기를 단순히 1900년부터 1999년까지로 보는 게 아니라 역사와 경제의 흐름에 따라서 확장한다. 즉 인류를 극심한 빈곤에 가두었던 문을 여는 데 성공한 1870년부터 이 성공이 가져온 부의 급격한 상승 궤적의 속도를 유지하는 데 실패한 2010년까지의 140년을 ‘장기 20세기’로 규정한다.

이는 영국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과 대비된다. 홉스봄은 19세기를 1776년부터 1914년까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발흥했던 ‘장기 19세기’로, 20세기를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부터 소련이 몰락한 1991년까지 현실 사회주의와 파시즘이 세계를 뒤흔든 ‘단기 20세기’로 규정했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과 홀로코스트, 소련의 흥망, 절정에 달한 미국의 영향력, 현대화된 중국의 부상 등과 같은 현대사를 배경으로 전개된 ‘장기 20세기’의 경제성장은 무엇보다 시장경제에 의해 매개됐다. 오스트리아 출신 영국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시장만이 성장의 과업을 이룰 수 있으며,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시장 시스템의 작동에 믿음을 가지라고 강조했다. 사실상 사회정의 같은 것은 잊어버리고 ‘오로지 시장’만 보라고 했다.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초래한 리먼 브러더스 파산
시장경제는 제1차 세계대전 직전과 1920년대에 잠시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급속한 성장을 이뤘지만 이후 대공황과 극심한 불평등, 혼란도 함께 가져왔다. 장기 20세기 동안 시장경제의 문제점을 해결하겠다며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타났고 현실에서 격돌했다. 20세기 전반기에는 이탈리아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즘과 러시아 블라디미르 레닌의 현실 사회주의가 등장하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휩쓸기도 했다.

저자는 경제적으로 가장 성취가 좋았던 해법은 제2차 대전 이후 미국과 유럽을 휩쓴 사회민주주의적 정책이었다고 분석한다. 서구 각국은 소득 재분배를 위해 소득 부조와 누진세를 적용하는 데 초점을 맞췄고, 이에 따라 전후 1946년부터 1976년까지 미국의 1인당 실질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연평균 3.4%를 기록했다.

1990년대 인터넷을 비롯한 첨단 과학기술 시대를 거친 뒤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촉발된 경기 침체를 겪어야 했다. 경제위기에 주요 국가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장기 20세기는 마침내 2010년에 끝났다. 2006년부터 2016년까지 미국의 1인당 실질 GDP는 0.6%로 쪼그라들었다.

“… 세 번째 변화는 2008년에 시작된 대침체로, 우리가 1930년대의 케인스주의의 교훈을 모두 망각했을 뿐 아니라 경제 회복을 위해 필요한 일들을 할 역량도 의지도 부족하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네 번째 변화는 대략 1989년 이후 지금까지 전 세계가 글로벌 기후위기에 단호하게 대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네 가지 사건들이 하나로 합쳐진다면 이후의 역사는 그 이전과는 분명히 다를 것이며,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새롭고 전혀 다른 거대한 내러티브가 필요하게 될 것이다.”

마치 도마 위에 재료를 놓고 멋지게 요리하듯 저자는 수많은 쟁점과 깨알 같은 디테일을 잘 요리한다. 그리하여 경제사의 주요 사건이나 경제학사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은 마치 영화의 조연처럼 빛난다. 1, 2차 세계대전, 대공황, 냉전, 사회주의 몰락, 무솔리니,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 리훙장, 덩사오핑, 맬서스, 하이에크, 케인스, 폴라니, 마셜 플랜, 볼 파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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