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의 인터스텔라] "타인에게 의젓한 존재가 되어보라" 순례자 김기석
소유에서 향유로, 하나님도 향유의 대상
허무가 준 선물, 일희일비하지 않는 것
불행해질 최고의 가능성은 행복 꿈꾸는 것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영원히 슬플 것이요
인간의 위대함은 다시 살아내는 용기
“인간은 그 자체로 수수께끼입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불안 속에서 지냅니다. 방황이 상수인 삶, 이게 바로 우리의 실존입니다.”-김기석의 ‘고백의 언어들’ 중에서.
오랫동안 우리 시대의 설교자 김기석의 언어들을 찾아다녔다. 신학과 인문학을 경계없이 아우르는 그의 강연은 우리를 멈춰 서게 한다. 처음엔 다정한 목소리와 형형한 눈빛으로. 그다음엔 인간의 영성과 하나님의 신성을 잇는 것이 이토록 아름답다는 증명으로.
할머니가 옛이야기를 들려주듯 웃는 입에서 개울처럼 졸졸 흘러나오는 그의 언어는, 세상의 질서와 은총의 질서가 만나는 풍경 속으로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43년 동안 섬기던 청파교회 담임 목사직을 내려놓은 후 펴낸 책 ‘고백의 언어들’은 가히 김기석 언어의 정수라 할 만했다.
천문학자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에서 시작해, 괴테의 ‘파우스트’와 단테의 ‘신곡’, 시몬 베이유의 ‘머뭇거림’을 지나 샤갈과 렘브란트의 그림 앞으로 안내하는 이 책은 종교 서적이라기보다 곁에 두고 오래 참고할 만한 인문 바이블에 가깝다.
“사도 바울은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스토아 철학과 다른 철학의 이미지를 사용하는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한 번도 예수라는 중심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나는 모든 종류의 사람에게 모든 것이 다 되었습니다.’ 바울은 임기응변의 대가입니다”라고 그는 책에 쓰고 있다.
좋을 때도 나쁠 때도 미지의 전능자에게 기도하는 모든 신실한 이들을 대신해, 기독교 사상가 김기석에게 만남을 청했다. 은퇴 후 지인들이 서재로 마련해주었다는 과천의 아담한 오피스텔을 찾아갔다. 초인종을 누르자 반짝이는 눈이 웃으며 나타났다. 여기서 저 너머를 보는 듯한 시인의 눈, 감옥에서 오래 수련한 사람 같은 형형한 눈이었다.
불 켜진 등대가 표정을 지으면 저런 모습이겠구나… 서가와 책상, 실내자전거만 놓인 단출한 공간에 햇빛과 바람이 자유롭게 쉬고 있었다.
“정현종 시인의 시 중에 ‘비스듬히’라는 시를 좋아해요. 우린 각자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어요. 나에게 꿈이 있다면 누군가가 나에게 잠시 기대고 돌아가서, 좀 더 맑아지면 좋겠다는 거예요.”
은퇴한 목사가 체리와 자두를 손수 씻어 접시 위에 놓아주었다. 테이블 위에 펼쳐진 보자기 속 산수화가 근사했다.
-멋진 수묵화네요. 절벽이 마치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 같습니다.
“이 그림을 보면 나는 저 바위 위에 그냥 ‘우두커니’ 앉아 있고 싶어요(웃음).”
-우두커니요?
“네. 내 꿈이 우두커니 있는 거예요. 그 얘기를 했더니, 아는 분이 또 ‘우두커니’라는 제목의 책을 사진으로 찍어서 보내줬네요.”
미소가 동심원처럼 퍼지는 얼굴 위로 바람이 들이치자, 그가 사뿐사뿐 걸어가 창문을 닫았다. 편백 나무 서가에 배인 나무 향이 공기 중에 찻물처럼 풀어졌다. 거장들이 초대된 티파티처럼, 장르의 진폭이 큰 책들이 경계 없이 수더분하게 꽂혀 우리를 바라보았다.
‘노자와 장자’ ‘이슬람의 기원’ ‘열하일기’ ‘연옥의 탄생’... 저 경계 없는 인문의 향연을 어디서 또 만날까.
-’연옥의 탄생’은 뭔가요?
“(미소 지으며)연옥이라는 건 애당초 있는 게 아니라 교회에 의해서 13세기에 발명된 거예요. 왜 연옥이라는 교리를 만들 수밖에 없었는지, 중세 전문가가 분석한 책입니다. 그런데 나는 체계를 갖춰서 독서하지 않아요. 그냥 줄기를 쳐 나가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요즘엔 또 어떤 꼬리를 물고 있나요?
“하랄트 얘너라는 독일인이 쓴 ‘늑대의 시간’이라는 책인데요. 패전 이후 독일이 1945년부터 1955년 사이에 정말 치열하게 문명을 복구하기 위해 애를 쓰던 시간의 이야기예요. 여기서 ‘늑대의 시간’은 제로의 시간이에요. 깊은 낙망 속에 있었을 것 같은데 그 속에서도 삶에 대한 긍정성을 잃지 않고 어떻게 난관을 이겨냈는지를 그렸어요. 동시에 히틀러 시대에 본인들이 했던 홀로코스트의 야만과 침묵을 합리화하기 위해 어떻게 변명을 했는지… 매우 자기반성적인 글이었죠.”
요즘엔 역사책보다 미술책을 더 좋아한다고 했다. “이건 에드워드 호퍼 그림을 가지고 소설가들이 한 점당 한 편의 소설을 써서 모은 책이에요. 예를 들어 ‘여름날의 저녁’이라는 그림을 보고 소설적인 상상력을 펼치는 거죠.”
책장을 넘기는 손끝이 기쁨으로 가늘게 떨렸다.
-호퍼의 그림에는 내러티브가, 마그리트의 그림에는 시가, 일리야 레핀의 그림에는 감정이 배어있어요. 목사님은 ‘우두커니’ 누리는 시간 속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셨어요?
“즐거움이죠. 전철 타고 오면서 책을 보는 시간이 정말 소중해요. 잠시 핸드폰만 안 보면 누릴 수 있는 시간인데… 30분 시간이, 너무 짧아서 아쉽습니다. 독서의 시간은 나를 잊는 시간이에요.”
-나를 잊는 게 왜 그렇게 좋습니까?
“숙명여대 교수 한 분이 암에 걸려서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되었다고 해요. 6개월 남은 시간을 뭐에 쓸까 하다가 암벽 등반을 했더랍니다. 그런데 도봉산에 가서 바위를 타고 있으면 ‘내가 죽으면 아내는 어떻게 살지, 자식은 어떻게 살지, 학교는 어떻게 끝내지 ' 근심 걱정이 하나도 안 떠오르더래요. 그렇게 바위 앞에서 나를 잊는 시간 동안 서서히 건강이 회복되어, 병을 잊고 오래 살았답니다. 나를 잊는다는 건 그런 거죠.”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나를 잊을 새가 없어요. 다들 운동하고 독서하고 기록하고, 빽빽한 루틴을 만들어 ‘더 나은 나’를 향해 돌진합니다.
“자기 관리 그 자체는 아름다운 일이에요. 철저히 자기 삶을 살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도 용기입니다. 그러나 그 일상을 규정하는 게 ‘카피’라면 문제가 있겠지요. 다른 사람이 누리는 건 나도 누려야 해, 다른 사람이 근육 키우면 나도 키워야 해… 이렇게 유행을 따라 하면 카피죠.”
-어떤 철학자는 ‘미지근하게 살면 지옥에도 못 간다’는 단테의 신곡을 인용하면서 최선의 길을 가지 않는 게으름이 죄라고도 하더군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종교 개혁자들은 차라리 ‘과감하게 죄를 지으라’고도 했습니다. 종교적인 계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하고, 내게 주어진 자유를 낭비하지 말라는 거죠. 주어진 시간을 한껏 살아내고 설사 그 삶의 가능성이 죄로 귀착된다 해도, 그건 차후의 문제니, 일단 뭐라도 하는 게 낫다고요.”
-요즘엔 ‘자기다움’조차 고정된 오리지낼러티가 아니라 흐르며 확장되는 ‘네트워크 그 자체’로 봅니다. 나를 알려면 ‘내가 어디에 노출되어 있는가’를 파악해야 한다고요.
“네. 핵심은 지향입니다. 내 삶이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그걸 알아차리는 게 중요해요. 삶은 여행이라기보다는 순례에 가까워요. 특정 장소로 간다기보다 지향하는 바를 알고 계속 나아가는 거죠. 중세 격언 중에 ‘여행자는 요구하고 순례자는 감사한다’라는 말도 있어요.
여행자는 비용을 지불하기 때문에 서비스가 만족스럽지 않으면 불평하죠. 순례자는 길에서 방해물을 만나도 가고자 하는 지향이 분명하기에, 걸림돌조차 안내자로 인식합니다.”
-순례자신가요?
“순례자이고 싶습니다.”
-확정할 수는 없고요?
“순례자는 기꺼이 위험 속으로 갑니다. 불확실성과 모험 속으로 몸을 던지죠. 저는 삶에 익숙해져서 그렇지 못할 때가 많았어요.”
-기독교 사상사, 목회자, 문학평론가, 강연가… 세상이 부여한 여러 정체성의 옷을 입고 살았는데, 스스로는 자신을 뭐라고 합니까?
“스스로는 진실을 찾아가는 구도자라고 생각해요. 순례자와도 연결되지요. 목회자로서는 뛰어나지 못했어요. 사람을 돌보고 섬기는 일은 서툴렀죠. 제일 편안할 때는 수도원에 가서 침묵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은퇴가 곧 진정한 자기로의 진입이군요!
“바흐의 음악 칸타타 중에 ‘시므온의 노래’가 있어요. 평생을 메시아가 오기를 기다렸는데 예수님이 그인 걸 알아차린 후 “이제야 이 종을 평안히 놓아주세요, 나는 만족합니다’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은퇴 축하드려야 하나요?” 할 때마다 “축하받고 싶다”고 해요. 은퇴해도 여전히 분주하지만 힘들지 않아요.”
무거운 등짐을 내려놓은 나귀처럼, 홀가분해 보였다.
-일하는 동안 아쉬움은 없으셨나요?
“(미소 지으며)칭얼대는 사람을 더 따뜻하게 다독여주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합니다. 제 기질이 좀 그래요. 내색 안 하고 참는 사람은 다가가 격려했지만, 습관적으로 칭얼대는 사람에겐 좀 차가웠어요. 모두 품기엔 에너지가 좀 부족했어요. 허허.”
-개인적으로 수많은 설교 중에 시편 8편 ‘인간이 무엇이관데 주께서 나를 생각하시고, 인자가 무엇이관데 주께서 나를 돌보시나이까’라는 문장이 마음에 꽂혔습니다. ‘인간이 무엇이관데’는 마음을 울리는 심오한 질문입니다.
“밤하늘의 총총한 별을 바라보고 무한을 생각하는 사람은 ‘인간이 무엇이관데’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 수밖에 없어요. 광대무변한 세계에 내가 없을 수도 있는 존재인데, 내가 세상에 있잖아요. 인간은 자기를 돌이켜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이 광막한 우주에 나는 왜 있는가.’
질문에 답은 없어도 느낄 수는 있어요. 이 광대한 세계가 나로 하여금 느끼게 해요.
‘나는 이토록 작구나.’ 이렇게 작은 내가 저렇게 큰 세계를 사유할 수 있으니 얼마나 놀라워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현대인이 경외심을 잃은 까닭은 큰 세계를 보지 않기 때문이라고. 압도적으로 큰 세계 앞에 서지 않고 땅만 보고 살면 혼돈만 깊어진다고.
-큰 세계란 무엇일까요?
“에베레스트처럼 우뚝한 산이나 밤하늘의 별도 있지만, 제가 생각하는 큰 세계는 큰 정신이에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거기서 식민지 백성으로 온갖 서러움과 천대를 겪으며 신을 원망하고 염세적 운명에 사로잡힐 법한데도 일단의 사람들이 고난받는 종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타자의 고통을 자기 안으로 끌어들여서 정화하는 이런 모습이 큰 정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대속했다는 게 어려운 얘기가 아닙니다. 나와 무관한 타자가 없고 모두 하나님이 내게 보내주신 사람으로 여기는 거지요.
서예가이신 무의당 장일순 선생이 하신 얘기가 있어요. 요단강은 아주 작은 강이지만 세례자 요한과 예수 같은 분이 나왔기에 큰 강이라고요. 크다는 것은 계량할 수 있는 수치가 아니라 포용의 사이즈입니다.”
-저는 최근에 아일랜드 소설가인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고 ‘큰 정신’이란 이런 것이로구나 하고 깨달았어요. 크리스마스 날 수녀원에서 학대받는 맨발의 고아 소녀를 구한 주인공이 엄청난 두려움 속에서도 자문합니다.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 부를 수 있나.’ 그 모습에서 ‘인간이 무엇이관데’라는 질문의 답을 보았습니다. 매 순간 압도하는 문장의 힘은 시선의 높이, 작가가 지닌 포용력의 크기였습니다.
“(미소 지으며)사실은 엄청 심오한 건 아닙니다. 내가 받은 친절을 기억하면 됩니다. ‘남의 눈에 티끌 대신 숨겨진 눈물을 보려 했던 예수의 마음’에 답이 있어요, 타자의 어둠은 덥석 끌어안아야 하는 영역이죠.
윤동주의 시 중에 ‘팔복’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원래 성경의 ‘팔복’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의 것이요,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가 위로를 얻을 것이요… 대구로 여덟 문항이 이어지는 내용인데, 윤동주의 공책을 보면 그 모든 걸 썼다 지웠다 해요.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8번 반복)... 저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로 끝이 납니다.”
-저가 영원히 슬플 것이라니요…
“영원한 슬픔이지요. 혹자는 윤동주가 일제의 어둠으로 깊은 좌절에 빠진 것으로 해석하지만 아닙니다.”
-그럼 무엇인가요, 그 슬픔은?
“여기 김기석의 슬픔이 있고, 김지수의 슬픔이 있고, 또 누군가의 슬픔이 있다고 합시다. 각자 자기 슬픔의 우물만 길어서 마시다 보면 자기 슬픔 밖에는 안보이죠. 그런데 우물 저 깊은 곳으로 내려가면 지하 수맥으로 다 연결돼 있잖아요. 그 자리에 가면 너와 내가 둘이 아니지요. 윤동주는 그걸 알아차린 겁니다.
슬픔은 단순히 애상이 아니라 우리를 연결해 주는 중요한 매개라는 거죠. 서시에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구절과도 연결이 되고요.”
-필멸의 동지로 모든 생명체를 인식하면 서로의 사무침을 헤아리는 ‘편안한 슬픔’에 이르게 된다고 저도 배웠습니다. 목사님은 이번 책 ‘고백의 언어들’에서 인간의 기본 정조를 ‘불안’이라고 하셨어요. 불안 덕분에 인간답게 된다고요. 그건 또 무슨 뜻인가요?
“불안은 자기 속이 근본적으로 비어있음으로 생기지요. 그런데 그 빈터는 다른 걸로 메워지지 않아요. 개별 인간 속에 도사린 불안의 공터를 채울 유일한 해결책은 ‘의미’입니다. 그런데 의미가 발생하는 지점은 바로 타자를 책임지려 할 때죠.
마태복음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구절이 있어요. 예수는 ‘내가 그 짐을 다 맡아줄게’라고 하지 않아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죠. 그 역설 속에 진실이 있어요. 내 생애 문제로 골똘할 때는 문제가 안 풀려요. 오히려 나의 시련을 공적 자산으로 삼아 타인의 어려움을 해결하려 들 때 놀라운 힘이 생깁니다.”
그렇게 의미와 보람을 찾을 때 생기는 감사와 기쁨이 불안의 유일한 해독제라고 했다.
-예일대 심리학자 폴 블룸은 ‘최선의 고통’에서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창조된 게 아니라 고난과 성장이라는 진화의 원리로 설계되었다고 주장했어요. 목사님이 ‘고백의 언어들’에서 소개한 칼 야스퍼스의 한계상황도 그와 유사한가요?
“한계상황은 일종의 벼랑 끝 체험입니다. 예컨대 죽음, 질병, 무기력 등의 상황이죠. 서양인이 느끼는 한계상황의 또 다른 측면은 죄책감이에요. 키에르케고르는 자기 아버지가 신을 저주했다는 죄책감을 해결하지 못해서 괴로워하죠.
서양은 죄책의 문화예요. 서양인은 신 앞에서 느끼는 죄스러움, 존재의 무게를 고민한다면, 동양은 수치의 문화죠. 타자에게 내가 어떻게 비칠까, 어떻게 하면 공동체에서 수치를 당하지 않고 괜찮게 보일까를 염려합니다.
어떤 상황이든 벼랑 끝에 이르면 실존적 도약을 할 수 있어요. 갑자기 암에 걸리면 승진이나 주식 가치가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 모든 게 상대화되면서 ‘내 삶은 뭐지?’ ‘내가 잘 살았나?’ 근본적인 질문을 할 수밖에 없죠.
한계상황은 불유쾌한 경험이지만,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안내하는 초대장입니다.”
-반면 행복은 실존적 도약을 만들어내지 못하는군요?
“행복은 돌이켜보면서 ‘참 좋았지’라고 느끼는 감정이죠. 행복은 결과지 목표가 아닙니다. 제가 충격 요법으로 가끔 하는 말이 ‘불행해질 수 있는 최고의 가능성은 행복을 꿈꾸는 거다’예요. 그럼에도 지금 행복하려면 향유로 한 발짝씩 걸어가면 돼요.
향유와 소유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구분했어요. 꽃 한 송이가 있을 때 ‘참 좋다’라고 느끼면 향유이고, 꺾어서 내 것으로 만들면 소유죠. 그런데 자기 결정권이 사라지니 다들 가벼운 소비로 ‘뭔가를 했다’는 성취감을 채우려 드니 안타까워요. 사실 하나님도 우리에겐 향유의 대상입니다.”
-신도 향유의 대상이라고요?
“네. 좋아서 믿는 거지 받아내려고 믿는 건 아니거든요. 출세가 보장되고 불행이 없어질 거라고 믿는다면, 그건 신을 사용하는 거예요.
제가 재밌게 본 영화 중에 ‘브루스 올마이티’라고 있어요. 신에게 불평불만이 가득한 브루스라는 인물이 전능자가 되어보는 이야기예요. 가령 브루스는 보름달을 좋아하는 연인을 위해서 사랑 고백할 때 달을 끌어오거든요. 그런데 달이 지구와 가까워지니 반대편에선 해일과 지진이 일어나요. 누군가에게 좋은 일이 누군가에겐 재앙이 될 수도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땅에서 올라오는 기도를 다 들어줄 수가 없어요.”
-나의 욕망을 긍정하는 동시에 그물처럼 이어진 타자의 선한 미래와 충돌하지 않으려면, 대체 어떤 언어로 나의 필요를 구할까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향유를 담은 성경 구절이에요. 신에게 요구하기를 그만두고 신의 생명 사역, 기쁨에 동참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나다움’ ‘인간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이 무엇이관데’에 대한 궁극적인 댓구이고, 신과 인간의 연합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의 탄식 시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구절이 ‘어찌하여’와 ‘언제까지’라고요. 심판에도 시간이 필요한가요? 당장 악을 심판할 수 있는 전능자가 ‘언제까지’ 기다리고, ‘어찌하여’ 인간과 연합하려 하십니까?
“(미소 지으며)수생(受生)은 수난이라고 합니다. 생명을 받는다는 건 사실 어려움, 고통 속으로 들어오는 거죠. 어떤 철학자는 탄생을 ‘세상에 내동댕이쳐졌다’라고도 해요. 선택하지 않았는데 던져졌으니, 암담하죠. 그런데 그렇게 던져진 존재는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 ‘함께의 존재’입니다.
직면한 기본 정서는 불안과 암담이지만, 관계 속에서 선한 영향을 주고받으면 ‘불안의 악력’이 현저히 약해져요. 반대로 삶에 보람이 없으면 운명의 손아귀에 붙들리고 수순처럼 우울의 늪에 빠집니다. 그래서 신은 권유합니다. 한 번이라도 ‘타자에게 의젓한 존재’가 되어보라고.”
-의젓한 존재라…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에 이런 장면이 있어요. 등장인물인 에스트라공이 너무 권태로워서 신발을 벗었다가 모자를 벗었다가, 나중엔 ‘너무 심심한데 목이나 매볼까’ 하던 차에, 어디선가 ‘살려달라’는 외침을 듣거든요. 처음엔 “저 외침은 우리랑 관계없어. 인류를 향한 걸 거야. 우리를 특정한 게 아니잖아”라고 해요. 조금 있다 “그런데 지금 여기 우리밖에 없잖아. 그러면 우리가 인류네”라고 깨닫습니다.
무의미를 이기는 유일한 길은 고통받는 타자에게 다가서는 것! 베케트가 전하고 싶었던 핵심 메시지가 그거였어요. 책임윤리! 그게 결국은 레비나스의 철학이고 데리다의 철학인 거죠.”
-문득 궁금하군요. 목사이지만 허무를 느낄 때는 없는지요? 가톨릭계의 김기석이라고 할 수 있는 최대환 신부는 ‘부활을 믿으면서도 공허에 직면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사실 청년 시절, 저를 가장 괴롭혔던 감정이 허무감입니다. 인간은 무에서 창조되었기에, 무로 돌아가려는 성향이 있어요. 원래의 질료로 돌아가려는 근원적 끌림이 허무 의식이죠.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시절이었고 역사에 대한 책무 의식이 있었음에도, 저는 엄청난 허무감에 시달렸어요.
30대 중반에 이르러셔야 그런 감정이 희석됐습니다. 허무를 극복한 게 아니라 그저 익숙해졌을 뿐이었지요. 40대에 이르러서야 허무의 세례를 받았던 게 도움이 됐어요.”
-허무의 세례라니요?
“제 안에 집착, 애착이 없다 보니 모든 가치가 상대화되더군요. 예컨대 ‘이걸 놓치면 끝나는 거야’ ‘인정받지 못해서 속상해’ 이런 마음이 거의 없었어요. 지금도 사람들이 알아보고 좋아해 주시면 감사하지만, 별로 들썩이지 않아요. 환호는 언제든 거둬질 수 있기에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동요하지 않음이 젊은 날 허무 의식이 준 선물입니다.”
흑백의 당위를 요구받던 한 시절을 지나오면서, 그가 느낀 것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뿌리뽑힘의 감정이었다. 흑과 백이 아닌 회색지대에서 김기석의 ‘머뭇거림’은 무르익었다.
-신념 가진 자는 위험하다,고 이어령 선생도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서 당부했습니다.
“저는 지나친 확신을 갖는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아요.”
신념이 배제와 폭력을 낳는 것을 익히 보았기 때문이다.
-떨어져서 조망의 거리를 확보하는군요. 종종 칼 세이건이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를 묘사한 ‘창백한 푸른 점’을 인용하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별의 먼지’라는 천문학자의 말에 공감하시나요?
“인간이 별의 먼지라는 건 은유적 표현이 아니라 사실이죠. 별들이 탄생하면서 생겨난 원소가 우리의 몸을 이루고 있잖아요. 그 물리적 현실을 직시하는 게 시죠.
박정만이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87년 9월 6일 새벽 1시 50분, 새벽 2시 30분에 오는 시를 막 받아적어요. ‘나는 사라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 나는 시가 갖고 있는 이 쓸쓸함과 광활함을 몸으로 느껴요. 박정만 시인은 안기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고 그 수치심을 견딜 수 없어서 매일 소주만 마시다, 우주에서 쏟아져 내리는 시를 받아적고 죽었어요.”
문득 우주 그 자체가 신의 몸인지, 분리된 피조세계인지 우리의 인지로는 분류도 측량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아득한 안도감이 들었다.
-성경의 욥기에는 욥이 자식도 재산도 건강도 잃고 고통 속에서 신을 원망하다, 하나님에게 혼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들리는 신의 호통이 너무 크고 아름다워 말문이 막혔습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바다의 근원에 들어가 보았느냐? 이슬방울은 누가 낳았느냐? 얼음과 서리의 어미는 누구냐? 독수리가 높은 곳에 집을 짓는 것이 네 명령이냐? 네가 아직도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나를 중심에 두고 생각할 때와 큰 세계 속에서 나를 바라볼 때 그렇게 달라지는 거죠. 큰 세계 앞에서 욥이 고백하죠. ‘내가 이제까지 하나님에 대해서 귀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제 눈으로 당신을 뵈옵니다.’ 에필로그에서 신은 욥에게 다시 아들 일곱과 딸 셋을 주십니다. 재산은 두 배로 주시고요.”
-이미 그만큼의 아들딸을 잃었는데, 상처 입은 욥은 다시 행복할 수 있었을까요?
“잃은 만큼의 아들딸을 또 낳았다는 건, 그 상처에 머물지 않고 삶을 이어갔다는 걸 의미하지요. 그게 욥의 아름다움입니다. 납득할 수 없는 현실이 닥쳐도 삶을 계속하는 것. 아니, 새롭게 시작하는 것, 초연하게.”
-뭉클하네요.
“그게 인간의 위대함입니다.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이라는 책을 보면 탄생성이라는 개념이 나와요. ‘시작은 끝이 줄 수 있는 약속이며 유일한 메시지다… 실제로 모든 인간이 시작이다.’ 욥기에서도 아들딸을 다시 낳아서 행복했을까,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지만, 들여다보아야 할 것은 다시 살아내는 그의 용기입니다.
사는 건 사실 우울하고 힘들어요. 간간이 웃으며 지나갈 뿐이죠. 매일 행복하면 그건 광기겠지요.”
시련을 만날 때는 군대에서 야간정숙보행하듯 지나가야 한다고 했다.
“군목이 되기 위해서 군에서 훈련받을 때 야간에 적진을 걷는 모의 훈련을 했어요. 실제로는 대낮이었는데, 앞 못 보는 사람처럼 팔다리를 휘휘 저어가며 걷다가 ‘조명탄!’ 소리를 들으면, 총을 바닥에 던지고 냅다 엎드립니다. 그렇게 한참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들어 가야할 방향을 확인하는 거죠.
인생도 그래요. 장애물을 만나 꼼짝 못 할 때가 있잖아요. 따지고 보면 오도 가도 못한 덕분에 갈 길을 가늠할 수 있는 겁니다.”
-실례지만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만 68세입니다.”
-68세는 어떤 나이인가요?
“하루하루 잘 노는 꿈을 꿀 나이죠. 아낌없이 자기를 내어주는 우정의 공동체를 누릴 나이입니다. 유대교와 로마 사회는 철저한 기브앤테이크 사회였지만 예수가 보여준 세상은 되받을 것을 생각하지 않는 흘러넘침의 세상이었어요.”
-외로운 청년들에게는 뭐라고 하시겠어요?
“내가 여기 있다는 것, 그건 기막힌 기적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창백한 푸른 점’ 말고는, 우주에서 어떤 지적인 생명체가 발견된 적이 없어요. ‘넌 공부를 못해, 키가 작아…’ 세상이 우리에게 수모를 안겨주려 해도, 나만큼은 나를 수용해야 합니다. 기적으로서의 내 삶을 살아내야죠. 생각보다 어렵지 않습니다.
저는 제러미 리프킨이 들려준 행복의 수학 공식을 좋아합니다. H(Happiness)=C(Capital)/D(Desire). 사람들은 H 행복값이 커지려면 C 자본 값이 커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D 욕망 값을 줄이면 자연히 H 행복값이 커집니다.
D를 조절하는 비법은 소유보다 향유에 가치를 두는 거죠. ‘이 정도면 됐어. 이것으로 충분해’. 꽃 한 송이의 신비를 향유하면 명품백 없다고 불행해지지 않아요. 청년들에게 당부합니다. 혹시 ‘내가 속고 사는 건 아닌지’ 돌아보라고요. ‘이 정도는 누려야 행복한 거지’ 남들 기준에 내 인생을 떠맡기는 건 아닌지.”
-소유에서 향유로, 잘 전환할 수 있는 팁이 있을까요?
“누가 좋은 차를 타도 ‘난 됐어. 필요하지 않아’ 이 말을 입에 붙이면 평정심이 더해집니다. 전 ‘됐거든’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아요(웃음). 그렇게 해도 우리 안에는 식민지가 있어서 ‘좋아요’ 댓글 하나에 내 자유와 행복을 덥석덥석 넘겨주죠. 그래서 연약한 저는 칭찬 댓글도 보지 않아요(웃음). 휘둘리고 싶지 않습니다.”
-크고 부드럽고 연결된 언어를 쓰는 비결이 있습니까?
“적당한 독서와 다층적 사고가 도움이 됩니다. 중학교 시절부터 새벽에 일어난 게 평생 습관이 됐어요. 새벽에 깨어서 공부하고 책 읽는 시간이 참 좋았습니다. 함석헌 선생의 막힘없이 흘러넘치는 큰 정신과 언어에 감화받았고, 밀란 쿤데라, 마르케스, 오르한 파묵, 니코스 카잔차키스, 도스토옙스키의 책으로도 많이 배웠어요.”
-성경도 수많은 이야기와 감정의 총합입니다. 왜 신은 이야기로 자신을 드러냅니까? 문학에 등장하는 하나님은 또 어떤 모습입니까?
“하나님은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어요. 각 사람의 인생에 어떻게 개입했는지, 독특한 이야기의 형태로 나타날 뿐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신을 다 알 수 없습니다. 특별히 제가 좋아하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는 이런 명대사 있지요.
“하나님은 굉장한 임금이시라… 그냥 용서해 버리는 거지요.” 죽은 혼령이 와서 자기 죄를 조목조목 고해도 하나님은 하품하며 꾸짖으시고 “가거라, 천당으로 썩 꺼져. 베드로. 이 잡것도 넣어줘” 그래요. 재밌지요? 큰 틀에서 보면 인생은 다 가엾으니까요.”
-마지막으로 무신론자들에게는 어떤 말씀을 들려주시겠어요?
“신을 믿거나 안 믿거나, 기독교 신앙은 인류가 가진 매우 가치 있는 유산입니다. 종교가 다르다고 그 가치를 향유하지 못한다면 그 또한 낭비지요. 저는 비기독교인들에게 ‘예수 믿으세요’라는 말은 거의 하지 않아요. ‘저 사람 곁에 가면 참 좋다, 끌린다, 알고 보니 예수 믿네’ 정도면 좋겠어요. 다짜고짜 ‘예수천국 불신지옥’ 외치면 싫잖아요(웃음).
어쩌면 선교도 매력의 감염입니다. 내가 매력 있는 존재가 되는 것보다 더 큰 선교가 어디 있겠어요. 슬픔도 지층 아래로 내려가면 다 통하는 것처럼, 결국 우리는 근원적인 자리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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